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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39화 (40/134)

<39>

톡. 톡.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약품과 식품은 행정부의 허가가 없이는 유통될 수가 없다.

사람의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궁에 가기 불편한 것과는 별개로 행정부에 직접 방문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어. 가서 어떤 모욕을 당하든 절차상 필요한 일이야.’

결정이 내려지자 모든 게 간단해졌다.

나갈 채비를 끝내고 1층으로 내려가자 막 운동을 마치고 온 에이든 경과 마주쳤다.

“어디가?”

“황궁에 다녀올게요.”

“황궁에? 괜찮겠어?”

“문제될 거 없어요.”

진통 포션은 사제들이 일일이 만들어야 해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낮다.

그러다 보니 가격이 무척 비싼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게 진통제다.

진통제는 필연적으로 내게 돈과 권력을 쥐여줄 수밖에 없다.

찰나의 굴욕을 만회해 줄 만큼 거대한 성공이 예정되어 있다.

어차피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당할 만큼 당했는데 더 무서울 것도 없다.

“같이 갈까? 원한다면 그 서류도 내가 등록해 줄 수 있어.”

“아뇨. 제가 직접 해결해야 해요. 남의 손을 탈 서류가 아닌걸요.”

선을 그은 뒤 저택 문을 나서자 에이든 경이 염려 섞인 시선을 한 채 따라 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몸도 마음도 산산조각이 났던 터라 걱정하는 건 알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처럼 엉망이 아니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많이 건강해졌고 마음도 제법 단단해졌다.

어떻게 보면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나오기 전보다 더 독해진 부분도 있다.

그러니 더는 걱정할 필요 없다.

“에이든 경. 전 더 이상 예전처럼 나약하지 않아요.”

“나약하진 않지만 무력한 건 여전하지. 돈도 권력도 없잖아.”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그러니 황궁에 들러야만 해요. 제게 없는 것들을 만들어 내야 하거든요.”

무슨 수를 써서든.

뒷말을 삼킨 뒤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항상 배려에 감사드려요. 그럼 다녀올게요.”

그렇게 나는 걱정을 뒤로한 채 황궁으로 향했다.

* * *

오랜만에 들른 황궁은 다름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달라진 게 있다면 황궁의 행정구역을 드나들 때 보여 주는 내 신분증일 테다.

‘셀레나 레이온.’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파문당해 더 이상 그들의 성을 쓸 수 없어서 내가 만든 성이었다.

유서 깊은 귀족의 성씨를 쓰지 못하는 게 아쉽진 않다.

오히려 곧 참여 예정인 박람회 때 내가 선택한 이름으로 진통제를 공개할 수 있어서 기대되었다.

‘그런데 대체 행정부에서 왜 나를 부른 걸까.’

서류에는 셀레나 레이온이란 이름을 썼으니 나를 알아봤을 리가 없다.

서류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참고 서류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진통제 자체에 대한 불신일 수도 있어.’

진통 효과를 가진 약물이 행정부 허가를 받은 적은 있어도 그 효과가 대중적으로 인정된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진통제란 건 필연적으로 신전과의 충돌을 야기한다.

신전은 진통 포션을 통해 자금줄을 틀어쥐고 권력을 확보한 상태고, 진통제는 그러한 신전의 세력 확장을 저지할 테다.

그러니 황실 측에서 사전에 진통제를 활용해 작전을 짜려는 걸 수도 있다.

물론 이건 내 거창한 상상이고, 사실 별것 아닌 문제로 불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자네 자선 파티에 초대받았나?”

“자선 파티?”

앞서가던 궁정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로펜 가에서 준비했다는 자선 파티 말이야. 아내가 꼭 초대장을 얻어 오라고 난리야.”

“아하. 그거라면 유명하지.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도 숨겨 둔 딸을 자선 파티에서 공개하기로 했다지 아마.”

“그랬지. 듣자 하니 오빠인 부기사단장이 그렇게나 아낀다며?”

“에스타리온 백작부터가 싸고돈다던데 뭐.”

더 이상 그들에게 바라는 바가 없어서, 백작가의 근황을 듣고도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실망이 없기에 애정도 없다. 간단한 법칙이다.

“앗. 백작님! 백작님 아니십니까!”

앞서가던 이들의 목소리에 앞을 확인하니 멀리 에스타리온 백작이 보였다.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으며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뜨거운 무언가가 퍼져나갔다.

분노와 악의만으로 피가 끓을 수도 있구나.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다물었다.

어차피 궁에 올 때 각오한 일이었다. 백작은 행정부 수장이라 이쪽에 살다시피 하니까.

“제럴드, 디아고. 오랜만일세.”

백작은 상대에게 집중하느라 나를 보지 못했다.

에스타리온 백작은 지옥 같은 고통에 허우적댔던 나와 달리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이단심문소에서 수갑을 찬 손목에 동상에 걸려 영구적인 흉이 남은 나와는 달랐다.

“딸 아이가 자선 파티를 로펜 가와 함께 준비하긴 했다만 내 소관이 아니라 초대장을 주는 건 힘들 듯하군. 하지만…….”

이야기를 이어가던 에스타리온 백작을 피해 몸을 감추었다.

혹여 백작이 나를 보곤 진통제 허가가 나는 걸 방해하진 않을까 염려해서다.

‘오늘만이야. 우선은 허가를 받는 게 더 중요해.’

마음이 상하지만 내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는 건 오늘만이다.

주먹 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복잡하게 끓어넘치는 감정을 참아 냈다.

거칠어지는 숨을 감내하며 에스타리온 백작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저벅. 저벅.

말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그러고 나자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빌어먹을…….”

어설픈 욕이었지만 어딘가 속이 시원했다.

에이든 경이 왜 욕을 달고 사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덕분에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행정부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 * *

“아, 저희가 셀레나 레이온 씨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물품의 허가에 앞서서 해당 약물이 얼마나 신뢰성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행정부의 안전관리부 직원은 말을 빙빙 돌리며 연신 손을 비벼 댔다.

“아시다시피 요즘엔 약물 허가가 아주 까다롭게 이루어집니다. 법이 그래요, 법이. 하지만 약간의 성의가 있다면 또 다르겠죠.”

목적은 뇌물이었다. 탐욕에 찬 눈을 보자 한숨이 밀려 나왔다.

‘차라리 잘됐어. 진통제를 두고 진지하게 일하려 한 거라면 서류 처리가 늦어질지도 모르잖아.’

품에서 금화를 꺼내 서류 사이로 슬쩍 내밀었다.

얼마 전 에이든 경에게 받은 월급으로 이렇게 쓸 생각은 없었는데.

“아이고, 참.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잘 부탁드릴게요.”

“아이고, 걱정 마십쇼. 최대한 빨리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닌지 직원은 오 분 만에 뚝딱뚝딱 서류를 승인 처리해 주었다.

결재 서류를 받은 뒤 기분 좋게 안전관리부를 나서려던 때였다.

문을 열자 에스타리온 백작과 딱 마주쳤다.

“넌… 쯧.”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그가 혀를 찼다. 혐오스런 감정이 역력했다.

“또 어떤 간교한 거짓말을 하려고 황궁에 온 것이냐. 아니, 그보다 황궁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던가?”

“…….”

“앗. 백작님. 행정 서류를 처리하러 온 손님입니다.”

“행정 서류?”

직원의 설명에 에스타리온 백작이 내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갔다.

내용을 읽은 그가 비웃음을 지었다.

“진통제? 역사적으로 사기꾼들이나 만들어 내던 약물이지. 어디 제대로 된 진통제가 있었던 적이 있던가. 잘 만들어 봐야 마약을 섞어다 만든 기력회복제에 불과한 것을.”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거겠죠.”

“더러운 사기꾼의 딸 아니랄까 봐. 남의 인생이나 훔쳐 사는 비루먹은 것. 어디 한 번 이딴 약물이나 팔아 봐라. 내가 직접 너를 사기죄로 감옥에 투옥시켜 주마.

나를 사기꾼으로 잡아넣기 위해 약물 허가를 취소하진 않는단 말이었다.

거칠어지는 숨을 갈무리한 뒤 몸을 굽혀 서류를 주워 폈다.

비참하지만 참을 수 있다. 이단심문소의 죽을 듯한 고문도 경험해 봤는걸.

‘에이든 경이 동행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에게 이런 꼴을 보여 주긴 싫었다.

나는 모멸감을 견딘 채 발걸음을 떼었다.

감정에도 흔적이 남는다면 내 발걸음에는 열기 어린 복수심이 서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굴욕은 찰나이고 복수는 영원할 것이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황궁을 빠져나왔다.

* * *

황궁에 다녀온 다음 날, 에이든 경과 나는 윌이 거주할 보육원을 알아보러 8구역에 나왔다.

8구역은 생각보다 더 환경이 안 좋았다. 마약에 취한 이들이 바닥을 뒹굴었고 행인들의 눈빛엔 음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제가 정말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는 걸 이런 때에 체감해요. 수도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거든요. 아니, 알았지만…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어요.”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체감하는 건 다른 문제지. 그래도 다행히 보육원이 꽤 시골에 위치해 있었어. 뒤로는 숲이고 근처에 작은 밀밭도 있다더군.”

“그런 곳이면 자유롭게 뛰어놀며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겠네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멈췄다. 문을 열고 내리자 낡은 보육원이 보였다.

“신전에서 운영하는 곳이에요.”

보통 신전에서 운영하는 곳이 제국에서 운영하는 곳보다는 좋다고 한다.

대문 너머로 들어서자 마당에서 공놀이를 아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안녕.”

아이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오히려 긴장한 눈빛만 받게 되었다.

의외인 건 아이들이 무서워할 줄 알았던 에이든 경에는 쭈뼛대며 다가간다는 거였다.

“뭐야, 공놀이 중이야? 어느 팀이 몇 대 몇으로 이기고 있어?”

“우리가 3대 1로 지고 있어요!”

“그럼 내가 지는 팀 하지 뭐.”

“와, 진짜요?”

“근데 지금은 안 돼. 너희 원장 선생님부터 봐야 하거든. 원장 사제님 어디 계셔?”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색해하는 나와 달리 스스럼없이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조금 부러웠다.

에이든 경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선생님도 못하는 게 있었네? 아이들과 안 친하다니 의외야.”

“…며칠 시간만 주면 친해질 수 있어요.”

“삐졌어?”

“아니요!”

순간 나도 모르게 발끈하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원장 사제님 오셨어요!”

낭랑한 아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육원 원장을 확인하는 순간, 수면 아래 가라앉혀 놓았던 공포가 떠올랐다.

손끝이 저릿하도록 두려웠고 몸이 굳었다. 우수수 돋는 소름에 몸이 떨렸다.

내 앞에 이단심문소에서 나를 담당했던 사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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