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나올 때 나는 그곳의 돈은 한 푼도 챙겨 나오지 않았다.
그 자리가 내 것이 아니라기에 함부로 남의 것을 탐했다가 후에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서다.
수중에 돈이 없다고 한들 내게 아무 자산도 없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당장 융통할 현금은 없어도 자본은 충분히 많았다.
‘이렇게 금방 연구가 끝날 줄은 몰랐는데.’
투자금은 모두 열여섯 살 생일을 맞아 받은 5골드에서 시작되었다.
그때의 나는 곧 무역 전쟁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해 5골드를 모두 무역선에 투자했다. 투자는 크게 성공해 이듬해엔 5골드가 150골드가 되었다.
처음 받은 5골드는 에스타리온 백작에게 선물로 되돌려주었고, 그때 받은 배당금으로 남부에 조그만 연구소를 세웠다.
거창할 것도 없고 규모가 크진 않지만 큰 미래 가치를 가진 연구소였다.
연구소를 세운 뒤에도 주기적으로 투자를 해서 남은 이익으로 연구비과 연구원들의 월급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올해, 연구를 시작한 지 삼 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아가씨. 그건 아가씨께서 드시는 약 아닌가요? 몸의 회복을 돕는 약이라면서요.”
“맞아.”
“그건 왜 챙겨가세요. 설마 시반 부인에게 주려는 거예요?”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사실 정확히 말해 회복을 돕는게 아니라 통증을 경감시키는 약이다.
내가 연구한 약은 진통제와 마취제였다.
어려서부터 쉽게 몸이 아프고, 조금 커서는 두통을 달고 살다 보니 자연히 통증경감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매번 진통 포션을 살 수는 없는걸.’
진통 포션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공급이 미진한데다 신전에서만 살 수 있어서, 가난한 이들은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연구소의 총책임자인 헤레이스가 보내 준 액상진통제는 다르다.
재료로 쓰인 풀만 있으면 언제든 만들 수 있고, 상인들을 통해 유통하다 보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편히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쿵. 쿵.
차분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거친 손짓을 가진 소피가 크게 노크를 했다.
“누구요?”
안에서 문이 열리더니 프레드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지난번에 설명을 하지 않았소. 안 한대도.”
“부인께 꼭 드리고 싶은 약이 있어서요.”
“약? 어지간한 약은 다 써 봤소만.”
“그간 찾아볼 수 없었던 약이에요. 약속해요. 부인께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는 내 말을 못 믿는 눈치였지만 이쪽이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고는 문가에서 몸을 비켜주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시반 부인은 거실 소파에 죽은 듯 너부러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시름시름 앓는 모습이 누가 봐도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었다.
“부인, 안녕하세요.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답니다.”
“소화제를 이국에서 온 엄청난 약으로 포장해 팔려거든 이만 가 줘요.”
시반 부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직접 드셔서 효능을 확인해 보시면 되겠어요.”
그녀에게 약병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시선이 약병에 닿았다가 프레드 씨에게로 향했다.
시반 부인으로서는 이 상황이 많이 의아할 테다.
“당신이 주는 걸 어떻게 믿고 마신단 말이오?”
“칼립소 공작가의 사람으로 왔어요. 허튼소리는 아니니 믿어 줘요.”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했다.
노예 출신 귀족인 에이든 경의 사람이라는 것에 신뢰가 가지 않는 걸 테다.
와중에도 두통이 오는지 시반 부인은 간간이 인상을 찡그렸다.
“두통에 도움이 될 거예요. 드셔 보세요.”
“진통 포션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비슷해요.”
“거짓말을 하는군. 저건 진통 포션이 아닐뿐더러 만약 진통 포션이라 하더라도 칼립소 공작께서 내가 뭐라고 그만한 걸 선물한단 말인가!”
“의심이 많으시군요. 그렇다면 시반 부인을 가엾이 여기는 사람으로서 드릴게요. 저도 두통에 자주 시달려서 그녀가 남 같지 않거든요. 자, 이건 마지막 기회예요. 세 번의 권유는 없어요.”
시반 부인이 혼란스런 얼굴을 하자 프레드 씨가 만류했다.
“여보, 들어가 있는 게 좋겠소.”
“아니에요. 마셔 볼래요. 난 이 두통이 지긋지긋해서, 없앨 수만 있다면 악마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녀는 곧장 내 손에서 액상진통제를 받아 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벌컥벌컥 마셨다.
“반만 마시면 될 거예요.”
시반 부인은 내 말대로 딱 절반만 마신 뒤 병을 내려놓았다.
“약효가 들려면 십 분은 기다려야 해요. 프레드 씨. 십 분 뒤, 부인의 통증이 가라앉거든 저와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얼굴이 어떨지 알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한 미소일 테다.
* * *
“원한다면 매일 약을 제공해 줄 수 있어요. 대신 칼립소 저택의 집사직을 수락해야만 가능해요. 라니… 아가씨, 정말 멋졌어요.”
소피의 말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저택에 체계가 생기는 데에 가장 기뻐하는 이가 소피였다.
소피는 저택에 집사가 생겼다는 생각에 흥분을 가라앉히질 못했다.
“그런데 그 약은 대체 뭔가요? 단순히 회복을 돕는 약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나는 소피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그녀는 왜 진작 머리가 아프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냐고 타박했지만 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다며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그렇게 저택에 돌아오자 미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요?”
“마리 씨가…….”
말을 마무리 짓지 않아도 그녀가 신의 곁으로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큰 정을 준 것도 아니지만 죽음은 가슴이 먹먹한 일이다.
소피가 눈물을 글썽이며 에바에게 물었다.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나이가 많아서 더 버틸 체력이 없었던 걸 거야. 소피, 윌은요?”
“윌은 베키가 데리고 있어요.”
“선생님.”
에바의 뒤로 에이든 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원망하듯 말했다.
“선생님은 자꾸 저택을 비우고 어딜 가는 거야. 사람 걱정되게.”
“잠시 볼일이 있어서요. 마리가… 떠났다고요.”
“그렇게 됐어. 내일 우리끼리 간단한 기도문을 읊고 마을 공동묘지에 묻기로 했어.”
“그렇군요.”
에이든 경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느껴졌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며 얘기를 꺼냈다.
“그 조막만 한 녀석이,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게 펑펑 울면 좋을걸. 그냥 버티고만 있어. 그게 너무 짜증 나.”
“…….”
“할머니가 천국에 갔을까요? 이러는데 저 작은 머리 안에 뭐가 들었을까 싶었다니까.”
성큼성큼 복도를 걷는 발걸음에서 불편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신경질적인 음성과 복잡한 감정을 삼킨 눈빛이 그를 어느 때보다 불안정하게 보이게끔 했다.
“나도 그깟 꼬맹이한테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보고 있으면 자꾸 옛날이 떠올라.”
“옛날…이요?”
“빌어처먹을 노예 시절에 내가 그렇게 죽은 눈을 했겠지.”
“아…….”
“선생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선생님은 똑똑하니 잘 알잖아. 그냥 울릴까? 아니면 혼을 낼까?”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에 푹 잠긴 목소리가 다정했다.
말투는 거칠었지만 그 속에 느껴진 진심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에이든 경의 등을 쓸어 주었다.
사나운 말투 속 걱정과 슬픔 가득한 진심이 느껴졌다.
“…곁에 있어 주세요.”
“그거면 돼? 고작 그걸로 나아질까?”
어린 시절, 기억은 없고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낯설었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상대도 없어서 누군가 곁을 지켜 주었으면 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 없는 작은아버지의 방에서 외로움을 해소하곤 했다.
“에이든 경은 어떤 걸 가장 바랐어요?”
“난 당연히 이네…….”
에이든 경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아차 싶은 얼굴로 숨을 푹 내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그거면 되겠다. 그게 최선이지. 고마워, 선생님.”
윌처럼 내게도 나를 위로해 주려는 사람이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생각해서 뭐 해.’
이미 다 지난 일인걸.
“윌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믿을 만한 시설이 있다면 그곳에 맡기겠지만 대다수는 뒤에서 인신매매를 하니까 못 보내지. 당분간은 잡일이나 시키며 거둘 생각이야.”
후우.
그가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어려서 잡일도 무리고 그냥 군식구로 거둬 먹이는 거지, 후원이라고 해두자. 귀족 놈들은 그런 거 많이 한다며.”
“마리가 많이 고마워할 거예요.”
“마리랑 제대로 대화해 본 적은 없어도 연이 닿은 놈은 책임지고 싶어. 그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아무튼, 난 공동묘지 대금 좀 치르고 와야겠어.”
“다녀오세요.”
에이든 경이 떠난 뒤엔 에바가 털래털래 돌아왔다.
“베키가 윌과 같이 있어요.”
윌을 좇느라 더웠는지, 에바는 소매를 위로 거둔 상태였다.
살짝 드러난 소매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그녀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그러곤 소매를 더 위로 추켜올려 팔을 확인했다.
“이게 뭔가요?”
드러난 에바의 팔에는 멍이 가득했다.
넘어져서 생겼다기엔 부자연스러웠고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한 건지 색깔도 다양했다.
“누구예요? 누가 때린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황한 에바가 내 손에서 팔을 비틀어 빼낸 다음 얼른 옷자락으로 팔을 덮었다.
“말해요. 지난번에 준 돈으로는 부족했어요? 그래서 때리던가요?”
“그건…….”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하는 문장이 뜻하는 바야 간단했다.
이단심문소에서 이유 없이 얻어맞은 게 떠올라 부글부글 화가 끓었다.
‘내 일이 아냐. 관여할 필요 없어.’
내게 닥친 일을 처리하기도 바쁜데 에바에게 더 경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에바의 사정을 무시한 채 지나쳤다.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늘은 이 이상 머리 아프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