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문 열어! 에바 베이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현관문이 덜컹거렸다. 문에 달린 안전장치가 툭 떨어지더니 입구가 활짝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게 보였다.
에바는 얼른 현관으로 달려갔고 나는 혹시 몰라 포크와 나이프를 꽉 쥐었다.
“이렇게 문이 약해서야. 쯧. 어라? 손님도 있었네?”
“나가요. 나가서 얘기해요.”
에바가 남자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려 했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에바의 뒤에 있던 나를 확인했다.
“셀레나 씨. 어서 들어가요.”
“이름이 셀레나야? 예쁜 이름이네.”
“돈은 드릴게요. 오늘은 이자에 원금도 조금은 갚을 수 있어요.”
“오호. 오늘도 이자를 못 갚으면 노예로 팔아버릴 예정이었는데 역시 운이 좋다니까.”
“시끄럽고, 우선 나가서 이야기하자니까요!”
남자는 하얗게 질린 에바를 무시한 채 내게 윙크를 해 보였다.
“이봐, 셀레나. 그쪽도 돈이 필요하면 날 찾아와.”
“와트!”
에바가 품에서 돈을 꺼내 와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제야 와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다.
와트는 돈을 셌고 에바는 벌게진 얼굴로 부서진 문을 바라보았다.
에바의 자존심을 위해 안으로 들어가는 게 맞는데 그녀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돈이 부족해. 이래서야 언제 원금까지 다 갚겠어.”
“돈이 부족하다뇨! 이걸로 이자는 끝 아니에요?”
“지난번에 갚은 그 돈은 이자의 이자를 갚는 데 쓰였는걸.”
“뭐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만 떽떽거려. 그간 밀린 이자가 얼만데. 약관에도 다아 명시되어 있어. 이자가 밀리면 이자율이 높아진다고.”
“그건… 사기 치지 마요!”
“사기라니. 계약서에 사인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야. 다음 주까지 30크론을 마련해 두지 않으면 유감스럽지만 널 노예로 파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저질스러운 사람에게 시달리고 있었다니…….
“위법이에요. 경제법 제32조 1항에 의하면, 이자 상환이 늦춰지더라도 변제할 이자금이 쌓일 뿐, 이자의 채무불이행으로 인해 다른 불이익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혀 있어요.”
“뭐, 뭐어? 아가씨가 뭘 안다고 떠드는 거야!”
와트가 거대한 몸을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그가 손을 올리자 에바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때리지 마요! 당신이 때릴 만한 사람 아냐!”
질끈 감은 눈을 뜨자 덜덜 떠는 에바의 뒷모습이 보였다.
에바의 몸에 난 상처는 저 남자가 만든 거란 직감이 들었다.
“에바 베이커! 꼴에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대가리 좀 굴러가는 애를 데려온 모양인데 그래 봐야 넌 노예 신세야! 알아?”
고리대금업자의 성난 기세에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에바의 소매를 붙잡아 그녀를 내 뒤로 끌어당겼다.
나는 어깨를 펴고 와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떨지 말자.’
이단심문소에서 고생한 것에 비하면 이딴 고리대금업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을 그리하자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돌아가신 다미안 2세께선 채무불이행에 의한 노예화는 사회경제적 혼란을 야기하므로 엄격히 금하겠다고 하셨어요. 이는 제국법 제13조 5항에 명시되어 있죠. 지금 당신이 한 협박은 불법적인 위협을 행하겠다는 예고라고 볼 수 있어요. 즉.”
내 목소리가 이렇게 차가워질 수 있는지 몰랐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에바는 노예가 될 테다.
내가 억울하게 이단심문소에 끌려가서 마녀 취급을 받았듯이.
“내가 당신을 고발하고 목격한 일을 증언하면 당신은 특별법 위반에 해당돼요. 알다시피 노예화는 아주 철저하게 감시하는 부분 중 하나라서요. 그러니 아마도… 알바 감옥에 갇히게 되겠죠. 알바 감옥이 어딘지는 알죠?”
“거, 거긴…….”
“네. 맞아요. 죽어야만 나올 수 있다는 지상 최악의 감옥이죠.”
사람을 노예로 만들 생각까지 했으면서 알바 감옥에 갇히는 것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보아하니 불법을 저지른 게 한둘이 아닌 듯한데, 당장 당신을 고발할 수도 있어요. 아, 날 어떻게 해서 입막음하겠단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이래 봬도 따로 날 찾아올 사람이 있어서요.”
“세, 셀레나 씨의 말이 맞아요. 이분은 칼립소 공작님의 가정교사세요! 그분께서 며칠 뒤 직접 셀레나 씨를 맞으러 올 예정이에요!”
칼립소 공작이란 이름에 와트의 낯빛이 달라졌다. 에이든 경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원치 않았는데…….
“에바의 몸이 난 상처도 당신이 낸 거라면 폭행죄에 문을 부수고 들어왔으니 특수협박죄도 추가되겠군요.”
“그, 그건…….”
“이쪽의 요구 몇 가지만 들어주면 없던 일도 해 줄 수도 있어요.”
내 말에 와트가 재빨리 물었다. 그의 안색을 보아 여간 다급한 게 아니었다.
“그 요구가 뭐지?”
“이자는 없던 걸로 해 줘요. 물론 원금은 상환할 거예요.”
와트는 생각에 빠졌고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긴장을 이기지 못한 에바가 뒤에서 내 손목을 붙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들겨 괜찮다고 신호를 주었다. 곧 와트가 대꾸했다.
“설마 잘난 양반이 없던 일로 꾸미고 뒤에서 신고하진 않겠지?”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해요.”
“좋아. 거래 성립이다. 에바 베이커, 넌 운 좋은 줄 알아라. 이런 똑똑한 사람이 네 옆에 다 있고.”
와트는 내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에바가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했다.
“셀레나 씨!”
“괜찮아요. 너무 긴장해서…….”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문이 부서져서 오늘은 밖에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짐 챙겨서 여관에라도 가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얼마 전에 돈을 보내서 이번 주는 방문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에바가 작게 코를 훌쩍였다.
나는 그간 고생했단 의미로 그녀를 살짝 토닥여 주었다.
“혼자서 정말 고생했어요…….”
진작 에바에게 관심을 둘걸. 이렇게 쉽게 도와줄 수 있었는데 그녀의 어려움을 외면했다.
제아무리 복수에 눈이 멀었더라도 눈앞의 어려운 사람을 모른 척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건 정말 복수만을 원하는 악인이 되겠단 것과 같았다.
‘이제라도 내가 정신 차려서 다행이야.’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내가 받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다.
그렇다고 복수만 보고 내달릴 거란 건 아니다.
달라진 인생을 가꾸어나가고 내 삶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복수가 있어야만 한다.
복수가 내 모든 것이 되면 부나방이 되어 불 속에 나 자신을 내던지는 것과 같다.
에스타리온 백작가가 내게 선사한 고통을 되돌려주는 건, 상처받은 스스로를 치유해가는 과정에 동반되는 이벤트가 될 테다.
‘당신들이 나를 버렸다고 해서 나까지 스스로를 버릴 수는 없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득 만들고, 에스타리온 백작가가 준 얄팍한 사랑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많은 사랑을 줄 거다.
악착같이 행복해질 테다. 에스타리온이 아니어도 셀레나라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빛나는 사람임을 증명해 보일 거다.
당신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 * *
에바와 나는 짐을 챙겨 근처의 여관으로 갔다.
문이 부서진 집에서 여자 둘이 지내기엔 무리라는 판단이 들어서다.
“셀레나 씨가 돌아가는 날, 저도 집을 정리해서 칼립소 공작가로 들어가려고요. 하녀들에게 따로 방을 내어주잖아요.”
“그것도 괜찮죠. 와트라는 고리대금업자, 그 사람이 또 찾아오거든 내게 말해요. 고소 고발이란 거 그리 어렵지 않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매달 월급을 받아서 꾸준히 납부하면 원금은 금방 갚을 거예요. 너무 염려 않으셔도 돼요.”
“어쩌다 그런 빚을 지게 됐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
“불편하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보 길드에 찾아가느라 그랬어요.”
“정보 길드요?”
에바가 여관으로 가는 길을 앞장서며 설명해 주었다.
“제가 고아라 시설에서 자랐거든요. 부모님을 너무 찾고 싶어서 정보 길드에 의뢰했는데… 부모님은 못 찾고 돈은 돈대로 들었네요.”
“미안해요. 대답하기 어려웠을 텐데.”
“아뇨. 정보 길드가 제 부모님을 찾아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어린 마음에 찾아갔던 게 부끄러워서요. 그뿐이에요.”
어색하게 미소 짓는 에바를 보자 마음이 안 좋았다.
그녀에게 위로를 건네려고 입을 떼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셀레나?”
목소리의 주인공을 파악하기도 전, 잘 훈련된 개처럼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걸음이 멈추어졌다.
너무도 익숙한 음성이었다. 공기 중에 잘 아는 이의 체취가 흐릿하게나마 느껴졌다.
이런 내가 바보처럼 여겨져 화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 필립소였으니까.
‘당신이 여긴 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무언가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 가득 부풀어 올랐다.
‘아직은… 아직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태자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 당신이 맞군. 아,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 보는 눈이 많아서 말야.”
평민들이나 입을 차림을 한 걸 보아 시찰 전에 잠행을 나온 듯했다.
분명 허름한 차림인데 그는 여전히 좋아 보였다.
다름없이 아름다웠고 우아한 자세나 거만한 눈빛도 그대로였다. 화가 날 만큼 말이다.
“잠행을 나오신 모양이군요.”
“그대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근처에 터를 잡은 건가?”
“일이 있어서 잠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랬군. 잘 지냈는가?”
황태자의 물음에 입가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헛웃음을 지었거나 입술이 비틀렸을 테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는 내 사정을 안다. 감옥에 있던 날 보란 듯 구경하고 갔으니까.
내가 가족이라 믿었던 자들에게 개처럼 버려진 것도 알면서 잘 지냈냐니.
그에게 사나운 말이 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물어야 했다.
“제 삶을 되돌아보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누가 진짜 제 사람인지도 알아가는 좋은 기회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