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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31화 (32/134)

<31>

시간은 빠르게 흘러, 황태자의 시찰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황태자는 인근을 시찰한 뒤 칼립소 공작 저에서 하루 묵을 예정이었다.

프레드 씨가 칼립소 공작가의 집사가 되겠다며 내 제안을 수락한 덕분에, 내가 황태자의 시찰에 신경을 쏟는 일은 없었다.

프레드 씨가 없었다면 그의 방문을 준비하며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했을 테다.

“무슨 생각을 해?”

신문 기사 요약하기를 시켰었는데 에이든 경은 벌써 숙제를 끝낸 채 깃펜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요.”

“선생님은 거짓말이 서툰 사람이야.”

그의 얼굴에서 흉터가 도드라지며 담백한 미소가 드러났다.

“황태자 때문에 내일 일을 신경 쓰는 거겠지.”

“아니에요.”

며칠 전, 에이든 경이 따로 나를 찾아와 말했었다.

‘선생님은 당분간 다른 곳에서 머리라도 식히며 쉬는 게 좋겠어.’

황태자가 방문하는 동안 잠시 저택을 떠나 있으란 말이었다.

칼립소 공작에게 고용된 직원인지라 순순히 그러기로 했다.

내가 힘을 갖추기 전엔 황태자와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나도 바라는 바였다.

“에이든 경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했어요.”

“나를?”

그는 그 사실이 믿기 어려운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열심히 공부한 만큼 경을 비웃던 사람들을 당황시켜 주면 좋겠어요.”

“고작 글자 좀 알게 된 것 가지고 그들이 당황할까? 오히려 비웃을 것 같은데. 저 멍청한 자식은 제 이름 좀 적을 줄 알게 된 게 저리도 자랑스러울까 하고.”

“어느 누가 경을 무시한 건지는 잘 몰라도 그들이 받아쓰기를 시켜서 점수를 매기는 건 아닐 거 아녜요. 대화를 나눌수록, 행동을 보일수록 그들은 은연중에 알게 될 거예요. 아, 에이든 칼립소가 달라졌다 하고.”

그가 새까만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빛이 담기지 않을 것처럼 검은 빛깔이라,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에이든 경은 기분이 좋다 나쁘다 등 제 감정표현엔 솔직했지만 마음 속 깊은 생각까진 말하지 않았다.

“물론 더 많은 공부가 수반되어야 하겠지만요. 그러기 위해선 업무 이관이란 철자를 제대로 배우셔야겠죠?”

“아…….”

오롯이 나를 담던 눈이 느릿하게 노트에 떨어졌다. 그가 철자를 고치며 무심하게 말했다.

“선생님은 나보다 더 나를 믿는 것 같아.”

“제가요?”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무식한 놈이, 그것도 머리가 다 굳은 지금에야 배워 봐야 얼마나 배우겠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 거야.”

“저는 경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어.”

에이든 경이 고개를 들어 다시금 나를 바라보자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문득 검은 눈의 온도가 궁금해졌다. 너무 새까매서 그 안에 든 것이 열기인지 냉기인지 분간가지 않았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동굴에 들어선 것처럼 서늘하게 울렸고 말투는 따뜻했다.

“백날 배워 봐야 타고난 기품은 절대 흉내 낼 수 없겠다고.”

그에게선 열등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흐릿하게 웃는 미소엔 멋쩍음과 자랑스러운 마음이 엿보였다.

혼란스러워진 건 나였다. 왜 혼란스럽냐고 하면…….

“난 ‘연모하다’는 단어에 존경의 의미도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네?”

“수업이 마치고 선생님을 연모할 때, 항상 그런 생각이 들어.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모르는 게 없는 걸까. 적어도 내게 연모하다는 그런 단어가 된 것 같아.”

“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에이든 경이 밉살맞게 눈을 접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선생님.”

화끈거리는 얼굴을 서늘한 손등으로 식히는 동안 시간을 확인한 에이든 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 수업은 이 정도만 하고 슬슬 이동하자. 시찰은 내일이지만 황태자의 시종들은 하루 일찍 인근을 확인할 테니 마주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네. 그래요.”

나는 얼른 올라가서 짐을 가져왔다. 잠시 저택을 떠나 있을 시간이 왔다.

* * *

내가 머물기로 한 곳은 에바의 집이었다.

에이든 경은 호텔을 잡아주겠다고 했지만 과분한 호의 같아서 에바에게 스카프 값을 받는 대신 며칠 신세를 지기로 합의를 봤다.

에바의 집은 공용 아파트의 3층에 자리했다.

작은 부엌과 방 한 칸이 전부였는데 에이든 경은 생각보다 방이 더 작은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지금이라도 호텔에 가지 않을래?”

“괜찮아요. 에바의 집도 충분히 좋은걸요.”

여자 혼자 호텔이나 여관에 있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에이든 경도 그 사실을 잘 아는 터라 한숨을 삼키더니 부엌에 난 창문과 바깥을 확인했다.

“누가 벽을 타고 들어오진 못하겠네. 그나마 다행이야.”

“고작 사흘인걸요.”

“선생님이 검이라도 쓸 줄 알면 내가 이렇게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아무튼, 에바. 선생님 좀 잘 부탁해.”

“셀레나 씨는 제가 잘 돌볼게요. 염려하시는 일은 없으실 거예요.”

에바의 인사에도 에이든 경은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지 다시금 집을 둘러보다가 나갔다.

에이든 경을 배웅하려고 쫓아 나가자 그가 나를 만류했다.

“선생님은 들어가서 쉬어.”

“아니에요. 마차가 출발하는 것만 보고 갈게요.”

“마차가 있는 길까지 가려면 멀잖아.”

“괜찮아요. 산책을 다녀온다고 생각하면 돼요.”

에바의 아파트 앞은 마차가 올 수 없는 길이라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가 정차되어 있었다.

내가 그를 쫓아가자 에이든 경의 걸음이 느려졌다.

덕분에 걸음이 빠른 그의 옆에서 나란히 갈 수 있었다.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한 듯하면서 묘한 긴장감에 젖은 그런 침묵 말이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에이든 경이 잽싸게 나를 옆에 있던 골목으로 밀어 넣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립소 공작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낯익은 목소리에 숨을 죽였다. 그는 황태자의 시종인 피터슨이었다.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왔네만.”

“개인적인 일이요? 친구라도 만나러 오셨습니까?”

이곳은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그런 곳에 친구를 만나러 왔냐고 묻는 건 에이든 경의 출신을 조롱하기 위함이다.

“피터슨, 너야말로 여긴 무슨 일로 방문했지?”

“전하께서 이곳의 옆 동네까지 시찰하실 가능성이 높아, 안전에 위협이 되는 요소는 없는지 확인해 보려고 겸사겸사 와 봤습니다. 내일 전하를 맞을 준비는 되셨습니까?”

“나름대로 준비 했지만 얼마나 성에 차실지는 모르겠네.”

“전하께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시죠. 황태자 전하께 걸맞은 환대를 준비하느라 노력했을 게 눈에 선하니 그분께서도 좋게 봐주실 겁니다.”

노예 출신이라 아는 게 없을 테니 준비가 엉망진창이라도 이해해 줄 거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 했다.

내가 아는 피터슨 씨는 저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무례한 이가 아니었다.

‘이제야 그 실체를 알게 된 거겠지.’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나온 뒤에 알게 된 게 많은데, 이것도 그중 하나다.

돈과 권력, 명예가 있다는 건 비열하고 저열한 사람에게도 대우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셀레나 에스타리온일 땐 몰랐다.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에이든 경이 당한 모욕에 주먹에 힘이 꽉 쥐어졌다.

당장 튀어나가서 그를 비난하고 싶지만 나를 숨겨 준 에이든 경의 배려를 보아서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저런 사람이 몇 마디 비난에 모욕감을 느낄 리도 없어.’

에이든 경은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새삼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 체감되어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내 생각도 그래. 자네처럼 건방진 주둥이를 가진 놈을 살려 두시다니, 전하께선 아주 자비로운 분이 분명하지.”

“뭐, 뭐라고요?”

“자네가 내 시종이었다면 지금쯤 자네의 혀를 뽑았거나 매질을 해서 쫓아냈을 거야. 그렇게 보면 배움이란 참 좋은 거지. 조금 더 문명화된 방식으로 벌할 수 있잖아?”

어깨를 으쓱거리며 빙그레 웃는 에이든 경의 옆모습이 보였다.

피터슨 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을 걸 생각하니 조금 고소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전쟁 영웅으로 남을 수 있으리란 착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 건 과거의 영광으로 빛바랜 추억이 되고, 당신은 출세한 노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요.”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곧 기척이 들리더니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피터슨이 사라지고 나자 내가 있던 골목으로 고개를 돌린 에이든 경이 말했다.

“아무래도 에바의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게 좋아 보이네.”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 경의 얼굴은 평소 보이는 능글거리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보이고 싶지 않을 모습을 보게 된 게 민망해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골목 어귀에서 에이든 경과 헤어진 다음, 다시 에바의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셀레나 씨. 이것 좀 도와주세요.”

“아, 네.”

에바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른 손을 씻고 그녀에게 가서 일을 거들었다.

부지런히 일을 하는 에바의 팔에 슬쩍슬쩍 지난번 봤던 상처가 보였다.

많이 흐릿해졌지만 아주 없어진 건 아니라 조금 마음이 쓰였다.

‘내 일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말자. 오지랖이야.’

본인도 내가 신경 쓰기를 바라지 않는 눈치라 신경을 끄고 식탁에 앉았다.

맞은 편에 앉은 에바가 힐끔 나를 살폈다.

“편히 있으세요. 셀레나 씨가 오기로 한 덕분에 공작님께서 돈을 제법 주셨거든요.”

그렇게 말한 에바는 속물적인 말을 한 게 조금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그때였다.

쾅쾅.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헙하고 숨을 삼켰다.

에바가 어두워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말했다.

“방에 들어가 계시겠어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위험한 거라면 같이 있는 게 좋지 않아요?”

“개인적인 일이에요.”

쾅! 쾅!

연이은 소리가 집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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