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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37화 (38/134)

<37>

“가만 보니까 선생님은 다른 귀족들보다 아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서.”

“힘이 강하지도, 검을 알지도 못하는 제게 공부는 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였거든요.”

“으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열 가지 기본법에 대해 공부해 볼게요. 민법이나 사법은 몰라도 되지만 기본법은 제국민이라면 다 알아야 하는 사항이니까요.”

자연스레 수업 주제는 법조문으로 옮겨져 갔다.

에이든 경은 법이란 단어에 기가 죽더니 어려운 단어가 나오자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수업을 회피하거나 딴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는 이해가 안 되는 건 다시 물어보았고, 쉽게 외워지지 않는 건 머리를 두드리며 기억하려 애썼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 조항은 노예에 관한 거예요. 중대한 죄를 짓거나 납득할 만한 사유가 없는 이상 자유민의 노예화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에이든 경이 중얼거렸다.

“노예의 자유 또한 인정되지 않는다.”

그의 얼굴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에이든 경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조항은 그냥 넘어가는 게 좋을까.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최근에 시장에서 도망치다 붙잡힌 노예를 봤어.”

“마음이 안 좋으셨겠어요.”

“보통의 사람들은 노예를 인간 취급 안 해. 그걸 잘 아는데도 기분이 너무 더럽더라고.”

“…에이든 경…….”

그가 괴로운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똑같은 붉은 피가 흐르는데, 왜 누구는 노예고 누구는 귀족인 걸까.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해 나가도 이해가 안 가. 오히려 더 모르겠어. 난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누군가 나를 자유민이라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 대우가 달라졌어. 내가 나로 지내는 부분에 왜 허락이 필요한 거지?”

노예로 살았던 적이 없어서 감히 어설픈 위로를 건넬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기분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때는 가족과 함께였고 지금은 혼자다.

몸담고 있던 사회가 변했고 사람들이 나를 대하던 태도가 바뀌었다.

물론 에이든 경과 완전히 같은 맥락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마음이 아파.’

조심스레 에이든 경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맞닿는 손을 통해 온기가 전달되면 좋겠다.

최소한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려 주고 싶었다.

거친 손등에 감촉이 느껴지자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이든 경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저 눈을 질끈 감은 채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길 반복할 뿐이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자 감정을 갈무리한 에이든 경이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며칠 사이에 뭔가 달라진 것 같아.”

“네? 제가요? 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냐?”

“있긴 했죠.”

“무슨 일?”

그가 스스럼없이 제 감정을 토해낸 후라 그런지, 편안한 마음으로 고백하게 됐다.

“상담을 받아 보기로 했어요.”

“상담? 무슨 상담? 상담은 왜?”

“심리 상담이요. 음… 사실 제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에이든 경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한결 심각해진 낯빛을 한 그가 물었다.

“어떤 문제? 많이 심각해?”

“가끔 두통과 악몽에 시달려요. 어떤 악몽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제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된 것 같아서요. 아, 제가 어린 시절 기억이 없거든요.”

여관에서 쓰러지기 직전, 작은아버지를 부르던 목소리를 들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루카스 에스타리온을 뜻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통과 악몽, 기억에 작은아버지가 연관되어 있는 게 분명해.”

기억을 찾으면 내가 겪은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으리란 확신이 생겼다.

황태자가 내게 지껄인 말에 화가 나서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무엇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억을 찾아서, 내가 진짜 셀레나 에스타리온인지 사기꾼의 딸인지,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확히 하고 싶다.

“기억을 찾으려고 상담을 받아 보려고요.”

“기억? 아하. 음.”

찰나지만 에이든 경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빛은…….

‘왜 두려워하지?’

걱정, 연민… 숱한 단어가 떠돌았지만 가장 선명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가 보이는 반응이 이해가지 않았다.

“수업 진도에 방해가 갈까 봐 염려되신다면-.”

“선생님이라면 잘 해낼 거야.”

“아…….”

“열심히 해 봐. 응원할게.”

“어…….”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은 처지라 더는 응원 받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응원한다는 그 말에 마음이 일렁거렸다.

‘울지 말자.’

눈물을 쏟는 대신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누군가 나를 응원해 주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인 줄 몰랐는데… 내 편이 생긴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고마워요.”

“어, 으응. 그, 그래.”

이번엔 에이든 경이 당황했다.

조금 의아한 찰나 그가 내게서 손을 빼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자. 나는 이만 가 볼게.”

에이든 경은 다급하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는 뒷덜미가 붉게 익어 있었다.

“왜 저러시지…….”

그때, 에이든 경이 두고 간 책이 보였다.

그가 숨기려고 했던 낙서가 떠올라서 책을 펼쳐보았다.

아까 잉크를 엎지른게 책깔피 노릇을 해서 금방 페이지를 찾을 수 있었다.

지저분해진 책 귀퉁이에 작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을 그린 것 같은데 잉크가 번져서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적힌 이름만큼은 깨끗하게 보존되었다.

[셀레나]

작은 낙서에 나도 모르고 웃음이 터졌다.

나는 기분 좋게 에이든 경의 책을 덮었다.

* * *

“미치겠네.”

얼굴이 벌게진 에이든은 손부채질로 뺨을 식혔다.

그러다가 그는 셀레나가 매만진 손등을 조심스레 문질러 보았다.

손등에 닿던 매끄러운 감촉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눈을 감으면 환한 미소가 눈꺼풀 아래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늘 간신히 버티는 듯한 얼굴만 보다가 웃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편이 찌르르 찌르르 울렸다.

곱게 접히던 눈매며 가지런하던 이, 사랑스럽던 미소까지… 열감이 더 심해지다 못해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웃어선…….’

그렇다고 셀레나가 웃는 게 싫단 건 아니다.

그 화사한 미소가 익숙하지 않아서 낯을 붉히는 스스로가 싫을 뿐이다.

그때, 근처에 하인 잭슨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잭슨.”

잭슨이 이쪽을 돌아보자 에이든이 물었다.

“내 제안, 잘 좀 생각해 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일개 하인에 불과합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하인이었지.”

“저 말고 대단한 사람은 많습니다만.”

“내가 필요한 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가 시니컬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돈을 달라 하면 돈을 줄 테고 대접을 바라면 대접해 줄 거야. 그냥 기본만 가르쳐 줘. 딱 기본만. 그거면 돼.”

누가 알았을까. 불성실한 하인이라 생각했던 잭슨이 은퇴한 기사였단 걸.

건방진 피터슨 자식이 아니었다면 까맣게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 * *

황태자가 방문했던 전날, 밤잠이 오지 않았던 에이든은 밤 산책을 했었다.

그때 어느 나무 아래에서 이야기하던 피터슨과 잭슨을 발견했다.

“이렇게 하인으로 지낼 줄은 몰랐는데.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아?”

“직업이 무슨 상관이랍니까. 저 하나 먹고 살길만 찾으면 그만이죠.”

“다른 곳도 아니고 노예 놈 아래에서 일하니까 그러지.”

“노예가 아니라 칼립소 공작입니다. 전쟁 영웅을 노예라 칭하지 마십쇼. 전쟁이 그리도 우스워 보이십니까?”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아무튼, 네가 나간 뒤에 들어온 군사 훈련가들은 죄 엉터리였던 거 알고 있나?”

“그랬습니까?”

잭슨이 시큰둥하게 되묻자 피터슨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그렇다니. 네가 황실 창고에서 도둑질을 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거야!”

“용건이 뭡니까?”

잭슨의 물음에 피터슨이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큼. 흠. 그, 다름이 아니라 외부 계약을 했으면 해.”

“예?”

“병사들의 훈련을 위해서 육 개월이나 일 년 단기 계약으로 외부 강사가 되어 달란 말이야. 이렇게 하인으로 지내는 것보단 그게 훨씬 낫지 않아?”

“대체 저를 뭘로 보는 겁니까? 그렇게 쫓아낼 땐 언제고 이제 와 필요하니 하! 단기 계약 외부 강사요?”

“그럼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 폐하가 드실 진통 포션을 훔친 군인에게 명예까지 챙겨 줘야 한단 거야? 황태자 전하께서 그걸 용납할 것 같아?”

“이보쇼, 피터슨 달튼!”

잭슨이 소리를 내지르자 피터슨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며 손짓을 했다. 하지만 잭슨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황태자 전하의 시종이고 제법 힘 있는 귀족인 것도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함부로 굴어도 되는 건 아니요! 내 비록 평민 출신이지만 능력만으로 황실 군사 훈련 전문가라는 자리까지 올라갔고, 군대에서 복무한 기간만 20년이오!”

“너, 너…….”

“외부 계약? 하! 어이가 없어서! 어느 나라에서 군사전문가를 그따위로 고용하는지! 한 번만 더 나를 우습게 봤다간 이 손으로 그 빳빳한 목을 꺾어줄 줄 아쇼!”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쏘아붙인 잭슨은 피터슨의 가슴팍을 툭 밀고는 자리를 떠났다.

에이든은 그들에게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어둠 속에 숨어든 채 눈을 빛냈다.

그러다 황태자가 시찰을 끝내고 돌아가자마자 잭슨에게 제안한 것이다.

제 검술 스승이 되어 주면 무엇이든 해 주겠노라고. 그러자 그가 물었었다.

“전쟁터에서 자연스레 익힌 실력이 있을 텐데 제게 배워서 뭐 한답니까. 아니, 애초에 왜 배우려는 겁니까?”

“내 가정교사인 셀레나 선생님은 말야. 공부가 재밌대.”

“예?”

셀레나를 떠올리자 에이든의 사나운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귀족 사회에서도 아는 건 힘인 모양이더라고. 내가 선생님만큼 똑똑해지려면 십 년도 더 걸릴 텐데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책만 읽고 있을 수는 없어. 열심히 한다고 해도 선생님처럼 될 거 같지도 않고.”

“…….”

“생존에 급급해서 무작정 휘두른 거라 내 검은 문제가 많아. 교정받을 건 교정받고 실력을 더 키울 수 있는 부분은 발전시켜나가고 싶어.”

“그건 다른 전문가에게 맡겨도 됩니다.”

“잭슨, 너도 하인으로 지내는 것보다야 천둥벌거숭이 같은 노예 놈을 세공하는 일을 하는 게 더 좋잖아? 난 네 능력이 필요해.”

조금 더 설득시켜 볼까 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그만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구구절절 설명하며 매달리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럼 사흘 안에 답을 주는 걸로 알지.”

에이든은 잭슨에게 선택을 맡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잭슨만 심란하게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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