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또다. 또 특유의 껄렁한 말투로 무심한 소리를 한다.
“얄궂은 장난이세요.”
“장난으로 들려?”
“…네?”
“진짠데. 읽고 쓰는 법도 가르쳐, 사람 쓰는 법도 가르쳐. 이거야 원. 짐승 하나 잡아다가 사람 만드는 거잖아.”
“…….”
“뭐, 그래도 책임지라고는 안 할게.”
“…….”
가끔 에이든 경의 생각이 어디로 튈지 몰라 힘들었다.
그의 진심이 무엇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턱받침을 한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뭐야, 책임지고 싶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런. 선생님은 아주 지혜로운 분인 줄 알았는데.”
“에이든 경. 장난은 그만해요.”
단호히 선을 긋자 에이든 경이 나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알았어. 소피, 다음!”
그의 부름에도 밖에선 반응이 없었다.
그가 다시금 소피를 불렀다.
“소피!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그래.”
소피를 불렀지만 밖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에이든 경이 밖을 확인했다.
문이 열리자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빨리 의사를!”
“전염병일지도 몰라요!”
다급한 소리에 큰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에이든 경과 함께 재빨리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뛰어갔다.
그곳엔 많은 이들이 누군가를 감싼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헤치고 들어가자 피를 토하고 쓰러진 주방 하녀 마리가 보였다.
“맙소사… 마리! 정신 차려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식 재료를 옮기다가 쓰러졌어요.”
누군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피 묻은 마리의 얼굴을 닦으며 그녀를 흔들었다.
“안으로 옮기는 게 우선이에요. 거기, 알베르? 마리를 손님방으로 옮겨 줘요. 2층, 왼쪽에서 세 번째 방이에요.”
창밖을 확인했다.
길게 이어진 면접에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슬슬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밤이 될 테다.
면접을 온 이들을 돌려보내고 새로 온 하녀와 하인들에게 할 일을 지정해 주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우왕좌왕하는 소피를 불러 명령했다.
“소피. 마리의 집을 알지?”
“네.”
“어린 손자가 있다고 했어.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데리고 와.”
“하지만… 그래도 될까요?”
소피가 에이든 경을 살폈다. 이에 에이든 경이 고개를 까딱였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
“네. 다녀올게요.”
소피는 곧장 채비를 해 출발했고 마침 도착한 의사를 손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의사가 마리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하고 났을 땐 까마득히 해가 진 뒤였다.
“하아…….”
얼추 상황이 정리되고 나자 소피가 돌아왔다.
피로에 눈을 꾹꾹 누르며 다시 내려가려는 때 에이든 경이 물었다.
“소피에게 맡기면 될 텐데 왜 굳이 움직이는 거지?”
“…….”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선생님은 선생님 몸부터 신경 써. 안색이 안 좋아.”
백작가에 있을 때야 여유가 되니 남을 도왔더라도 확실히 지금은 여유가 없긴 하다. 하지만…….
“믿음의 문제예요.”
“믿음?”
“네. 믿음이요.”
아버지, 오라버니, 친구. 그리고 사랑했던 약혼자까지. 모두가 날 버렸다.
세상천지에 나 혼자가 된 이 상황보다 기가 막힌 건 누구도 믿을 수 없단 사실이다.
그것이 서럽고 무서워서, 시리고 고독해서… 나는 이렇게나마 스스로를 위안한다.
“이제 아무도 못 믿겠거든요.”
믿을 수가 없으니 이렇게 선행으로나마 장치를 해 두는 거다.
내가 이만큼 베풀면 저들이 나를 신뢰하고 믿어 주지 않을까 하고.
“나도? 나도 그런가?”
에이든 경이 시선을 맞추며 물어왔다.
에이든 칼립소 공작을 믿겠냐고? 재미난 질문이다. 그 답은 어렵지 않다.
“에이든 경과 저는…….”
입술을 벌렸다. 그의 기대 어린 시선이 나를 꿰뚫을 듯하다.
“계약 관계죠.”
“계약이라…….”
사실 잘 모르겠다. 이렇게 돕는들 내가 누군가를 다시 믿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애초에 이런 말을 왜 에이든 경에게 하는 게 이상하다.
그가 솔직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면 굳이 이런 말까진 하지 않았을 거다.
“서운하네.”
“…죄송해요.”
“아니. 죄송하라고 한 뜻은 아니고. 그래도 스승님께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나도 좀 봐 주십사 하는 뜻이었지.”
그러며 그는 무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짙은 흉터와 매서운 눈매에 지레 겁이 날 수도 있는데 악의가 없어서인지 오히려 푸근해 보였다.
“그럼 가 보지.”
대꾸할 새도 없이 그가 앞장섰다.
마리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정신을 차렸는지 우리가 들어오자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어.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인사받는 취미는 없거든. 그보다.”
에이든 경이 마리의 옆에서 쭈뼛대는 아이를 확인했다.
아이는 열 살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말랐는데 어른 손을 타지 못한 티가 났다.
머리는 떡져 있고 옷은 꾀죄죄한데다 그냥 보아도 영양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안녕. 난 셀레나라고 한단다.”
고개를 숙여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혹여 나를 무서워할까 봐 환한 미소를 내걸었다.
“인사해야지. 윌.”
마리의 명령에 아이, 윌은 어설프게 인사를 건넸다.
“위, 윌이에요…….”
“반가워. 윌. 갑자기 이곳에 오게 되어서 많이 놀랐지?”
“아, 아뇨… 괜찮아요…….”
아이는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에이든 경이 두려운지 그를 훔쳐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마리가 아픈 몸으로 윌을 토닥여 주었다. 그녀가 염려스레 부탁했다.
“나으리. 자르지는 말아 주세요. 더 일할 수 있습니다.”
마리에게 당분간 이 집에 머물러도 좋다고 하고 싶었다.
이곳이 에스타리온이었다면 그랬을 테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백작가의 아가씨가 아니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처지다.
에이든 경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당신은 오늘부로 해고야.”
“예, 예? 아이고, 나으리.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그렇다고 어린아이랑 다 죽어가는 늙은 노인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록 해.”
“에이든 경?”
그의 발언에 놀라 고개를 들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어도 살아 있는 꼬맹이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어. 일단 그건 내일부터 고민해 보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에이든 경은 피식 웃으며 윌의 머리를 쓸어주고는 방을 나왔다. 그를 쫓아 걸으며 물었다.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글쎄. 사실 나야 노예로 팔리는 것만 아니면 어딜 보내건 상관없단 주의라서. 의식주만 해결되면 천국 아닌가?”
저절로 에이든 경의 볼을 가로지른 흉터에 시선이 갔다.
늘 그의 흉터가 힘겨웠던 노예 시절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저 흉터에 어떤 사연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근데 이건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산 나 같은 놈이나 가지는 무식한 생각이고. 많이 배운 그대 생각이 중요할 것 같아.”
“그럼…….”
윌이란 아이가 맡겨질 집은 남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참견하는 건 지나친 오지랖이다.
그럴 권리도 없고 필요도 없는 일 아니던가.
“며칠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도록 하죠.”
“그래. 좋아. 그럼 그대는 식사부터 하도록 해. 난 좀 쉬러 가야겠거든.”
“네.”
에이든 경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곤 멀어져 갔다.
식사 전, 새로 온 고용인들에게 바삐 일을 배정해 주고 간단한 규칙과 체계를 설명했다.
순식간에 고용인들이 많아져서인지 소피는 감정표현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감격한 얼굴을 했다.
간단한 식사 후 사람을 시켜 윌을 씻기고 그 아이가 입을 만한 옷을 찾아낸 뒤 마리의 건강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러고 나자 늦은 밤이 되었다.
“하아…….”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겨울이었다.
매서운 바람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뒤척이다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어.’
에스타리온에서 일어난 일, 이단심문소에 간 것까지. 일련의 사건이 큰 충격이 된 모양이다.
밤엔 불안한 마음에 잠 못 이루고 새벽녘에 간신히 잠들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 깨기 일쑤다.
뻑뻑한 눈가를 꾹꾹 누른 채 일어나 촛불을 켰다.
‘이런.’
밤을 지새우며 읽을 책이 없다. 낮에 서재에 가져갔다가 그대로 놓고 온 듯하다.
촛대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차라리 어제처럼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꾸벅꾸벅 조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푹신한 슬리퍼에 발소리가 삼켜졌다. 끼익. 서재 문을 열자 소름 끼치는 경첩 소리가 들렸다.
“아.”
“…선생님?”
안에는 어제처럼 에이든 경이 와 있었다.
저녁 내내 검술 연습을 한 그는 피로하지도 않은지 램프 속 불빛의 의지해 책을 읽는 중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촛불을 끄고 더 환한 마법석을 켰다.
“이 시간까지 깨어 있었네.”
“그냥… 그렇게 됐어요.”
굳이 불면증이 있노라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 또한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밤늦게까지 공부 중이셨군요. 혹시 이해되지 않는 게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없고 그냥 재밌어서 읽는 거야.”
서재 한쪽에서 낮에 두고 온 책을 찾아 에이든 경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글을 모르던 시절엔 책이란 걸 종이에 잉크로 점 좀 찍은 것뿐이라 생각했어. 있어 봐야 뭐 얼마나 대단한 게 있겠나 싶었거든.”
“네. 그런데요?”
“그런데 글을 배우고 나니깐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렸어. 내가 접근할 수 없었던 세계인 거지.”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아직 제대로 가르친 것도 없는데 몹시 뿌듯해졌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색깔을 추측할 수 없듯이, 글을 알지 못하니 예상할 수가 없었던 거야. 모르는 단어는 많지만 재밌어.”
그가 내게 책 표지를 보여 주었다. 고대 영웅들의 모험에 관한 서적이었다.
“고마워. 선생님.”
웃는 에이든 경은 깜짝 선물을 받은 소년처럼 기뻐 보여 내 마음이 다 뜨거워질 정도였다.
볼가 흉터 주변 살이 당겨 약간의 주름이 졌지만 보기 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각 같은 외모에 특색이 더해져 보기 좋단 생각마저 들었다.
“아뇨. 아니에요. 경이 열심히 공부한 덕인걸요. 그리고 오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무얼?”
“마리요. 덕분에 제 마음도 편해졌어요.”
“나 좋을 대로 한 것뿐인데 뭘. 선생님은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에이든 경.”
나는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피다 운을 띄웠다.
전부터 얼굴에 난 흉터가 궁금했는데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이라 실례가 될까 염려되었다.
“편히 말했으면 해.”
“…음… 아녜요. 실례인 것 같아요.”
“말을 하려다 마는 게 더 실례되는 것 같은데. 궁금하거든.”
“음… 볼의 그 흉터 말예요… 물론 전쟁 중 난 거겠죠. 그냥, 그 이야기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어떤 전투 중에 난 건지…….”
“영광의 상처야. 소중한 사람을 구하다가 난 거거든.”
그리 말하는 에이든 경은 누가 봐도 추억을 더듬는 중이었다.
“그렇군요. 그 사람을 지켜 냈나요?”
그가 자랑스레 대답했다.
“그럼.”
새까만 눈이 반짝였다. 입꼬리가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갔고 자긍심일지 기쁨일지 모를 감정이 선명히 드러났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에이든 경이 몹시 좋아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저런 애정을 받다니… 누구인지 몰라도 조금 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