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33화 (34/134)

<33>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지나온 삶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가족은 나를 버렸고 친구는 웃는 얼굴로 곁을 지킨 적이었다.

친절을 베푼 만큼 돈독하다 여겼던 고용인들은 내쫓기는 내 모습을 보고 즐겼다.

오히려 접점이라곤 없던 노예 출신 귀족인 에이든 경이 나를 도와주었다.

믿음은 배신당하고 예상치 못한 데서 새로운 기회가 생기다, 삶이란 참 웃긴 녀석이었다.

“유익한 시간이라…….”

황태자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나를 응시하였다. 그늘이 져서 그의 푸른 눈이 더 짙어졌다.

늘 이 남자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어딘가 의문스런 구석이 있었고 속내를 쉬이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한때는 그런 점이 신비하게 여겨졌는데 지금은 뱀처럼 간악하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무얼 할 생각이지?”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하자 그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당신을 버린 가족들에게 복수할 텐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도 괜찮겠군.”

“…그게 왜 궁금하시죠? 또다시 저를 조롱하고 싶으신가요?”

“그대를 걱정해서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군.”

“걱정이요? 걱정? 하!”

이번에야말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태연히도 거짓말을 하다니.

“이번에도 저를 조롱하시는군요. 변함없이 잔인하시네요. 더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리는 찰나였다. 그가 내 등에 대고 말을 꺼냈다.

“악몽… 아직도 꾸나?”

“…….”

“꾸는 모양이군.”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난 항상 그대가 싫었어.”

몸을 살짝 돌리자 황태자가 나를 보며 다시금 말했다.

“아주 진력이 났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질 것처럼 약해빠졌거든.”

“…….”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나쁘지 않아. 눈빛이 많이 좋아졌어.”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그리 떨어져 있지 않아 고작 한 걸음으로도 간격이 부쩍 좁아졌다.

그 덕분에 특유의 고고한 눈빛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복수를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어.”

“그만하세요.”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다고 하면… 뭐, 도와줄 수는 없어도 응원 정도는 해 주지.”

“그만하시라고 했어요.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제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 권리는 없으세요.”

황태자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지금과 같은 눈을 그때도 했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겠지. 그대가 이렇게 된 건 모두 그대 탓이야.”

그의 뺨을 치지 않으려 주먹을 꽉 쥐자 손가락 관절에서 빠득하고 소리가 났다.

“일이 이렇게 되고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저 자신에게 실망했단 거였죠.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지독하게 없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거든요.”

황태자의 한쪽 눈썹이 미미하게 치켜올라갔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 가족이 그렇게 잔인한지 몰랐죠. 친구라는 이가 그토록 한심한 줄도 몰랐고… 사랑했던 남자가 저열한 사람일 거라곤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어요. 오롯이 혼자가 되고 나서야 그들의 본질이 보이더군요.”

“…….”

“그들을 사랑했던 스스로가 실망스러웠죠.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이들이었는데.”

“…….”

황태자의 시선이 흔들리더니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전하의 도움 없이도 복수할 수 있어요. 제 기억을 되찾는 데에 응원 따윈 필요 없고요. 그러니 알량한 자비라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나 베푸세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낡고 허름한 여관이었지만, 내 처지를 인정하고 나니 부끄럽지 않았다.

생기가 빠진 내 모습도, 걸치고 있는 싸구려 옷도 다 괜찮았다.

이곳 바닥에서 시작해 저 위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테니 모든 건 시간 싸움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아는 거지?

‘황태자에게 악몽을 꾸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달칵.

뒤늦은 의문이 드는 것과 동시에 여관 문이 닫혔다.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게 뭔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단 거다.

“윽.”

순간적으로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파 왔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몸에 힘이 풀렸다. 그러자 다리가 휘청거리며 벽에 어깨가 부딪쳤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꽉 쥐었다.

대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두통은 정체가 뭘까.

병도 아닌데 질병처럼 나를 괴롭히는 이것의 시작이 궁금했다.

마음과 달리 더 파고들어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두통이 물러났지만 숨을 고르는 게 고작이었다.

‘꺄아아아아악!’

몇 번이고 들어봤던 소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이의 비명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야가 암전되고 의식이 멀어지는 순간, 이제껏 듣지 못했던 한 마디를 듣게 되었다.

‘작은아버지!’

그 목소리를 끝으로 내 의식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Chapter 4. 붉은 피

셀레나와 헤어진 황태자는 시종인 피터슨과 합류해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다.

피터슨은 황태자가 딱딱한 빵과 오래된 우유를 먹게 된 점에 안절부절못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황태자는 불만 없이 그것을 먹어 치웠다.

“아 참. 근처에서 칼립소 공작을 보았습니다.”

“공작을?”

“예. 개인적인 일로 잠시 나왔다지만 거짓말이겠지요. 전하께서 시찰 전이시라 염려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꼼꼼한 성격이니 일리 있군.”

“공작위에 올랐다고 자신이 진짜 귀족이라도 된 듯 굴더군요. 아주 건방진 놈입니다.”

황태자는 피터슨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동조해서가 아니다.

만류할 생각이 들지도 않을 만큼 제 시종의 천박함에 학을 떼었기 때문이다.

“노예 놈이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봤자죠. 천박한 언행과 더러운 피는 어디 가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피터슨은 황태자가 침묵을 지키자 그가 제 말에 동조한다고 생각해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아직도 그놈에게 남작도 아니고 공작씩이나 되는 자리를 준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보통 신분 상승에 성공한 이들은 남작의 자리에 봉해지니까요.”

길게 이어지는 피터슨의 불만에 황태자는 한숨을 삼켰다.

피터슨의 저열함을 싫어하는데도 쭉 시종으로 쓰는 이유는 단 하나, 제 분수를 알아서다.

어떤 말을 지껄이건 일단 그가 명령한 일은 칼같이 해내었고, 비밀로 하여야 하는 사항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뱉지 않았다.

살얼음판 같은 중앙 귀족 사회에서 입이 무겁고 기본적인 일을 해내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넘기기가 힘들었다.

‘셀레나, 그 여자를 만나고 나면 늘 이렇지.’

신발 속 모래알처럼, 입 안에 난 작은 입바늘처럼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실상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더라도, 황태자는 셀레나가 불편했다.

“참. 시온 에스타리온이 오늘 저녁부터 전하를 호위하기로 하였습니다.”

“시온이?”

“예. 집안일로 한창 시끌시끌해서 당분간 맡은 일 외엔 신경 쓰지 않을 듯했는데 의외입니다.”

황태자는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장남, 시온을 떠올렸다.

금발과 녹안만 보면 그는 셀레나와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대체 그 누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집안에서 쫓겨났는지 모르겠습니다.”

피터슨이 황태자를 힐끔힐끔 살피며 말을 꺼냈다.

셀레나가 황태자의 전 약혼녀였던 터라 그에 대해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을지 기대한 것이다.

사실 사교계에서 가장 귀족다운 귀족이라 추앙받던 이가 셀레나였다.

피터슨도 몇 번이고 그녀를 본 적이 있다.

탄성이 나오도록 우아했고 잘 교육 받은 사람 특유의 겸손하고도 예의 바른 모습은, 이상적인 귀족 그 자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리하게 반짝이는 눈과 지성미 넘치는 분위기, 차분한 말투와 선한 성격까지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완벽한 여인이기에 피터슨은 셀레나 에스타리온이야말로 완벽한 황후감이라 생각했다.

그런 여인이 집안에서 파문당한 것이면 어지간한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했다.

“피터슨. 괜한 것에 관심 갖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셀레나가 이단심문소에 끌려간 건 아직은 소수의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황태자는 그 일을 발설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흑마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판명 났다.

“참. 백작가에서 숨겨 둔 둘째 딸 말입니다. 이름이 시에나인가 하던. 황제 폐하께선 전하를 그분과 약혼시키려 하시던데 정말 하실 겁니까?”

피터슨이 호기심에 찬 눈을 끔뻑였다. 황태자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이 천박한 시종은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았다.

엄밀히 따져 황실 인사의 약혼이 달린 일이니 중요한 정보겠지만, 황태자에겐 그조차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제 결혼조차 권력을 위한 전략으로 써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내가 대답했다.

“그 여자는 내 계획에 없던 옥의 티지.”

“예? 그게 무슨…….”

“아니, 이 모든 게 내가 계획한 적이 없던 상황이야.”

황태자는 한숨인지 신랄한 짜증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제야 피터슨은 현재 황태자가 아주 많이 예민하단 걸 인지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동네를 둘러본 게 전부일 텐데 무슨 일이 있진 않았을 테다.

곰곰이 생각하던 피터슨은 내일 황태자가 대신관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황실과 신전 측은 오래도록 알력 다툼을 해 왔다.

신성력이 약해진 요즘 같은 시대에 황실이 귀족들과 결탁하여 신전을 부숴버리면 간단할 테지만, 신전 측에는 진통 포션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제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늙고 병들기 마련이라, 황실과 귀족들은 필연적으로 이 진통 포션을 쓰게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누구하나 함부로 힘을 휘두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전하께선 황좌를 물려받기 전 마지막으로 입지를 굳히는 상황이시니, 이번 시찰이 중요하긴 하지.’

그렇다 한들 결혼 상대에 대한 질문이 이렇게 이어져서, 기분을 저해하는 상황까지 온 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백작가에서 남몰래 여식을 키우긴 했지만 크루커스를 가진 집안이니 나쁘지 않은 결혼이 될 듯한데 아닙니까?”

“백작가에서 천지 분간을 못하고 셀레나를 내쳤으니 문제지.”

그 말을 끝으로 황태자는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피터슨은 인상을 찡그린 채 생각했다.

그래서 시에나 에스타리온과 결혼을 하겠단 거야, 말겠단 거야.

그는 대답 같지 않은 대답에 한숨이 밀려오는 걸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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