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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29화 (30/134)

<29>

고용인들이 생기며 저택은 조금씩 변모해 나갔다.

썩은 나뭇바닥 교체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거미줄은 죄 치워졌으며, 지붕도 보수공사가 시작됐다.

아직 완벽하게 수리된 건 아니지만 차츰차츰 변해가는 게 보였다.

“아가씨.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좋은 소식을 들어서.”

“어떤 건가요?”

소피가 눈을 반짝였다.

헤레이스에게서 온 시약도 그녀의 눈처럼 반짝였었다.

[…약품의 재료가 되는 달맞이꽃을 비롯해 중요 재료들은 말씀하신 대로 자체적인 밭을 만들어 공급을 원활히 하기로 했습니다.

임상실험이 끝났다지만 아가씨께서 직접 약을 드셔서 확인한다니, 그간 아가씨의 건강이 어땠을지 눈에 보이는 듯하군요.

모쪼록 건강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헤레이스 말로는 그간 내가 투자 개발했던 약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누군가에겐 그깟 약에 불과하겠지만 내겐 정말 중요했다.

“비밀이야.”

“그럼 더 이상 비밀로 할 필요가 없을 때 제일 먼저 제게 얘기해 주세요.”

“그래. 걱정 마. 그보다 마리는 좀 어때? 어제 확인했을 땐 안색이 많이 안 좋던데.”

“마리야 더 좋아지는 게 힘들겠죠. 걱정인 건 윌이에요. 유일한 보호자인 할머니가 그리 아프니, 애가 얼마나 힘들까요.”

윌의 불안 가득한 눈이 떠올랐다.

어린아이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걸 지켜보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나 또한 불안 가득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기억이 없어서 가족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초조함과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불안이 유년시절을 지배했었다.

“여차하면 내가 도우면 돼.”

“아가씨. 아가씨와 상관없는 아이예요. 세상 모든 불쌍한 사람을 다 도우려 할 필요는 없어요.”

소피가 조심스런 말투로 충고했다.

“에바만 해도 그래요. 그 애를 지나치게 믿으신 것 같아요. 그 귀한 스카프를…….”

황태자 전하가 선물한 건 줄 몰라도, 광택만으로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소피는 내가 그런 물건을 스스럼없이 에바에게 준 것을 두고 사람을 너무 믿는다며 걱정했다.

“괜찮아. 그보다 어서 사람을 구해야 할 텐데…….”

아직 에이든 경의 검술 스승과 집사를 구하지 못했다.

사람을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검술 스승과 집사는 조금 특수한 직군이라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하아.”

신경을 쓰자 또다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지낼 땐 이렇게까지 자주 두통이 오진 않았다.

‘아무래도 그간 고초를 겪어서 몸이 약해진 것 같아.’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다.

그렇다고 침대에 누워 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쭉 나아가려 애쓰는 편이 마음을 추스르는 데 더 도움이 되었다.

서랍에서 헤레이스가 보낸 시약을 꺼내 적정 용량을 홀짝였다.

소피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더니 내게 물었다.

“그건 뭔가요?”

“몸의 회복을 돕는 약이야.”

“그럼 조금 더 드세요. 아가씨는 그 약을 많이 드셔야 해요.”

편두통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소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수업도 끝났겠다 저택의 청소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소피. 너는 내부를 확인해 봐. 난 저택 외벽을 확인해 보고 와야겠어.”

“아직 날이 쌀쌀한데 안에 있는 게 좋으실 듯해요.”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서 그래.”

외면에 있던 낙서가 지워졌는지 확인하려고 저택 뒤편으로 갔다.

“저건…….”

저택 뒤편에서 목격한 건 굉장히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었다.

“잭슨 씨. 근무 중 음주는 금지되어 있을 텐데요?”

이번에 고용한 하인 잭슨 씨가 한쪽에 쭈그려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잭슨 씨는 체격이 크고 근육질 몸을 했는데, 힘이 무척 세 무거운 물건을 번쩍번쩍 들곤 했다.

“아, 우리 가정교사님이 오셨군요.”

그가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빨리 등 뒤로 술병을 숨기긴 했지만 이미 본 걸 못 본 셈 칠 수는 없었다.

그 이전에, 아직 해도 지지 않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술은 어디서 찾은 건가요?”

“지하에 술 창고가 있더군요. 한 병 슬쩍 했습죠.”

“그걸 바로 도둑질이라고 해요.”

“같은 고용인끼리 모른 척 좀 합시다.”

“같은 고용인이지만 저는 관리자라서 눈감아 주기가 힘드네요. 더군다나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어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텐데요.”

“일이 고단하니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잭슨 씨가 술에 취해 작게 킬킬거렸다.

그 모습에 가슴이 갑갑해져 와서 한숨을 꾹 삼켜야 했다.

“외벽의 낙서도 그대로고, 굴뚝 청소는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래서 자를 거요?”

“필요하다면요. 오늘 안에 얼른 다 끝내도록 해요. 그리고 경고하건데, 한 번만 더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면 당장 해고예요.”

마음 같으면 당장 그를 자르고 싶었지만 지금 저택에는 사람이 필요했다.

“예, 예.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리자 나으리.”

한껏 비꼰 말투와 달리 목례를 하며 보이는 인사는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부러 그런다기보다는 몸에 밴 것에 가까웠다.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오던 길, 스트레스로 정신이 피로한 가운데 두통이 사라진 걸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얼른 이것 좀 치우란 말야.”

열린 창문 사이로 하녀 지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바로 옆에서 몸이 멈춘 덕에 지니는 밖에 있는 나를 볼 수가 없었다.

“그건 네 일인걸…….”

“얘, 베키. 친구 좋다는 게 뭐니. 힘들 때 돕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이겨 내는 거잖아. 친구끼리 고작 창문닦이도 못 도와줘?”

“그건 네가 할 수 있잖아.”

기세등등한 지니와 달리 베키의 자신감 없는 음성에 눈썹이 절로 모였다.

“어제 잠을 설쳤더니 피곤해서 일을 못 하겠는걸. 알잖아, 내가 예민해서 불면증이 있는 거.”

“잠을 못 잔 건 나도 마찬가지-.”

“거기다 옆집 아이는 또 얼마나 우는지…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겠더라고.”

“…….”

“창문 좀 부탁해. 다 하고 바닥 청소도 해 주면 고맙고.”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지니가 현장을 떠나기 전, 얼른 창가로 튀어나가 그녀를 불렀다.

“지니. 그리고 베키.”

나를 발견한 베키가 사색이 되었다.

“세, 셀레나 씨…….”

“셀레나 씨. 서재에서 쉬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참 공교로운 타이밍이네요, 지니. 안 그래요? 그보다 두 사람, 저와 얘기 좀 나눠야겠는데요.”

고용인 사이의 사사로운 감정은 내가 상관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업무가 개입되면 말이 다르다.

“피, 필요 없어요!”

“방금 제가 본 바로는 지니 씨가 당신에게 일을 떠넘겼는데 상관이 없다뇨.”

“잘못 들으신 거예요.”

“셀레나 씨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셀레나 씨는 가정교사지 저희 주인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당신들을 통솔할 의무가 있죠. 지니, 당신이 설명해 봐요. 왜 베키에게 일을 떠넘기나요?”

“떠넘긴 적 없어요. 단순히 서로서로 도운 거죠.”

빈정거리는 말투에 화가 치밀었다.

나를 우습게 여긴 시에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시에나에게 속절없이 무릎꿇어야했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아니면 내가 우습나요? 도움과 괴롭힘도 구분하지 못할까 봐요.”

“구분 못 한 것 같은데.”

에이든 경과 같은 껄렁이는 태도지만 그 질이 나빴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에 당장 목소리를 높이고픈 마음을 꾹 내리눌렀다.

“당신은 해고예요. 그러니 이 집에서 나가요.”

“…….”

지니가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베키가 오들오들 떨며 내게 부탁했다.

“제, 제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셀레나 씨.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베키의 말이 맞아요. 혼자서 이상한 상상을 한 모양인데-.”

“최소한의 예의 있는 태도도 갖추지 못한 데다 제 몫의 일도 못 해내는 하녀는 필요 없거니와, 베키에게 한 당신 태도를 보아서 이곳에 둬 봐야 좋을 게 없어 보이는군요.”

지니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부들거리더니 씩씩거리며 말을 꺼냈다.

“베키가 어떤 애인 줄 알아요?”

“내가 자른 사람은 베키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베키는 미혼모예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빠도 모르는 애를 낳았다고요. 잘라야 한다면 베키 먼저 잘라야죠.”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멀리 외국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도 괜찮은 나라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불과 백 년 전까지 성녀가 존재했던 신성 국가다.

그렇기에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갖는 건 사회적으로 절대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베키가 시체처럼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의 얼굴에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번졌다.

“지, 지니. 얘기하지 않기로 했잖아. 이번에도 잘리면 난…….”

지니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보다 질 나쁜 사람은 두면서 저를 자르시겠다고요? 그건 너무 불공평한 일이에요.”

“지금 당신이 한 말을 들으니 확신이 들어요. 그만둬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란 걸요.”

“쟨 미혼모라니까요?”

“그래서요? 사생활이 일과 무슨 상관인가요?”

“네, 네?”

“미혼모라고요? 세상의 시선에서 아이를 지켜 내다니, 강단 있고 강한 사람이네요. 딱 제가 바란 사람이에요. 반면 당신은 남의 약점을 멋대로 폭로할 만큼 입이 가볍고 저질스런 사람이고요.”

“뭐, 뭐라고요? 말 다했어요?”

“할 말 남았어요. 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나가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을 추천해 준 사람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기 전에요!”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지니처럼 약점을 휘두르는 사람이 싫었고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열해서 열이 올랐다.

주먹을 꽉 쥔 채 지니를 노려보았다.

이를 악물고 참지 않으면 그녀에게 짐승처럼 화를 낼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쉽게 흥분하지 않았는데…….’

볼품없이 당하는 베키가 꼭 나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에나가 이간질할 때까지 넋 놓고 당한 게 원통해서, 이런 일에도 화르륵 분노가 타오른다.

베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코를 훌쩍거리며 울음을 참는 중이었다.

그녀가 내뱉는 숨에 서러움이 배어 있었다.

지니가 한참 나를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어차피 노예 놈이 귀족질 하는 이런 집, 오고 싶지도 않았어!”

그녀는 발을 쿵쿵 굴리며 방을 떠났다.

복도로 나간 뒤에도 거친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고, 고, 고마워요. 흐윽. 그렇게 말해 줘서 흐으윽, 정말로 고마워요.”

베키는 숨을 헐떡였다. 거의 오열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베키. 그런 일로 약점 잡혀서 기죽지 마요. 당당해도 좋아요.”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베키가 얘기했다.

“저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일할게요. 흐윽, 열심히 할게요, 셀레나 씨.”

베키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칼립소 저택에 하녀 한 명이 줄어들었는데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되고 있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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