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로지? 로지, 너니?”
보통 악몽을 꿀 때 나를 흔들어 깨우던 이가 로지였다.
그래서 여기가 에스타리온 백작가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로지를 찾았다.
하지만 되돌아온 목소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야. 선생님.”
“…에이든 경?”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멀어졌다. 어둠 속에서 걱정 가득한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아? 비명을 지르던데.”
“아…….”
제법 소리를 지른 모양인지 목이 따끔따끔했다.
무어라 말하려는 때에 에이든 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물부터 마시는 게 좋겠네. 선생님 지금 엄청 떨고 있어.”
그의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염려가 느껴졌다. 에이든 경이 램프를 밝혔다.
일렁이는 불꽃이 에이든 경이 물을 뜨는 모습을 보여 줬다.
“마시고 진정해.”
“고, 고마워요.”
찬물이 속에 들어가자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떨림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
가슴은 끊임없이 불안했고 호흡은 거칠었다.
‘무슨 꿈을 꿨지?’
무언가 아주 잔인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꼬리잡기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쓰자 도리어 머리가 아파 왔다.
“아무것도 떠올리지 마.”
“…네?”
에이든 경이 흔들리는 불꽃 위로 손가락을 비춰보며 말을 툭 던졌다.
“악몽. 굳이 떠올리려 하지 말라고. 악몽은 악몽이지 그 안에 대단한 뜻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 인상 펴.”
“아…….”
“비명을 지르면서 헛소리를 하더라고. 그딴 꿈, 기억해서 뭐 해.”
“제가 뭐라고 하던가요?”
에이든 경은 침묵을 고수했다.
입을 다문 그는 불빛이 만들어 낸 그늘 때문인지 많이 피로해 보였다. 정확히 말해 조금 슬퍼 보였다.
악몽을 꾼 건 나인데 에이든 경이 슬퍼하는 건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악몽의 후유증으로 스스로가 착각했겠거니 여기며 그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깨셨을 텐데 가서 마저 주무세요.”
“아냐. 선생님이 잠드는 거 보고 갈게.”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지금 안색이 엄청 안 좋은 거 알아? 나를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버려두고 잠이나 자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지 말고 그냥 눕기나 해.”
그리 말한 에이든 경은 침대 옆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자세는 건들건들했지만 착 가라앉은 눈빛은 진중했다.
“우리 귀한 선생님한테 자장가라도 불러주고 싶은데 내가 아는 자장가가 없네. 제자가 무식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안 괜찮아 보여서.”
“죄송해요. 걱정을 끼쳐서.”
“아냐. 미안할 건 아니고. …선생님이 건강하면 좋겠어.”
“수업엔 지장이 없을 거예요. 염려 마세요.”
내 말에 에이든 경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가 가슴팍에 팔짱을 끼고 비뚜름한 고개를 했다. 그러고선 퉁명스레 투덜거렸다.
“내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인 줄 알아? 지금 수업이 중요한 건 아니지. 물론 수업도 중요하지만 선생님 건강이 더 중요한 거 아니겠어?”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작 악몽인데 이렇게까지 이쪽을 배려해 주니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웠다.
“그럼 이제 자. 악몽도 비명도 없이, 푹 자.”
에이든 경이 램프 불을 끄자 한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아직 익숙치 않은 이가 곁에 머물러서 긴장이 들 법도 한데 눈앞이 깜깜해지자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에이든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자.”
나직한 그 음성은 꿈이었을까, 실제였을까.
수렁과 같은 수마 속에서도 그 인사가 실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 * *
“아가씨. 몸은 괜찮으세요?”
“아, 응. 괜찮으니 염려 마렴.”
소피는 아침부터 몸을 걱정했다.
혹여 소피도 지난밤에 내 비명소리를 듣진 않았을까 싶어 그녀의 기색을 찬찬히 살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어제 나 때문에 자다가 깨진 않았어?”
“아가씨 때문에요?”
소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방 근처에서 자면 나 때문에 자다 깨는 일이 종종 생길 거야. 주기적으로 악몽을 꾸거든. 그러니 되도록 먼 곳에 방을 잡도록 해.”
“악몽이요?”
“밤 중에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데 으레 있는 일이니 너무 놀랄 필요 없어.”
“그래서 공작님께서…….”
“공작님?”
“아침 일찍 제게 숙면을 돕는 차를 사 두라고 명령하셨거든요.”
말투는 퉁명스러우면서 뒤에서 마음을 써 주는 게 고마웠다.
지난밤 잠을 깨운 것에 대한 사과와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에이든 경은 어디 계시니?”
“공작님께선 정원 나무를 가지치기하고 계세요.”
“가지치기?”
“네. 공작님께선 어지간해선 사람을 고용하지 않으려 하세요. 저택이 조금 엉망이라도 그런대로 사실 생각이신가 봐요. 아니면 직접 손질을 하시든가.”
그간 받은 스트레스가 큰지 지친 소피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내게 한탄을 해 보였다.
“원체 집이 넓으니 아무리 쓸고 닦아도 티가 나질 않아요. 저 혼자 이 큰 저택을 책임지는 게 말이 되나요?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 큰 저택에 너와 주방의 마리밖에 없어서 이래저래 힘들겠어. 고생이 많아.”
소피의 팔을 토닥여 주자 그녀는 울컥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잖아도 공작님께 사람을 더 구하는 걸 두고 건의해 볼 생각이야. 조금만 기다려 봐.”
“부탁드릴게요. 잘 좀 얘기해 주세요.”
“너무 염려하지 마.”
남의 집 살림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못 할 짓이지만, 에이든 경의 목표는 수도 귀족 사회에 진출하는 거였다.
그러니 앞으로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많을 테다.
그때 가서 부랴부랴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야 미리 사람을 구하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수업 준비를 마친 뒤 서재에 가자 에이든 경이 먼저 와 있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대충 때웠어. 선생님은?”
“맛있게 먹었죠. 책을 읽고 계셨네요.”
“어린이용 책이야.”
에이든 경이 책장을 펄럭여 빠르게 안을 보여 주었다.
그는 어린이용 서적을 읽는다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모르는 게 당연한 것이며 이렇게 노력하는 자체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나는 에이든 경의 그런 면이 진심으로 멋지다 생각했다.
“잘하셨어요.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마침 모르는 단어가 있는데.”
“뭔가요?”
“몽상가가 뭐지?”
몽상가는 그리 어려운 단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에이든 경이 그 단어를 모르는 건, 몽상가라는 단어가 실생활에서 쓸 일이 없어서 익힐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을 못 읽는다는 건 그런 거다.
교육을 박탈당하고 알 법한 것들을 모를 수밖에 없는 것.
“헛된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을 말해요.”
“헛된 생각?”
“네. 헛된 생각.”
“그렇다면 나도 몽상가군.”
“에이든 경이요? 상상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에이든 경은 비밀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에 작은 나뭇잎 조각이 붙어 있는 걸 확인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나뭇잎 조각을 슬쩍 떼어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을 쫓았다.
“조경을 배운 적 있으세요?”
“아침에 정원에서 일한 걸 들었구나? 그냥 황궁 정원에서 본 걸 눈대중으로 흉내 낸 거야.”
“저택을 관리하시는 게 좋을 듯해요.”
“그것도 수업 내용이야?”
“귀족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선 그들을 흉내 내셔야 해요. 더 많은 사용인을 부리셔야 해요.”
“그렇긴하지. 근데 좀…….”
조금? 의문을 갖기가 무섭게 에이든 경이 답변해 주었다.
“사람을 부리는 게 어색해서. 아니다. 불편하다는 게 맞겠네.”
“익숙해지셔야 해요.”
“노예였잖아. 부려지는 느낌을 알아서 그런지 그게 싫더라고. 내가 감히 그래도 될까 싶고.”
에이든 경은 놀랍도록 솔직했다.
스스럼없는 고백에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마리나 소피를 고용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거든. 병 든 마리를 고용해 줄 사람이 어딨겠어. 소피도 뭐… 비슷하고.”
“시간이 필요하시군요.”
“그런 셈이지. 수업이나 하자.”
시간을 갖다 보면 익숙해질 일이라 에이든 경과 수업을 시작했다.
다만 소피가 슬퍼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편하진 않은 수업이었다.
* * *
“소피. 내 옷은 내가 빨 테니 빨래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어?”
“네에?”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내 하녀였던 로지와 달리 소피는 꽤 덤덤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가 빨래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처음으로 정색을 해 보였다.
“공작님께서 사람을 안 구해 주신다 해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냐. 난 더 이상 백작가의 아가씨가 아닌걸. 이 삶에 적응해야지.”
“아가씨…….”
내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친딸이건 아니건 나는 그들을 버렸다. 다시 백작가의 여식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을 테다.
그러니 귀족 영애가 아닌 셀레나로의 새 인생에 익숙해져야 한다.
‘물론 언제까지나 가정교사로 지내진 않겠지만.’
성공해서 백작가 못잖게 떵떵거릴 자신이 있지만, 당장 아무것도 아닌데 무어라도 되는 양 굴 수는 없다.
“빨래도 하고 시간이 나면 소피, 널 도와서 이런저런 일을 배우고 싶어.”
“아가씨께서 그런 걸 배워서 뭐 하신다구요. 제가 다 해드릴 테니 제발 편히 쉬세요.”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어.”
시간이 나면 그들이 떠오른다. 나를 잔혹하게 버린 한때 가족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그리고 이단심문소에서 고초를 겪었던 경험이 속을 들쑤신다.
‘너무 힘들었던지 중간중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감정은 선명하게 기억나.’
그곳에서의 슬픔, 차라리 죽었으면 했던 고통과 설움, 괴로움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피어올라서 열중해서 매진할 일이 필요했다.
“해야 해. 하고 싶으니까 날 좀 도와줘.”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럼 간단한 것만 하세요. 제발요. 네?”
“그럴게.”
그렇게 소피를 따라서 저택 근처의 빨래터로 갔다.
그곳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소피가 빨래를 하는 걸 살펴봤다.
옷에 물을 묻히고, 조물조물 문질러 때를 빼는 모습이 능숙해 보였다.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서 소피를 따라 빨래를 시작해 보였다. 하지만…….
“아가씨. 처음엔 다 그래요.”
소피가 웃음을 참았다. 빨래를 하는 내 손길이 서툴러도 너무 서툴렀기 때문이다.
“이게, 다 이런 건 아니지……?”
빨래를 하려다가 얼굴에 물을 뒤집어쓴 건 힘 조절을 잘못해서다.
민망함에 얼굴을 붉힌 채 다시 서툴게 빨래를 이어나가려던 참이었다.
“선생님?”
뒤에서 에이든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적잖게 당황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에이든 경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고, 공작님.”
소피가 조금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에이든 경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왜 선생님께서 빨래를 하고 계시지?”
그냥 빨래일 뿐인데, 그의 얼굴은 못 할 일을 하는 걸 본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