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황태자의 스케줄은 간단했다.
오전에는 평민들이 이용하는 시장을 살펴본 뒤 신전 측이 운영하는 보육원을 방문한다.
오후엔 대신관과 면담을 나눌 예정이다.
이러한 스케줄을 호위 면목으로 함께하기로 한 이가 바로 에이든 칼립소와 시온 에스타리온이었다.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인사를 한 적 없는 것치고 원만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황태자의 호위라는 공통 목표가 있는데다 업무적인 이야기만 나눴기 때문이다.
“시장의 동선은 간단하지만 오가는 인원이 많은 만큼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 명은 전하를 옆에서 마크하고 다른 한 명은 조금 떨어져서 주위를 살피는 게 좋을 듯하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전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칼립소 공작께선 후방을 담당해 주시지요.”
“아뇨. 그건 제가 하도록 하죠. 만에 하나 일이 발생할 시, 전하와 합이 잘 맞는 건 제 쪽이니까요.”
에이든의 말이 맞았다. 황태자와 그는 전쟁에서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운 전우였다.
반박할 이유를 못 찾은 시온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시온은 에이든을 힐끔 살폈다.
가까이에서 보니 소문보다 더 짐승 같은 남자였다.
키가 큰 시온, 그보다 한 뼘은 더 컸고 몸은 야생동물 같은 근육질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타고난 골격, 사납게 벼뤄진 눈빛까지. 호랑이를 눈앞에서 마주하면 이러할까 싶었다.
“활약상에 대해 자주 들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가벼운 대화라도 할 요량으로 시온이 가볍게 주제를 던졌다.
“그렇습니까. 저 또한 익히 들었습니다.”
“저를요? 아, 그 소식 때문이겠군요. 셀레나의 파문.”
시온이 자조적인 얼굴을 했다. 에이든은 저도 모르는 사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이야기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인데… 조만간 수도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겠죠.”
“…마음이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에이든의 질문에 시온이 의외란 듯 눈썹을 치켜떴다.
대개 셀레나가 왜 파문되었는지만 물었지, 그 가족의 마음을 묻지는 않았다.
“괜찮습니다.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올바른 일을 행한 것이라 믿습니다.”
시온은 에이든의 주먹 쥔 손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걸 보지 못했다.
에이든은 가슴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누이였는데… 그립지는 않습니까?”
“제게 누이는 시에나 한 사람뿐입니다. 그 아이는 더 이상 제 가족이 아니죠.”
시온은 건조한 말투로 선을 그었다. 에이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칼립소 공작.”
“평소처럼 편히 부르십쇼.”
“공무 중이라 그건 어려울 듯하군. 에스타리온 공자. 자네도 오랜만이야.”
“전하를 호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는 생략하고 얼른 가 보도록 하지.”
시장은 여느 때처럼 활기가 넘쳤다. 상인들과 시장에 들른 손님들은 황태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신분을 밝힌 채 공개적인 시찰을 나온 게 아니라 고위 귀족들이나 관련자들에게만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물가가 많이 올랐군. 특히 밀과 콩이 말이야.”
“보아하니 귀족집 자제님 같은데 밀 가격도 아십니까?”
곡물을 파는 상인의 물음에 황태자는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황궁에서 관련된 행정 일을 하고 있거든.”
“황궁이요? 허, 허면 신고도 된답니까?”
“무슨 신고를 하고 싶길래?”
“그게…….”
상인은 주변을 둘러본 뒤 황태자에게 작게 속삭였다.
“마약상들이 판을 치는데 놈들이 세력을 만들어서 시장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내라고 합니다.”
“자릿세를?”
“예. 안 내면 판매 중인 물품을 부수고 협박을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자릿세를 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군. 말해 줘서 고맙네. 이 문제는 황궁에 가는 대로 정식으로 다뤄 보도록 하지.”
“아이고,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으리.”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될 때였다.
“잡아라! 도망 노예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빠르게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놓치면 안 된다! 저놈을 잡아라!”
에이든은 황태자를 가로막고 섰고 시온은 검을 빼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햇빛에 반짝이자 에이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마-.”
에이든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 시온이 검을 휘둘렀다.
뾰족한 검 끝이 도망 노예의 다리를 베었다.
허공에 피가 흩뿌려지며 비명이 퍼져 나갔다.
“아아악!”
“너!”
노예가 다리를 붙잡으며 바닥을 뒹구는 걸 확인하자 에이든은 시온의 멱살을 붙잡았다.
얼굴을 찌푸린 시온이 그의 손을 떨쳐내려 했지만 짐승 같은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칼립소 공작. 지금 뭘 하는 겁니까?”
“검을 쓸 필요는 없잖아!”
“다른 상황이었다면 다르겠지만 지금은 전하의 호위 중이잖습니까.”
“그렇다 한들 저렇게 상처입히는 게 당연한 건 아닐 텐데. 당신 정도면 베지 않아도 가뿐히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왜……!”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노예는 쫓아오던 추격꾼들에게 붙잡혀 개처럼 질질 끌려갔다.
바닥에 노예가 흩뿌린 피가 길게 흔적을 남겼다.
그 모습에 에이든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고작 노예 놈입니다.”
“뭐? …지금 제가 노예 출신이라는 걸 잊으신 겁니까?”
“공작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지 않습니까. 공작이야말로 왜 그런 겁니까? 전하를 호위해야 하는 만큼 검을 빼 들고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쏘아붙이는 시온의 말투는 특권의식 가득한 상류 귀족의 전형이었다.
멱살을 붙잡은 에이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온이 눈감아 주었다면 저 노예는 도망쳐서 자유민이 될 수도 있었다.
노예였기에 도망친 노예의 심정을 잘 알았다.
노예로 사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은지, 도망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공작, 진정하고 예의를 갖추는 게 좋겠군.”
흥분한 에이든을 말린 건 황태자였다.
시온을 노려보다 에이든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멱살을 잡힌 게 치욕스러운지 시온은 벌게진 얼굴로 옷을 털었다. 그가 씩씩거리며 사납게 말했다.
“공작. 정말로 귀족이 되고 싶다면 그 노예 근성부터 끊어내는 게 좋아 보이는군요.”
“노예 근성? 그러는 너는 그 엿 같은 눈이나 집어치우지 그래. 건방진 새끼 같으니라고!”
“하! 이게 바로 공작의 진짜 모습이었군요. 전쟁 영웅이라기에 대단한 줄 알았는데 본질은 비천한 노예였다니, 정말로-.”
“여기까지.”
낮게 깔린 황태자의 음성에 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와 전쟁터를 누벼 시온처럼 황태자를 어려워하지 않는 에이든은 달랐다.
“너나 나나 대가리가 날아가면 붉은 피가 흐르는 건 똑같은 주제에 배때지가 쳐 불렀군.”
에이든은 시온을 죽일 듯 노려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에이든이 사라지고 나자 뒤늦게 정신이 든 시온이 아차 싶어 사과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우선 우리끼리 보육원으로 가도록 하지.”
“칼립소 공작은요?”
“분이 풀릴 시간이 필요할 테지.”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한 황태자가 걸음을 옮기자, 구둣발에 바닥에 번진 피가 닿았다. 인상을 찌푸린 황태자가 말했다.
“시온. 잘 봐라. 붉은 피다.”
“예?”
황태자는 당황한 시온의 반응을 무시한 채 앞서 출발했다.
* * *
“젠장!”
황태자가 시온과 함께 보육원으로 출발한 시간, 에이든은 시장 골목길에서 발로 벽을 때렸다.
저런 자식이 그의 선생님인 셀레나의 오라비였다. 더럽게 재수 없는 놈이 말이다.
‘그런 놈이니 제 가족을 버리고도 아무렇지 않은 거겠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노예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부터 누이를 버려 놓고 부끄러움 한 점 보이지 않는 것까지.
“후우. 후우우.”
에이든은 심호흡을 하며 격양된 감정을 가라앉혀 나갔다. 흥분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근무 중 이렇게 뛰쳐나온 것도 어지간히 한심한 짓거리라 어서 진정한 뒤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온이 말했던 ‘노예 근성’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아 감정이 요동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재수 없는 자식!”
태어나 보니 노예였다. 죄를 지은 적도 없는데 그는 노예로 태어나 죽도록 얻어맞으며 일해야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선행을 베푼 적도 없는데 귀족으로 태어나 떵떵거리며 누리고 살았다.
시작부터 불공평한 인생이었다.
그런데도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건만 노예 근성이라니.
그의 과거가 고작 그따위 단어 하나로 정리되는 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딴 놈들과 어울리기 위해 예법이니 하는 것들을 배우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참아야 해. 내겐 힘이 필요한걸.’
그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그게 돈이라면 돈이고 권력이라면 권력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든 참고 감수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이네트’를 위함이니까.
“빌어먹을.”
에이든이 고통스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노예 생활에서 탈출만 하면 모든 게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귀족이 되고 그녀와 재회하는 건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귀족 놈들은 복잡한 규칙이 많았고 그보다 더 복잡미묘한 권력다툼을 벌였다.
에이든은 주먹을 꽉 쥐곤 벽에 이마를 툭 부딪쳤다.
그들 사이에 껴 어울리는 건 꿈꾸지 않는다. 바라는 바도 아니다. 태생부터가 다른 족속들이니까.
하지만 그녀를 보호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이런 것쯤은 언제든 참을 수 있다.
긴긴 노예 생활도 버텼는데 이따위 분노는 충분히 삼켜 낼 수 있었다.
그래. 이네트를 위해서라면…….
* * *
마누엘은 보육원 운영을 맡은 사제였다. 하지만 그의 의무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보육원 운영이란 민생구제의무 이외에도 교구에서 부름을 받으면 종종 흑마법 감별을 하러 가기도 했다.
흑마법 감별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 끔찍한 고통을 동원하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이단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경우를 보았다.
‘이름이 셀레나라고 했던가…….’
그 여인을 떠올리면 가슴이 복잡해졌다.
그녀가 내뱉던 헐떡이는 숨과 끔찍한 비명소리. 그리고 다 죽어 버린 눈은 그가 사제직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못 잊을 것이다.
‘부디 그 여인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마누엘은 무고하게 험한 일을 겪어야 했던 그녀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런 뒤에는 오늘 약속된 대신관과의 면담 때 필요한 이야기를 모두 꺼낼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기도를 끝마치고 나자 시간이 다 되어 마누엘은 곧장 대신관실로 향했다.
“마누엘. 어쩐 일입니까?”
복도를 지나치던 때에 알고 지내던 사제 하나가 마누엘에게 말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