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저택의 체계를 잡기 위한 날이 밝았다.
잡혀 있는 체계를 유지, 관리하는 건 익숙했지, 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건 처음이라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았다.
‘집사를 구하는 건 며칠 더 걸릴 예정이고… 우선 이 저택부터 정리해야 해.’
셀레나는 고용인들이 모여 있는 중앙홀로 가는 길이었다.
“너 베키 아니니? 맞지, 베키 와이번.”
복도를 지나 홀로 내려가기 직전,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녀 중 한 명이 베키라는 하녀를 알아보았다.
인사를 건네는 거라고 하기엔 어조가 제법 날카로웠다.
“지, 지니?”
“오랜만이야. 베키. 잘 지냈어?”
“아… 으응. 그런데 네가 수도에는 어떻게…….”
“일자리를 찾아서 상경했지. 그런데 널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수도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니 든든하다, 얘!”
들어 보니 베키와 지니는 아는 사이인 듯했다.
“큼. 흠.”
기척을 내며 나타나자 대화가 끊기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번에 뽑은 사람은 총 여섯으로, 하인 셋, 하녀 셋이다.
“모두 만나서 반가워요. 앞으로 몇 달간 여러분에게 일을 배분해 줄 책임자, 셀레나 에스… 셀레나예요. 편히 불러요.”
습관적으로 에스타리온이라는 성이 나왔다.
에스타리온을 버렸으니 내가 쓸 만한 적당한 성을 만들어야겠다.
“소피를 통해서 여러분이 기거할 방을 안내받았을 거예요. 그럼 각자 할 일을 배분해 줄게요.”
하인 세 명, 하녀 세 명.
이 큰 저택을 관리하기에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이 몇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한 명 한 명 일을 배분해 주었다.
부엌 담당, 빨래 담당, 청소 담당 등 각자 할 일을 준 뒤 조금 염려되는 마음에 주의를 주었다.
“알다시피 이 저택의 주인은 칼립소 공작님이세요. 저는 임시로 일을 맡았을 뿐, 여러분의 주인이 칼립소 공작님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수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수도인들의 사고방식을 잘 안다.
그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자존심이 높다.
그러니 노예 출신인 에이든 경을 깔볼 가능성이 크다.
진짜 귀족이 아니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그로 인해 그가 자신의 고용주라는 사실을 못마땅해할 테다.
나는 에이든 경이 이들의 존경을 받진 못해도 존중은 받길 원했다.
“그 사실을 잊는다면 엄격하게 처벌할 거예요.”
“명심하겠습니다.”
“자, 그럼 다들 각자 일을 하러 가요.”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한 것 같아 고용인들을 해산시켰다.
나도 앞으로 있을 수업 커리큘럼을 짜려고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저… 셀레나 아가씨.”
새로 온 하녀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내 기억으로는 이름이…….
“에바?”
“네. 에바예요.”
“무슨 일인가요?”
“그게…… .”
그녀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를 못했다.
뒷말을 듣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불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에바가 부탁했다.
“염치없는 말인 건 알지만 가불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돈이 급한 이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게 근무 첫날부터 가불을 부탁하는 경우는 드물다.
‘가불을 받은 뒤 일하지 않고 도망치는 경우도 많고 말야.’
그러니 함부로 돈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규정상 가불은 월급 보름 전에나 가능해요.”
“아…….”
에바의 눈썹이 안타깝게 떨어졌다.
창백해진 안색이 누가 보아도 돈이 많이 급한 사람이었다.
“오늘이 첫날이라 가불이 힘드신 건 알아요. 하지만 일부라도 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돈이 너무 급해서 그래요.”
“무슨 일인데 그런가요?”
“그건…….”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도 이런 이들을 숱하게 보았다.
아픈 가족 때문에 빚을 지거나 도박, 잘못된 투자 등으로 돈을 잃어 당장 생활비가 급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모든 개개인의 사정을 봐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에바와는 면접을 제외하면 오늘 처음 본다.
돈을 준 만큼 일하리라 믿기에는 우리 사이에 신뢰랄 게 없었다.
‘무엇보다 내 돈이 아닌걸.’
내가 에스타리온의 레이디였다면 개인적인 돈으로 도와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돈이랄게 없었고, 이들에게 지불될 돈은 칼립소 공작의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내어줄 수가 없다.
“얼마가 필요한데 그래요?”
“30실링이요. 부탁드릴게요. 그 돈이 없으면 전 노예로 팔릴지도 몰라요.”
“사채를 썼군요.”
“…….”
침묵이 뜻하는 바가 분명해 머리가 조여 왔다.
사채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로 전략하는 건 어린아이도 알 법한 상식이다.
이십 대 초반밖에 안 된 이가 사채 빚을 지다니…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저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라 관리자예요. 함부로 가불을 해 줄 수는 없어요.”
에바는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제 요구가 납득하기 힘들다는 걸 이해하는 눈치였다.
‘내게 돈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지만…….’
나조차 아직 월급을 받기 전이라 가진 돈이 없다.
“…에바. 우선 따라와요.”
단 하나, 내가 가진 값진 물건이 하나 있다.
앞장서서 내 방으로 향했다.
방, 서랍에서 얼룩이 지워진 스카프를 꺼냈다.
원래 쓰레기통에 버렸었지만 소피가 발견하곤 곱게 씻어 돌려줬었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힘들게 세탁했을 소피 때문에 처분할 수 없었는데 차라리 잘 됐다.
“이런 거라도 괜찮다면 쓰겠어요?”
차르르하던 윤기가 처음만 못 하지만 아름다운 무늬과 자수 등이 여전히 고급물품임을 보여 주었다.
“가져가요.”
어차피 스카프를 내어주는 건 그녀가 아닌 나를 위함이었다.
‘이 스카프, 이젠 내 앞에서 치우고 싶어.’
에바의 딱한 사정을 핑계 삼아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다.
‘이제 이걸로 끝이야. 끝.’
홀가분한 마음에 어딘가 설렘마저 밀려왔다.
“이걸 내다 팔면 필요한 금액은 벌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귀한 걸…….”
“받아요. 어서.”
“하지만 이건 가불도 아니고…….”
에바는 받아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크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에요. 다만, 그냥 주는 건 아니에요. 팔아서 번 돈을 월급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갚아요.”
“좋아요. 감사히 받을게요. 정말로 감사해요. 셀레나 아가씨.”
에바는 묘한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스카프를 챙겼다.
그녀가 스카프만 챙겨서 도망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물건이니 내 손에서 치운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에바에 대한 생각은 뒤로 한 채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 * *
에이든 경은 꽤 성실한 학생이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영리함에 열의와 성실함이 더해져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수업 준비로 정신이 없는데도 수업 시간이 기다려지곤 했다.
“작문 실력과 어휘를 늘릴 필요가 있어요. 이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많이 사용해야만 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해? 하루종일 어려운 단어로 수다라도 떨어야 하나? 촉새처럼 나불거릴 자신은 없는데.”
“나불거리다뇨… 대화를 나눈다는 단어도 있어요.”
“미안. 점점 선생님이 편해지나 봐. 조심한다고 조심하는데도 이러네.”
지난번 에이든 경이 사납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게 떠올랐다.
처음 보았을 땐 굉장히 무뚝뚝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알고 지내다 보니 그건 낯가림이었다.
그는 시니컬하지만 껄렁했고, 진득하게 노력할 줄 알지만 어딘가 가벼운 구석도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에이든 경의 거칠고 사나운 면모를 보게 된다.
저급한 욕을 내뱉거나 방금처럼 다소 질 낮은 말을 하는 등의.
“그래도 노력할게.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거든.”
그리고 그에겐 이렇게 담담한 태도로 사람을 긴장케 만드는 재주도 있다.
“매일 간단한 일기를 쓰도록 해요. 책을 읽은 날에는 독후감을 쓰는 것도 좋아요. 독후감을 쓰면 내용의 핵심을 정리하면서 논리정연하게 감상을 말할 줄 알게 되거든요.”
“쓰면 매일 검사받는 건가?”
“그렇죠. 아, 일기의 경우엔 굳이 안 보여 주셔도 돼요.”
“아냐. 매일 일기를 쓸 테니 확인해 줘. 내가 또 어떤 등신… 멍청한 단어로 지껄였을지 모르거든.”
툭툭 저급한 단어를 쓴 그는 뒤늦게 내 기색을 살폈다.
에이든 경은 내가 내색치 않자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보다 검술 스승을 구하고 싶은데 말야.”
“검술 스승을요?”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혹시 선생님은 알까?”
“음…….”
기사였던 시온을 떠올렸다. 시온은 당연하단 듯 검술을 배웠고 황실 기사단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스승을 구하는 과정을 본 적은 없었다.
그건 에스타리온 백작과 시온, 두 사람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시온이 검술을 배울 때 나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런 걸 기억할 리가 없다.
“선생님도 모르는군.”
“검술을 배워야 할 일이 있으세요?”
“공부는 배워야 해서 하는 거라면 검술은 정말로 배워 보고 싶은 거라서. 신경 쓰지 마. 내가 좀 더 알아보지 뭐.”
알아본다고 하지만 수도 귀족 사회에 아는 사람이라곤 없는 이가 검술 스승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어떻게 해야 검술 스승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때에, 에이든 경이 슬그머니 일어나 내 맞은편에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이든 경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대꾸했다.
“햇빛이 눈부셔서. 커튼을 치면 어두워서 제대로 안 보일 테고.”
“아…….”
창문을 등진 나와 달리 그는 창문을 마주 보고 있었다.
집채만 한 이가 옆에 자리하니 책상 위로 커다란 그늘이 졌다.
고개를 조금 들자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짙은 눈썹과 유난히 또렷한 눈코입, 구릿빛 피부, 깊은 눈매.
섬세한 미인이었던 황태자 전하와 달리 에이든 경은 목탄으로 그린 듯 선이 굵고 거친 미남이었다.
커다란 근육과 어울리지 않게 아이처럼 어설픈 솜씨로 단어를 북북 쓰는 걸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냥 웃으라니까. 나도 내가 웃긴 것쯤은 알아.”
“아뇨. 아니에요.”
“솔직하지 못하긴. 이거나 확인해 줘.”
“뭔가요?”
[연모하다]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면 되지 연모하다는 또 뭐가 달라?”
“사랑해서 간절히 그리워하는 게 연모하다예요.”
“그리워…한다고?”
그는 조금 얼빠진 얼굴로 단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에이든 경은 같은 단어를 읽고 또 읽다가 한참 뒤 말을 꺼냈다.
“선생님. 나 선생님을 연모할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