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35화 (36/134)

<35>

“아, 오랜만입니다. 대신관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신전근무가 없는 날로 아는데…….”

“마누엘 사제님은 모르시겠군요. 아까 낮에 황태자 전하께서 시찰을 나오셨습니다. 해서 신전에 발걸음 하게 되었지요. 사제님이 담당하는 보육원이 수도 외곽이다 보니 멀어서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가 봅니다. 헌데 대신관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뭘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대신관이 그를 부를 이유가 없었다.

마누엘은 특별할 것 없는 사제였고 사고를 치거나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적도 없었다.

상대 사제도 조금 의아한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분명한 건, 황태자 전하와 만난 이상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실 거란 겁니다. 전하께서 보통 성격이 아니시잖습니까.”

“하아… 그렇긴 하죠.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한 마누엘은 얼른 대신관의 집무실로 갔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대신관이 직접 문을 열어 그를 맞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누엘 사제, 잘 지냈습니까? 얼른 들어갑시다.”

푸근한 미소로 마누엘을 맞은 대신관은 손수 차를 내어와 마누엘에게 대접했다.

“얼굴이 조금 여윈 것 같군요. 보육원 일이 많이 힘듭니까?”

“어린 아이들을 돌볼 수 있어서 고되지만 기쁘게 지내는 중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헌데 어쩐 일로 부르신 건가요?”

“아, 별건 아니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그게 뭔가요?”

마누엘은 어떤 물음이 나올지 몰라 조금 긴장했다.

혹 진통 포션을 몰래 빼돌려서 빈민들에게 쓴 걸 들킨 건 아닐까 가슴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관이 꺼낸 말은 상상도 못했던 말이었다.

“몇 달 전 이단심문소에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아… 예. 그랬지요.”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마른 몸이 떠올랐다. 그 여인의 슬픈 얼굴과 고통에 찬 비명이.

마누엘은 몸이 살짝 떨려 오는 걸 느꼈다.

“그곳에서 흑마법을 감별했다고요.”

“예. 무고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랬군요. 혹 그 여인에게서 다른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예?”

대신관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가령 다른 마법을 쓴 흔적이라든가…….”

대신관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마누엘의 기색을 살폈다.

마누엘은 대신관이 그런 죄수를 신경 쓰는 이유를 찾지 못해서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혹 그 여인이 신전을 고소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흑마법 감별식 이후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잘못된 걸까?

덜컥 두려움이 치밀어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여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고하다는 것 이외엔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헌데 그 여인에 대해선 왜 물으시는 건가요?”

“마누엘, 혹 그 여인이 누군지 압니까?”

“누명을 쓴 죄수 아닙니까?”

“이런. 모르는군요. 그 여인이 바로 셀레나 에스타리온입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파문되었다는.”

“예?”

“황태자 전하의 전 약혼녀였습니다. 전하께서 오늘 그 여인을 입에 담으시더군요.”

대신관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마누엘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삼켰다.

그는 낮에 만난 황태자를 떠올렸다.

평소에도 신전과 거리를 두었는데 오늘은 유독 답지 않게 적대감을 그대로 드러냈었다.

‘제대로 된 조사 없이 흑마법 감별에 들어갔으니 신전의 이단감별에 관한 사법장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지요.’

보통은 흑마법 감별에 들어가기 전 몇 달간, 죄인의 행적을 철저히 조사하고 심문을 시행한다.

하지만 셀레나는 달랐다. 그녀는 그러한 절차의 대부분이 무시된 채 곧장 흑마법 감별을 받았었다.

황태자는 절차가 지켜지지 않은 부분을 문제 삼았고, 이단심문소에 들어간 죄인을 일일이 알지 못하는 대신관은 무언가 문제가 있었음을 직감해 마누엘을 부른 것이다.

‘약혼녀라 한들 파혼하였는데 마음이라도 있었던 건지 뭔지…….’

차가운 황태자가 누군가를 사랑했을 리는 없으니 신전 측을 압박하기 위함일 테다.

“이단은 아니었습니다. 무고한 사람이었는데… 혹 문제가 있습니까?”

“그 여인이 황태자 전하를 입에 담는 일은 없었고?”

“아니요. 없었습니다.”

“이단자 신고는 누가 했던가요?”

“에스타리온 백작으로 압니다. 에스타리온의 보배에 공명했다더군요.”

마누엘은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설마 무고한 친딸을 고발했을 줄이야.

“백작이? 공명한 것으로 그랬다는 건…….”

대신관의 얼굴에 곤란함이 번졌다.

무슨 일이냐고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평사제가 대신관에게 편히 질문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마누엘 사제. 아무튼 먼 길 와 줘서 고맙네. 혹 보육원 운영에 어려움은 없는가?”

“아, 마침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요?”

“알다시피 제가 있는 8구역은 빈민들이 많은 지역입니다. 병자들이 많다 보니 고통에 찬 신음이 숱하게 들리지요. 그건 제 보육원 아이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마누엘은 대신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아이들에게만이라도 진통 포션을 먹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마누엘 사제. 그건 쉽게 허가되기 힘든 어려운 문제임을 잘 알잖습니까.”

“하지만… 아이들 중 수술을 앞둔 아이도 있습니다. 진통 포션 없이 수술을 받았다간 고통으로 쇼크사를 할지도 모릅니다.”

“큼. 흠. 마누엘. 아이들의 치유를 위해 지원금을 높이는 건 가능하지만 진통 포션은 그 수를 조절하고 있어서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함부로…….”

다 똑같이 아프고 병든 사람인데 함부로가 어딨단 말인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마누엘이 다시금 애원했다.

“그렇다고 사제란 이가 마약을 먹여서 수술대에 오르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도수 높은 술이라면 지원해 줄 수 있네만.”

“대신관님! 한 아이의 생명이 달린 일 아닙니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간절한 마누엘의 부탁에도 대신관은 단호했다.

“아이들에게 진통 포션이 쓰인 게 드러난다면, 진통 포션을 비싼 가격에 사가는 황실과 귀족들이 크게 반발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신전은 탄압의 대상이 되겠죠. 요즘처럼 신성력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신전이 이만큼 유지되는 것도 진통 포션 때문임을 알지 않습니까.”

“…가 보겠습니다.”

마누엘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대신관의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대신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누엘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신전에도 규칙이란 게 있었다.

‘그보다 황태자가 무언가를 아는 것 같았는데.’

오늘 그와의 면담이 끝나고 황궁으로 떠나기 직전, 황태자가 대신관에게 말했었다.

‘셀레나가 어떤 운명을 부를지 예측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복수해야 하는 적이 많거든요.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것이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말하는 것인지, 이단심문소를 운영하는 신전인지 확실치는 않다.

집안에서 파문된 여인이 해 봐야 무얼 하겠느냐만은 대신관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보배의 공명을 이유로 든 것은 셀레나 에스타리온이 친딸이 아니라고 생각했단 말이 된다.

‘셀레나 에스타리온이라면 어려서 납치당했던 그 아이인데…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흐르는 건지.’

셀레나 에스타리온의 납치는 수도에서 소문 자자한 일이었다. 다른 아이도 아닌 백작가의 딸에게 일어난 범죄니까.

그때 마누엘만 한 평신관이었던 대신관은 당시의 흉흉하던 분위기를 똑똑히 기억했다.

하지만 아이는 무사히 돌아왔고 소동도 마무리되었다. 그런 아이가 친딸이 아님을 알았다는 건…….

“중간에 내가 전해 듣지 못한 일이 있단 건가?”

대신관은 어느새 식어 버린 차를 입 안에 털어넣었다.

거대한 파도가 몰려올 것만 같았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 * *

프레드가 집사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황태자를 모시게 되어 스트레스를 받는 것과 달리, 에이든은 황태자의 방문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제 출신이나 허름한 차림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부족한 점은 스스럼없이 인정할 줄 알았고, 남들이 뭐라고 하건 한 귀로 듣고 무시하는 성미였다.

그렇기에 제 저택이 멋지건 멋지지 않건 최소한의 깔끔함만 유지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에이든의 옷차림과 말끔해진 저택, 체계가 잡힌 저택의 분위기를 의식한 건 손님들이었다.

“이렇게 빨리 구색을 갖추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의외입니다. 공작.”

피터슨은 에이든이 제대로 된 귀족처럼 지내는 게 못마땅한지 입술을 비틀었다.

당사자인 에이든은 그의 말에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이게 뭐 대단하다고 의외씩이나 붙는지 모르겠군요.”

피터슨의 얼굴이 붉어졌다. 에이든이 황태자를 데리고 응접실로 갔다.

“제 집사 말로는 한 시간 뒤에나 식사가 완성될 거라고 합니다. 어차피 식사 때까지 시간이 남으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그래. 그것도 괜찮지. 에이든. 자네가 이렇게 번듯하게 지내니 보기 좋군.”

황태자의 말에 에이든이 비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건방지다고도 할 수 있는 웃음이었지만 함께 전장을 누벼 그를 잘 아는 황태자는 지금 에이든이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잘 알았다.

황태자 때문에 얼떨결에 공작가까지 동행하게 된 시온이 물었다.

“프레드? 혹시 프레드 클락을 말하는 건가요?”

“예. 제 집사의 이름이 프레드 클락입니다만.”

“그가 공작의 집에 있다고요?”

“아는 사람입니까?”

“켈리메어 자작가에서 일할 때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온, 자네의 대부가 켈리메어 자작이었군.”

“예. 어린 저를 각별히 신경 써 준 이였죠. 켈리메어 자작님이 아끼는 화분을 깨어 크게 벌을 받을 뻔했을 때, 본인 탓이라 거짓말을 해서 저를 도와준 적도 있었죠.”

“다정한 이였군.”

“맞습니다. 대부께서 돌아가신 뒤 사라져서 많이 걱정했었는데 칼립소 공작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니. 이것 참 놀랍군요.”

당장에라도 튀어갈 듯 반가워하는 시온의 모습에 에이든이 제안했다.

“식사 전 잠시 만나보는 건 어떻습니까? 프레드도 기뻐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전하.”

“그래. 잠시 다녀오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드를 만나러 가자 피터슨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허면 저도 잠시 저택 구경을 하고 오겠습니다.”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피터슨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응접실에는 에이든과 황태자, 단둘만 남게 되었다.

“에이든. 감정은 좀 갈무리했는가?”

“…예. 걱정 마십쇼.”

“출신이 다르니 이래저래 많이 힘들 거다. 굳이 저들에게 맞추려 하지 말고 저들이 네게 맞추도록 해라. 그편이 나을 거다.”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바로 그런 걸 권위라고 하더군요.”

에이든이 권위 같은 고급 용어를 알 줄은 몰랐던 터라 황태자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 모습에 에이든이 피식 웃어 보였다.

“요즘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매일 신문과 책을 읽고 있죠. 이제 제 이름도 쓸 줄 압니다.”

“글을 배웠군. 누구에게 배운 거지?”

“유능한 가정교사를 들였죠. 언제까지나 글도 모르는 무식한 놈으로 지낼 수는 없잖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