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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25화 (26/134)

<25>

“에이든 경. 여기까진 어쩐 일인가요?”

“선생님이 왜 빨래를 하고 있냐고 물었어. 선생님이 할 일은 이게 아닐 텐데.”

에이든 경의 목소리엔 분노가 스며 있었다. 두 눈은 어둡게 가라앉았고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빌어먹을.”

에이든 경이 들릴 락 말락 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소피가 눈치를 보며 나 대신 대답했다.

“제 잘못입니다. 죄송해요, 공작님.”

“제가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소피의 잘못이 아니에요.”

빨래를 하느라 물에 젖은 손을 털어낸 뒤 일어나 소피를 끌어당겼다.

소피를 내 뒤로 숨기자 에이든 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도 하고 싶었어요. 가만히 있는 건 적성에 안 맞아서요.”

“선생님은 내 공부를 담당하고 있잖아.”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할 게 없어서 무료하더라고요. 몸을 움직이고 싶기도 하고, 이렇게 도우면서 수다를 떨 수도 있어서 좋았어요.”

에이든 경에게 이런 변명을 하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가 심상찮아 소피가 혼날 게 자명해 보였다.

소피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쉬라고 조언하는 그녀를 조른 건 나니까.

“말동무가 필요하시면 사람을 부르…….”

그가 말끝을 흐렸다. 사람을 부르기에 이 저택에는 고용인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미천한 제자가 말동무가 되어드릴 테니 선생님은 방에서 푹 쉬어.”

“에이든 경이 말동무를요?”

스스로 말해 놓고도 쑥스러운지, 에이든 경의 얼굴에 붉은 기가 번져갔다.

“그보다 모르는 게 있어. 선생님이 와서 확인 좀 해 줘야 할 것 같아. 그러니 빨래는 거기 두고 들어가자.”

에이든 경이 몸을 휙 돌렸다. 소피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가 보세요. 빨래는 제가 할게요.”

“아, 으응.”

“얼른!”

에이든 경이 소리를 치고 앞서갔다. 그를 쫓아 서재로 오자마자 에이든 경이 물었다.

“보통 이만한 저택에는 사람이 몇 명이나 필요하지?”

“사람을 고용할 생각이세요?”

고작 반나절만에 마음의 결심이 선 걸까.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선생님이 소피를 도와 일을 할 정도면 일손이 부족하긴 한가보다 싶어서.”

후우.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시니컬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다 쓰러져가는 저택인데 뭣 하러 애지중지 관리하나 싶지만, 빌어먹을, 가정교사가 빨래를 하다니, 인정할 수밖에 없지. 젠장.”

“…아셨군요.”

“모르면 대가리… 아니.”

흥분한 그에게선 욕이 섞여 나왔다. 에이든 경은 눈을 질끈 감고는 말을 마무리했다.

“머리가 돌인 거겠지.”

“소피를 혼내지 말아 주세요. 제가 조른 거예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잖… 아냐. 내가 무슨 소리를.”

에이든 경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꼭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황궁에서 마주치기 전에 나를 본 적이 있던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지며 그에게 말했다.

“최소한 다섯 명은 더 뽑으셔야 할 거예요. 정원사도 필요하고, 저택 관리사와 하녀, 하인들이 필요해요.”

“그래? 선생님은 집안 관리를 많이 해 본 모양이야. 아, 비꼬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정말로 궁금해서.”

“에스타리온 백작가엔 안주인이 없었어요. 자연히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죠.”

“전반적인 일을 맡아서 했던 거야?”

“그런 셈이죠.”

“잘됐다. 그럼 앞으로 선생님이 이 저택의 기틀을 다져 줘.”

“네?”

생각지 못 한 부탁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에이든 경이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빨래를 하는 것보다야 하던 대로 서류 작업을 하고 사람 관리를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전 그저 가정교사일 뿐인데… 물론 하기 싫단 건 아니에요. 에이든 경을 가르치는 것 말고도 집중할 거리를 찾고 있으니까요.”

“나를 가르치는 걸 끝내고 이곳을 떠날 때 집안 관리도 가르쳐 주고 가. 어차피 집사를 구하긴 할 거지만 기본적인 건 나도 알아야 하잖아.”

“…….”

“그렇게 보면 이것도 가정교사가 할 일인 것 같네. 사람을 부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이 큰 저택을 꾸려가는 것 말야.”

에이든 경은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레 눈을 접었다.

말투는 투박한데 웃음은 짓궂은 소년 같다.

곱게 접히는 눈매가 천진해 보이기까지 해 얼떨떨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집안 운영은 선생님이 하고픈 대로 해. 사람을 구하든, 사용인들을 데리고 집을 불태우든 어쩌든 간에 모두 맡길게.”

“집을 불태우는 일은 없을 거예요.”

“말이 그렇단 거지.”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믿음에 보답하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

“열심히 안 해도 되니까 무리하지만 마. 나는 선생님이.”

에이든 경이 내게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의 새까만 눈이 한 걸음만큼 가까워졌다.

볼가에 난 흉터도 선명히 보였고, 희미하게나마 그의 숨결도 느껴졌다.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얼른 건강해지면 좋겠어. 그렇게 비리비리해서 어째.”

“건강해질 거예요. 잘 먹고 잘 자고 있는걸요.”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에게 이만한 진심을 보이는게 유난스러웠지만 나쁘진 않았다.

내가 쓸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렇게 걱정하는 것일지라도, 누군가 나를 신경 쓰는 건 오랜만이라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눈이 쌓인 들판에서 조그만 불씨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럼 선생님은 들어가서 쉬도록 해. 빨래는 소피에게 맡기고.”

가벼운 말투와 달리 새까만 눈은 진지하게 권고하고 있었다.

숨이 막히도록 밀도 높은 시선이었다.

눈앞의 동물을 가뿐히 사냥해 낼 능력이 있는 짐승이 가지는, 여유만만한 시선 말이다.

“아… 그럴…게요.”

“좋아. 난 오늘 수업 내용을 복습해야 해서.”

에이든 경이 나를 지나쳐갔다. 그가 곁을 스칠 때 희미하게 특유의 체취가 느껴졌다.

발소리가 사라지고, 체취가 공기 중에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휴식을 취하는 걸로 저렇게 진지할 수가 있다니.’

후우. 한숨을 푹 내쉬는 찰나 막 빨래를 널고 들어오던 소피가 보였다.

사람을 구하게 되었단 말을 들으면 소피가 몹시 기뻐할 테다.

얼른 그녀에게로 가서 불쑥 말을 걸었다.

“소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말을 꺼낸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생기 있는 목소리가 나왔다. 소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력사무소에 가서 집사와 하녀와 하인 각 두 명, 정원사 한 명을 구한다고 해. 당장.”

소피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요? 정말이죠?”

“정말이야. 어서 가 봐.”

“맙소사. 아가씨가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대체 어떻게 설득하신 건가요?”

무어라 답하기 애매해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이 저택은 완전히 변모하게 될 거야.”

칼립소 공작가의 가정교사에겐 특별한 자질이 있거든.

* * *

응접실에 자리 잡은 에이든 경의 자세는 삐딱하기 그지없었다.

가슴께에 팔짱을 낀 채 다리는 한껏 꼬았고 얼굴엔 면접이 귀찮단 기색이 역력했다.

“소피. 한 사람씩 응접실로 데리고 와.”

“네.”

“하아암.”

“에이든 경. 저 혼자 할 수도 있어요.”

“내가 아무리 집안 살림에 관심이 없어도 기본적인 것조차 나 몰라라 할 정도는 아냐.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사람 정도는 직접 보고 뽑고 싶어.”

“그래요. 그럼.”

“…그리고 선생님을 못 믿는다는 것도 아냐.”

“네.”

“믿어. 믿는데… 일꾼도 면접을 보러 오잖아. 여자 혼자 있으면 무시하기 딱 좋거든.”

힐끔, 옆에 앉은 그를 확인했다.

에이든 경은 꼿꼿하게 앞만 응시한 채 내 시선을 모르는 척했다.

그의 투박한 다정함이 따뜻했다.

하긴. 그런 사람이니 이런 처지가 된 내게 잘해 주는 걸 테다.

“정원사와 일꾼 두세 명, 주방 하녀를 비롯해서-.”

에이든 경이 내 말을 끊고 얘기했다.

“선생님의 담당 하녀는 필요 없어?”

“전 괜찮아요. 가정교사에겐 하녀가 필요 없어요.”

“그래도 원한다면 담당 하녀를 뽑아도 좋아.”

“말씀만 감사히 받을게요.”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하녀 직에 지원한 여성이 들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간단한 사항을 물었다.

비슷한 일을 한 경험이 있는지, 저택의 엄격한 규칙을 따를 수 있는지 등.

질문과 정보가 오갈수록 에이든 경의 자세는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경은 베키 씨에게 궁금하신 점이 없으신가요?”

“없어. 그대가 알아서 해.”

꼰 다리를 풀고 팔을 받쳐 얼굴을 감싼 그는 이 상황이 지루하단 걸 숨기지 못 했다.

“생각보다 지원자가 적네. 수도에선 사람을 구하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워?”

“네. 수도는 항상 사람이 부족해요.”

“그런 건 시골에나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거짓말이다.

수도에 부족한 건 일자리지 사람이 아니다.

칼립소 공작가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공고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지원자가 이렇게 적단 건, 노예 출신 아래에서 일하기 싫다는 노골적인 차별이었다.

‘이게 수도의 민심이란 거겠지.’

제아무리 전쟁 영웅이라 한들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에서 보는 건 다르다.

‘하긴. 작위를 준 것만 봐도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긴 해.’

보통 전쟁 영웅에겐 기사 작위를 준다.

그런 에이든 경에게 공작위를 준 건 이번 전쟁이 그만큼 중요했으며, 승리하기가 아주 어려웠다는 의미다.

‘그리고 노예 제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겠지.”

에이든 경의 신분을 파격적으로 상승시켜 주며, 봐라, 너희도 노력하면 언제든 귀족이 될 수 있다며 노예해방운동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베키와 알베르, 에바란 애들은 괜찮았던 것 같아. 선생님 생각은 어때?”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그 세 명은 합격시키도록 할게요.”

“좋아.”

마침 문이 열리더니 정원사로 지원한 이가 들어왔다.

다리를 저는 모습에 에이든 경이 외쳤다.

“절름발이는 안 돼. 사다리 위에서 작업을 하다가 떨어지면 크게 다치는 수가 있잖아.”

초장에 선을 긋는 에이든 경의 태도에 남자, 한스가 부탁했다.

“시골에 있는 고향에서 23년간 정원을 관리했습니다. 그 집 나으리께선 늘 저를 신뢰하셨죠. 잘할 수 있습니다.”

에이든 경이 나를 바라보자 한스도 이쪽을 확인했다.

한스의 간절한 눈길이 무거웠다.

“…지금까지 지원한 분들 중 가장 경력이 좋아요. 23년이나 함께하는 건 아주 흔치 않은 일이거든요.”

“선생님은 기회를 주고 싶은가 보군.”

“전 성실한 분들이 좋아요. 그리고 에이든 경이 그런 이들과 오랫동안 함께하면 좋겠어요.”

몸이 불편한 건 별반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이냐지.

“그리고 한스 씨의 이전 고용 주인인 케넬 씨의 추천장이 너무 좋아요.”

“그래, 그럼. 이름이 한스라고 했나?”

“예, 예!”

“내일부터 출근해. 급료는 여기, 내 선생님과 얘기하도록 하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나으리!”

한스는 몇 번이고 감사하다 인사한 뒤 소피에게 끌려나가다시피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다 도와주니 좀 걱정되네.”

“무슨… 뜻인가요?”

“이렇게 구석구석, 스승의 은혜로 길들여 놓아서야 나중에 스승님 없이 어떻게 사나 몰라.”

그의 말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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