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연모한다는 그 말이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장난스레 나온 말임을 알지만 그리 말하는 에이든 경의 얼굴엔 웃음기라곤 없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도 엄숙했다.
내가 어떤 얼굴을 했을지 몰라도 아주 심각한 표정을 했으리란 건 분명하다.
그러자 에이든 경의 눈이 한순간 부드러이 휘었다. 그가 장난스런 말투로 말했다.
“만약 수업이 끝나고 혼자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면, 나는 다음 수업 시간까지 쭉 선생님을 그리워할 거야. 그럼 그건 내가 선생님을 연모한단 거겠지.”
“사랑의 연장선이에요. 연모는.”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괜한 오해를 했단 생각에 민망한 와중에 방금 전 그가 보인 눈빛이 신경 쓰였다.
“내가 선생님께 갖는 최소한의 애정도 사랑이라고 치지 뭐.”
에이든 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에게 무어라 말할지 몰라 말을 고르는 동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선생님께 사랑 고백 중인데 타이밍 한 번 죽여주네. 누구야? 들어와도 좋아.”
소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손에 무언가를 고이 쥐고 있었다.
“소피, 무슨 일 있었어?”
“그게…… 화, 황실에서 서신이 왔어요. 아주 중요한 서류래요.”
“서신을 가지고 온 수행원은?”
“그분은 바쁘다며 서신만 주고 떠나셨어요.”
소피는 위험한 물건을 다루듯 얼른 에이든 경에게 서신을 전해 주었다.
그런 뒤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도망치듯 서재를 나갔다.
“공문이네요. 어서 열어 봐요.”
“선생님은 괘씸하지 않아?”
“뭐가요?”
에이든 경이 이를 빠득 갈며 일어나 창밖을 확인했다.
그의 시선 끝에 도망치듯 떠난 수행원의 뒷모습이 담겼다.
“저 빌어먹을 새… 자식 말이야. 황실에선 내가 글을 못 읽는 걸 알고 직접 내용을 읽어 줄 사람을 보냈을 텐데, 냅다 편지만 두고 도망갔잖아.”
“아…….”
“언제고 저 자식,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어.”
사납게 복수를 다짐한 그가 서신을 뜯었다.
굳이 안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곁눈질하려고 하진 않았다.
칼립소 공작가의 주인은 에이든 경이다. 나는 군식구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쪽에 황실과의 관계를 얼마나 공개할지도 그에게 달려 있다.
에이든 경은 제법 능숙하게 글을 읽기 시작해 빠르게 서신을 확인했다.
그런 뒤엔 사나운 기세로 서신을 구겨 접었다.
‘분위기가 심각하네.’
접힌 미간과 비틀린 입술이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일어났음을 말해 주었다.
구겨진 얼굴로 초조하게 창밖을 응시하던 그가 슬쩍 나를 살폈다.
허공에서 에이든 경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유난히 눈이 새까맣기 때문일까? 그의 눈에선 불편한 심기 이외엔 세밀한 감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황태자의 약혼녀였다고 들었는데.”
“그랬죠. …전하와 관련된 일 때문이라면 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중간에서 눈치 보느라 힘들게 뻔하잖아.”
그러며 에이든 경이 내게 서신을 내밀었다.
그가 건넨 서신이 소설로 치면 사건의 발단이 되는 열쇠로 느껴졌다.
‘이건 현실이야. 소설 따위가 아냐.’
설마 소설처럼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질까. 빠르게 서신을 훑었다.
에이든 경의 언어를 빌려 쓰고 싶었다. ‘빌어먹을’이라든가 ‘젠장’ 같은.
“…인근을 시찰한 뒤 하루동안 칼립소 저택에서 머무른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보다 복잡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에게 받은 모멸감과 지금 이런 모습으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복수심까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콱 깨문 것 같은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힘을 모으고 난 뒤에나 보고 싶어.’
“황태자 전하가 집에 오는 일은 없을 거야. 집이 이 꼬라지… 모양인데 누가 어딜 온단 거야. 밖에서 만나서 인사나 드릴 거야.”
“…….”
“선생님, 선생님!”
에이든 경이 내 눈앞에서 탁, 탁. 손가락을 튕겼다.
그제야 내가 손톱이 손을 파고들도록 꽉 주먹 쥐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운이 없어서 황태자가 우리 집에 오더라도 선생님은 잠시 다른 데 가 있으면 돼.”
“…….”
“선생님!”
이상한 일이다. 의문투성이다. 에이든 경은 왜…….
“필요 이상의 배려인 것 같아요.”
“뭐?”
“단순히 가정교사에게 하는 배려치고, 과하다고요.”
“무슨 의미야? 내가 전하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 둘이 상봉이라도 하게 해 줘야 한단 거야? 아니면 내가 의심스럽다는 거야? 말 똑바로 해.”
“무슨 의미든요.”
에이든 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호의였어.”
“호의요?”
“그래. 호의. 약혼했다가 깨졌잖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을 게 분명한데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없는 거지.”
“…대체 제게…….”
왜 잘해 주시나요?
필요 이상의, 생각 이상의, 기대 이상의 친절이다. 그의 이런 면이 의심스럽다.
과거의 나라면 그가 정이 많은 사람이라 그렇노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내겐 수상쩍은 일로 분류되었다.
내가 삼킨 물음이 에이든 경에게 모욕적임을 잘 안다.
무례하고도 못된 의문이다.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떠나보낼 수가 없다. 하지만.
“죄송해요. 실언했어요.”
나는 더 이상 에스타리온 백작 영애가 아니다.
에이든 경이 필요한 셀레나라는 여자애에 불과하지.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는게 좋을 거야. 진심을 의심당하니까 기분 되게 더럽네.”
에이든 경은 내 손에서 서신을 탁 빼가곤 성큼성큼 서재를 나갔다.
쾅!
문이 닫히며 난 충격에 공기가 울렸다.
그 소리가 어째서 온전히 사람을 믿지 못 하냐는 비난 같아서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 * *
“아가씨. 이쪽이에요.”
어느 허름한 집의 문 앞에 선 소피가 내게 손짓했다.
“그냥 다른 중상류층의 집에서 일한 집사를 쓰셔도 될 텐데.”
“칼립소 공작가처럼 체계가 덜 잡힌 집에선 보다 제대로 된 집사가 필요해. 어중이떠중이들로는 안 돼.”
내가 찾는 사람은 겔리메어 자작가에서 집사로 일했던 프레드 시반이었다.
오 년 전 겔리메어 자작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으며 상황이 달라졌다.
겔리메어 자작가의 방계에 가문이 넘어가면 좋으련만, 자작가의 방계는 오래전 이민을 가 외국 국적을 취득한 터라 그쪽으로 넘어갈 수도 없었다.
결국 겔리메어 자작가의 재산은 국고로 환수되었고 프레드 시반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때 당시 수도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그를 제집의 집사로 영입하려는 사람이 여럿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똑똑.
망설임 없이 노크를 했지만 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똑똑.
여전히 반응이 없자 소피가 나섰다.
“안에 없어요?”
쿵! 쿵! 쿵!
소피가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소, 소피. 그럴 필요는 없어.”
“이렇게 해야 나와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은 소피는 문을 두드리는 데에 열중했다.
“누구요.”
끼이익.
문이 열리며 안에서 수염 무성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췌한 인상에 눈그늘이 짙게 진 중년 남자였다.
“프레드 시반 씨 되시나요?”
“그렇고. 내가 프레드 시반이오만.”
“칼립소 공작가에서 나왔-.”
“일 안 합니다.”
쾅!
면전에서 문이 닫혔다. 하지만 소피가 더 빨랐다.
“그래도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요.”
“아가씨. 그 발 좀 치우쇼.”
“안 돼요. 우리 아가씨가 기다리잖아요. 차 한 잔만 내주세요.”
소피는 내가 나설 새도 없이 억척스레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참 실랑이 끝에 프레드 시반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문을 열었다.
“십 분이오.”
“고마워요. 들어가요, 아가씨.”
처음 보는 소피의 모습에 어안이벙벙해 있는 나를 그녀가 안으로 이끌었다.
프레드의 집은 엉망진창이란 단어로 설명이 될 듯했다.
잔뜩 쌓인 먼지며 벽의 거미줄, 너저분하게 흩어진 쓰레기까지. 퀴퀴한 냄새는 덤이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프레드가 얘기했다.
“일할 생각 없소.”
“어째선가요? 혹시 겔리메어 자작에게 충성맹세라도 한 건가요?”
내 물음에 프레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집사에게 충성맹세가 어딨겠소. 돈 받고 일한 건데.”
“그럼요?”
“개인 사정이오.”
“돈이 필요하신 듯한데 아가씨 제안에 승낙하세요.”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으으으으.”
안에서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들려오자 프레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보, 괜찮소?”
거실 한쪽에 열린 문틈으로 머리를 움켜쥔 중년 여인이 보였다.
‘두통인 건가.’
그녀는 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린 안색을 하고선 바닥을 뒹굴었다.
두통이 심할 때 토악질을 하며 버틴 적이 있어서 그녀의 고통이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으으으으으. 흐으으으으. 괜찮아요. 괜찮으니, 나가 봐요.”
“잠은 좀 잤소? 다시 의원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떻소?”
“괜찮아요. 혼자 있고 싶어요. 프레드, 나가 줘요.”
중년 여인이 프레드를 밀어냈다.
결국 프레드는 방 밖으로 내쫓기듯 나왔다. 그는 몇 분 만에 몇 년은 늙은 듯했다.
“부인이 저래서 집을 떠날 수가 없소.”
“어쩌다…….”
“몸이 아픈 건 아니고 정신적인 문제가 통증으로 올라온 거라더군.”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하소연을 시작했다.
“삼 년 전에 딸아이가 폐렴으로 죽었네. 데이지란 이름처럼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웠지.”
시반 부부는 데이지가 죽고 크게 낙담했다.
죽은 아이가 그리워서 온종일 울기도 하고 술에 의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씩 고통을 이겨 냈다.
하늘은 그런 부부에게 선물처럼 새로운 아기를 내려주었다.
“우리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시반 부인이 당시 유행하던 열병에 걸리며 태중의 아이가 사산되었다.
시반 부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고 프레드는 그런 부인을 보며 슬픔에 빠지게 된 거였다.
“나는 아픈 아내를 두고 일터에 떠날 수 없네. 더군다나 집사직이면 아내와 함께 짐을 싸 들고 칼립소 공작님의 저택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데… 공작님께도 내게도 못 할 짓이지.”
“…….”
“내 아내가 낯선 장소에서 눈치 보며 아파하게 둘 수는 없네. 그러니 이만 가 주면 좋겠네.”
“약은… 드시고 계신가요?”
“마음의 병이니 근본적인 치료가 힘들지. 그렇다고 통증을 줄이는 진통 포션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시반 부인은 온종일 두통에 시달린 채 죽은 듯 침대 위에 누워만 있단 거다.
삶이 주는 고통을 견뎌내는 그에게 더는 집사직을 권할 수가 없었다.
“가자, 소피.”
“네…….”
소피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단 걸 깨달은 듯했다.
집사직을 권하러 나왔지만 별 소득 없이 칼립소 공작가로 돌아왔다.
“세상엔 가엾은 사람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돌아오는 길, 소피가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시반 부부의 일로 마음이 안 좋았던 터라 기분이 가라앉았다.
침묵 속에 마차에서 내려 곧장 방으로 돌아오자 내게 선물이 와 있었다.
“아…! 드디어!”
탄성이 나왔다. 헤레이스에게서 소포가 왔다.
오래도록 기다린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