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에이든과 황태자는 함께 전쟁터를 전전한 덕분에 서로에 대해 잘 알았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우호적이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황태자의 속이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이든은 황태자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차갑고 이성적인 성격이 우두머리로는 몰라도 좋은 사람은 못 되어서다.
“참. 어제 근처에서 셀레나를 보았다.”
“셀레나 에스타리온을요?”
“그래. 근처에 지내는 듯하니 범위를 좁혀가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이단심문소에서 나온 셀레나가 사라지자, 황태자는 에이든에게 조용히 그녀를 찾을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에이든은 셀레나의 행방을 추적할 수가 없다며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셀레나가 전약혼자였던 황태자와 인연이 이어지는 게 싫어서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녀를 찾아 무얼 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그것까지 말할 이유는 없을 텐데.”
“개인적인 호기심이었습니다. 전하께서 관심을 가지는 여자 아닙니까.”
“그렇다니 나도 호기심이 생기는군.”
황태자는 안부를 묻듯 툭 질문을 던졌다.
“셀레나의 행방을 알면서 숨긴 이유가 뭐지?”
에이든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황태자가 불편한 기색을 했지만 에이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여유롭게 시선을 받아내며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했다.
“그녀와 마주친 뒤 피터슨을 지켜서 조사하도록 했지. 셀레나가 네 집에 머물고 있었다더군.”
“이것 참. 다 들켰군요.”
에이든은 황태자를 속인 것에 두려워하긴커녕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노예 시절부터 그랬다. 두려워하는 게 없으니 제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주눅 드는 법도 없었다.
가진 거라곤 몸뚱아리 하나밖에 없는 노예이면서 세상을 호령한 듯 당당했다.
그래서인지 저 건방진 눈. 저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지 멀쩡한 건강한 남자가 예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전쟁터에 있을 때부터 얼굴도 모르는 셀레나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 왔지.”
“전하의 약혼녀시라 호기심을 가지긴 했죠. 그럼 전하야말로 왜 그녀의 행방을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설마 아직도 그녀가 전하의 약혼녀인 줄 아십니까?”
황태자의 얼굴이 차갑게 말라붙어갔다. 그건 에이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셀레나에게 보여 주던 호탕한 면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정제되지 않은 야생 그대로의 거친 분위기가 엿보였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녀가 네 집에 있다니 잘됐군. 그녀를-.”
에이든이 황태자의 말을 끊고 제 할 말을 했다.
“셀레나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입니다. 어디에서 머무르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죠. 황명이 아닌 이상 그에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셀레나에게 왜 접근한 거냐?”
“다 큰 사내놈이 여자에게 접근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황태자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피터슨이 나타났다.
“전하. 식사 때입니다. 식당으로 가시지요.”
“먼저 가 있어라. 곧 따라가지.”
“예.”
피터슨이 사라지고 나자 미묘한 침묵과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전쟁터에서 전하께선 단 한 번도 제게 글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제가 글을 읽지 못해 무시당하고 곤란한 상황을 맞이해도요.”
“그랬던가?”
“예. 심지어 제게 이름을 쓸 줄 아냐고 물어본 적도 없으십니다.”
“그랬군.”
황태자의 말투는 그런 것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권태롭기 그지없었다.
그 차갑고도 오만한 태도에 에이든은 진절머리를 친 적이 많았다.
귀족 나으리들이 거만한 걸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황태자는 그 정도가 심했다.
“미리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군.”
전혀 미안한 말투가 아니었지만 에이든은 빙그레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괜찮습니다. 글을 몰라 도움이 필요하던 때는 지났으니까요.”
두 사람은 일어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에이든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 준 뒤 식당 문을 열었을 때, 황태자가 말을 꺼냈다.
“헌데 에이든.”
“예. 전하.”
“자네는 단 한 번도 내게 부탁이란 걸 한 적이 없네.”
처음부터 나를 안 믿지 않았냐는 뜻이었다.
물론 에이든은 자신이 황태자를 믿지 않는다는 걸, 황태자 스스로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럼에도 에이든은 가소롭도록 놀란 표정을 꾸며 내며 능글맞게 대꾸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전하께 그러겠습니까.”
이네트, 아니, 셀레나의 약혼자에게요. 자존심이 있지.
가장 중요한 말은 속으로 삼켜 낸 에이든은 그렇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 * *
황태자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에이든을 비롯해 피터슨까지 모두 개인 시간을 갖게 되었다.
시온은 그 시간을 활용해 프레드와 옛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맞아. 그랬었지.”
“도련님께서 이렇게 멋지게 장성한 걸 보니 제 기분이 다 좋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 프레드, 당신도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참, 아가씨께선 잘 지내십니까? 도련님께 자주 아가씨 자랑을 들었던 터라 무탈히 자라셨는지 궁금했답니다.”
프레드의 질문에 시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도에 돈 소문을 못 들은 모양이군. 그 애는 파문됐네.”
“그랬군요.”
프레드는 노련한 집사답게 놀란 속을 숨겼다. 굳이 이유를 캐묻지도 않았다.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
“도련님께서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그분을 무척 아끼지 않으셨습니까.”
프레드는 제 누이 자랑이라면 밤이라도 샐 기세였던 소년을 똑똑히 기억했다.
몸이 약하고 내성적이라 에스타리온 백작가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어서 얼굴은 모르지만, 눈을 반짝이던 시온을 보고 있자면 아주 사랑스러운 아가씨일 거라 생각했었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인걸.”
찰나 시온의 얼굴이 심란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빠르게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는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칼립소 공작의 아래에서 일하기로 한 건 많이 의외야. 다시는 집사 일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도울 부분이 많아서 힘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뿌듯한 부분도 많습니다.”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야.”
“그래서 말인데… 도련님께 한 가지 부탁드릴 점이 있습니다.”
“뭔데? 편히 말해.”
“아시다시피 칼립소 공작님께선 귀족 사회에서 아는 분이 안 계십니다. 공작님을 데리고 아이처럼 가르쳐 달라 하는 건 면목이 없는 일이고, 그저 작은 파티에 한 번만 초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온은 켈리메어 자작이 죽은 뒤 여러 귀족가에서 그를 집사로 데려가려고 했던 이유를 다시금 확인했다.
프레드는 제 주인을 온 마음을 다해 섬기는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섬세한데다 무엇이건 최선을 다하니 정말이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초대라…….”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프레드. 너무 그럴 필요 없어. 뭐 어려운 거라고 부탁씩이나 해. 조만간 있을 내 생일 파티에 초대할 테니 염려하지 마.”
낮에 있었던 일로 에이든과 썩 분위기가 좋진 않았지만 초대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법이다.
초대한다고 해서 칼립소 공작이 꼭 파티에 온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생각한 시온은 한결 편안해진 프레드를 보며 다정히 미소 지었다.
한편, 그 시간. 시에나는 아멜리아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자선 파티가 끝난 뒤 근처에 있는 박람회에 가 보지 않겠냐는 거였다.
[…향료를 파는 상인들도 그곳에 입점한다고 해요.
함께 박람회를 준비하던 셀레나가 그렇게 되면서 자선 파티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잖아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박람회장에 한 번 들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답신 기다릴게요.]
시에나는 마지막으로 편지를 확인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년 이맘때, 자신이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어 있길 바라면서.
* * *
“선생님. 못 본 사이 얼굴이 많이 핼쑥해진 것 같네.”
며칠만에 공작가에 돌아왔더니 에이든 경이 삐딱하게 서선 내 얼굴을 빤히 살폈다.
잡아먹을 듯한 노골적인 시선에 나도 모르게 볼을 쓸었다.
“푹 쉰 거 맞아?”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푹 쉬었어요.”
“정말로?”
“네. 정말로요.”
에이든 경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하아.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못마땅하게 말했다.
“고리대금업자가 와서 난리를 피운 일은 왜 말을 안 해?”
“어…….”
걱정시킬까 봐 비밀로 부치려 했는데 무슨 수로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주 위험했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큰 피해 없이 잘 끝났어요.”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그 자식이 조금만 나쁜 마음을 먹었어도 정말 큰일이 났을 거야.”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지. 놈한테 내 이름을 판 건 잘한 일이었어. 앞으로도 위험한 일이 있으면 날 팔아넘겨서 모면하도록 해.”
정말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염려가 담긴 눈길에 진심이 전해져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선생님. 왜 대답이 없어?”
“그럴게요. 늘 신경 써 줘서 감사해요.”
“고작 이거 가지고 뭘.”
“짐 놓고 올게요. 서재에서 봬요.”
“이야. 칼 같네. 집으로 돌아온 날에도 수업은 절대 멈추지 않아.”
에이든 경이 던진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그가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먼저 서재에 가 있을게. 천천히 와.”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며칠 만에 수업을 해서 그런 걸 테다.
그가 보인 시원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다른 핑계를 대며 방으로 올라갔다.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서재로 가자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에이든 경이 보였다.
낙서를 하는 것 같아서 슬쩍 뒤로 다가가자, 기척을 느낀 에이든 경이 화들짝 놀라 책을 덮었다.
“서, 선생님. 언제 왔어?”
“방금요. 아까 그건 뭔가요?”
“아무것도 아냐!”
답지 않게 눈에 띄게 당황한 에이든 경은 허둥지둥대다 잉크통을 툭 건드렸다.
검은 잉크가 쏟아지자 그가 벌떡 일어나 잉크를 털었다.
자리를 치우려고 내가 손을 뻗자 에이든 경이 급하게 말했다.
“내가 할게! 손 더러워지니 선생님은 저기 가 있어.”
에이든 경은 수건을 가져와 슥슥 책상을 닦고 바닥을 치운 뒤, 손을 씻고 돌아왔다.
“옷에 안 튀었어요?”
“괜찮아. 선생님은?”
“저야 말끔하죠.”
“다행이네.”
에이든 경은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던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도 한숨을 쉰 줄 모르는 눈치였는데, 와중에 책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숨겼다.
무슨 낙서를 한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참.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야. 선생님은 공부가 재밌어?”
“에이든 경은 재미없어요?”
“재밌어야 하는 거야?”
에이든 경이 이해할 수 없단 듯 얼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