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38화 (39/134)

<38>

우편을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서류를 확인했다.

황실 행정부서에 거래 허가서와 약물보증서를 얻기 위해, 헤레이스가 보내 준 진통제에 관한 설명서를 보낼 예정이었다.

‘허가를 쉽게 내어줄지 모르겠네.’

진통제라는 게 사회적으로 어떤 파급 효과를 낼지 모르는 법이다.

신전을 견제할 수단이 되는 만큼 환영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도 평소 행정부의 업무처리를 생각하면 쉽게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서류를 봉투에 봉한 뒤 가지고 내려가자 프레드가 고용인들을 모아놓고 세부 규칙을 설명하는 게 보였다.

프레드의 근처에선 얼마 전 할머니를 잃었던 윌이 구슬을 가지고 혼자 놀고 있었다.

“윌. 아침 식사는 했어?”

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나이가 어려 할머니를 잃은 충격에서 빨리 벗어난 듯했지만, 또래 친구가 없이 혼자 저택에서 노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얼른 좋은 시설을 찾아야 할 텐데.’

“셀레나 씨. 그게 황궁 행정부에 부칠 서류인가요?”

프레드 씨는 집사가 되며 내게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에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그가 가진 집사로서의 철칙이라고 한다.

“네. 부탁드릴게요.”

“아닙니다. 그보다 셀레나 씨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요?”

“다름 아니라… 혹시 제 아내에게 주시는 약을 조금 더 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약이 부족하신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두통으로 죽어가다시피 한 아내가 약 덕분에 몸을 회복해나가니 주변에 은근히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인들이 진통제를 조금만 얻을 수 없겠냐고 통 사정을 해서…….”

프레드 씨의 부탁이 곤혹스럽긴커녕 진통제가 인정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진통 포션은 무척이나 비싸잖습니까. 민간요법으로 쓰는 것들은 효과가 미비하고.”

“이해해요. 저도 두통이 심하거든요. 약은 얼마든지 판매할 수 있어요.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 뭔가요?”

“이 약을 누가 만들어서 유통시키는지만 확실히 해 주세요.”

“그걸로 됩니까?”

“네. 입소문이 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거니 너무 부담 갖진 않으셔도 될 거예요.”

“좋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약은 배송이 오는 대로 바로 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참, 황궁에 보낼 서는 서류는 그건가요?”

“아, 여기 있어요.”

프레드 씨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주었다.

오후에 프레드 씨도 황궁에 들러야 해서 가는 길에 내 서류를 함께 처리해 주겠노라 나선 것이다.

“이건 공작님께 온 서류입니다. 대신 전해 주시겠습니까?”

“네. 그럴게요.”

그에게 서류를 받은 뒤엔 에이든 경을 찾아 서재로 갔다.

에이든 경은 서재 한쪽에 놓인 소파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가슴팍에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꼰 자세가 격의 없는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못 깨우겠어.’

살짝 흔들거나 기척을 내면 될 일인데 그러기가 힘들었다.

곤히 잠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시선을 못 떼겠어.’

무뚝뚝한 표정이나 형형한 눈빛까진 보았는데 이렇게 아이처럼 순해 보이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조금만 더 보고 있고 싶었다.

깊은 눈매와 기다란 속눈썹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건 지금이 아니면 안 될 테니까.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황태자를 좋아할 때는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책이 어떤 건지, 어떤 사고를 하는지는 궁금했지만,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서 넋 놓고 보진 않았다.

그리고 에이든 경은 아름답기보단 잘생긴 외모였다.

황태자보다 선도 굵었고 남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도 자꾸 눈길이 가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윽.”

잠든 에이든 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에이든 경?”

그를 불렀지만 깊은 잠에 빠졌는지 반응이 없었다.

미간에 진 주름이 점점 짙어졌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게 꿈을 꾸는 듯했다.

“큭!”

찡그려진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가 이런 얼굴을 한 건 처음이었다.

“에이든 경. 에이든 경!”

팔을 붙잡아 흔들자 그가 버둥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네트…….”

맥이 탁 풀렸다. 아니,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했다.

이네트.

여자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를 공작가에서 내쫓게 만든 이름이기도 하다.

물론 관련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이 이름이 조금 불편해졌다.

아주 조금, 신발 속 모래 알갱이처럼. 입 안에 난 작은 혓바늘마냥…….

그건 아마도 이네트라는 여자를 부르는 그의 음성이 애달파서 그럴 테다.

“…크윽! 컥!”

에이든 경이 내는 고통 어린 소리에 그를 두들겨 깨웠다.

“일어나요! 에이든 경!”

팔을 찰싹찰싹 때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의 볼이라도 두들기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뺨에 닿기도 전, 내 몸이 뒤집히며 바닥에 처박혔다.

“꺅!”

에이든 경은 과정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나를 제압해 바닥에 눌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두 팔을 제압당한 채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아, 아파요! 에이든 경! 저예요, 저!”

“…선생님……?”

자신이 붙잡은 게 누구인지 깨달은 에이든 경은 뒤늦게 나를 풀어주었다.

“서, 선생님. 괜찮아? 다친 데 없어?”

그가 허둥지둥 나를 잡아 일으켰다.

벼락처럼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움츠리자 에이든 경이 안절부절못하며 확인했다.

“괜찮아요.”

“미안해. 많이 아플 텐데.”

스스로도 많이 놀랐던지 에이든 경은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벌벌 떨었다.

미안해서 고개를 푹 숙이는 게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실수잖아요. 자책하지 마요.”

“선생님이 화를 내고 뺨이라도 때리면 좋겠어. 그럼 좀 덜 미안할 텐데. 손목에 멍들겠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염병할, 나쁜 꿈을 꿔서 그래. 한동안 안 꾸더니 젠장!”

“많이 나쁜 꿈이었어요?”

사실은 이네트가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는 누구일까. 그에게 어떤 존재이길래 꿈에도 나오는 걸까.

에이든 경에게 물어볼까.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

아, 아니야, 물어보지 말자. 괜히 물었다가 기분만 안 좋아질 수도 있는걸.

“그냥 뭐… 꿈이 다 거기거 거기지.”

그리 대답한 에이든 경은 저도 모르는 사이 얼굴에 난 흉터를 문질렀다. 나는 일부러 화젯거리를 바꿨다.

“행정부에서 서류가 왔어요.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재빨리 서류를 건네주자 에이든 경은 내용을 확인했다.

“복지부에서 왔는데?”

“복지부요? 뭐라고 쓰여 있나요?”

“아. 윌에 관한 서류야. 그게…….”

빠르게 서류를 읽어내리던 에이든 경이 인상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서류를 끝까지 확인한 뒤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개자식들! 일이란 걸 똑바로 한 적이 없으면서 나만 관련되면 사냥개처럼 달려들지!”

에이든 경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제국법에 의하면 고아들은 보육원에서 자라는 게 맞습니다. 친인척이 아닌 이상 아이를 거둘 자격이 없으므로, 아이의 주소지에 따른 행정분류에 따라 이번 달 말일까지 8구역의 보육원으로 보내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8구역은 슬럼 그 자체잖아. 특히 노예상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인데 거기 갔다간 분명 납치당해서 노예가 될 거야!”

그는 분통을 터트리며 씩씩거렸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에이든 경은 눈을 질끈 감은 뒤 심호흡을 했다.

벌게진 얼굴과 이마에 돋아난 핏줄이 그가 얼마나 분노하는 중인지 설명해 주었다.

“이 자식들은 아이의 미래가 중요한 게 아냐.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건수를 잡고 싶은 거라고.”

“…보육원에 보내지 않으면 정치적인 압박이 들어올 거예요.”

“알아.”

에이든 경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흥분한 것과 달리 차분한 태도였다.

숱 많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생각을 정리한 그가 말했다.

“직접 가서 보육원을 확인해 봐야겠어.”

“직접이요?”

“최소한 내가 가서 얼굴을 내비치면 윌을 특별히 관리해 주겠지. 보육원을 후원해서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고.”

“좋은 생각이에요.”

“말일이면 이 주밖에 안 남았네. 며칠 내로 8구역에 있는 보육원을 쭉 둘러봐야겠어.”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그러면 좋지.”

“좋아요. 일정이 되는 때를 맞춰 보도록 해요.”

“후우…….”

나는 에이든 경이 감정을 갈무리하는 걸 지켜보며 행정 서류를 접었다.

윌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보육원에 가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에이든 경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며 염려했지만, 그가 신경쓰는 이상 윌은 안전할거다.

그러니 또래 친구들 틈에서 외롭지 않게 클 수 있을 테다.

‘생각해 보면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크며 많이 외로워했었어.’

외롭다는 걸 인정하는 게 싫었지만 사실 그랬다.

몸이 안 좋은 바람에 또래 친구도 몇 없었고, 시온은 나와 잘 지냈지만 마음을 나눌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용인들에게 마음을 의지할 수도 없었다.

넓은 저택의 고독한 공기를 홀로 감내하는 건 무겁고 쓸쓸한 일이었다.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프레드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셀레나 씨. 안에 계신가요?”

“아, 네.”

문을 열자 프레드 씨가 보였다.

“수업 중이신건 알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셀레나 씨. 행정부에서 셀레나 씨에게 직접 방문해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행정부에서요?”

“예. 그래야만 서류를 접수해 줄 수 있다더군요.”

머리가 아파 왔다. 행정부에 방문하면 행정부 장관인 에스타리온 백작과 마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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