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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22화 (23/134)

<22>

에이든 경이 얼굴을 붉힐 줄은 몰랐다.

그 반응에 뒤늦게야 내가 그의 손을 만지고 있단 걸 깨달았다.

얼른 에이든 경에게서 손을 떼고 사과했다.

“죄송해요. 주의할게요.”

“…아냐. 괜찮아. 깃펜 쥐는 법 정도는 제대로 배우고 싶어.”

되묻는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낮아져 있었다.

내가 아이처럼 가르친 게 기분이 상한 걸까.

힐끔 그의 눈치를 보았다. 에이든 경의 눈이 짙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내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제 손을 감쌌던 내 손이었다.

불쾌감을 선물했다는 생각에 손끝을 오므렸다. 그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랐다.

“…….”

묘하게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조금 불편한 것도 같았고 한편으로는 머쓱하기도 했다.

먼저 얘기를 꺼낸 건 에이든 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이름을 쓰는 법도 몰라. 가르쳐 줬으면 좋겠는데.”

“제 이름을요?”

“선생님 이름 정도는 쓸 줄 알아야지.”

“영광이에요. 제 이름은-.”

말을 이으려는 찰나 쾅 하고 벼락이 치는 듯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이든 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급작스런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듯 말이다.

“빌어먹을! 어떤 새끼야!”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순간이 되자 평소 정중하게 굴려고 노력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상스런 욕이 나왔다.

눈빛은 사포처럼 사나웠고 욕을 내뱉는 목소리나 말투는 조금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모습에 놀랄 새가 없었다.

“헙.”

허억. 허억.

숨이 쿵 하고 막혔다. 이단심문소에서 철문이 쾅쾅 닫히던 소리와 비슷하게 느껴져서다.

‘괜찮아. 여긴 이단심문소가 아니야. 진정해. 진정하는 거야.’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었고, 에이든 경은 밖을 확인하겠다며 뛰쳐나갔다.

이단심문관에게 당했던 고문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가슴이 벌벌 떨렸다.

곧 밖에서 요란한 말소리가 들렸다. 소피와 에이든 경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그들의 음성이 저택 밖에서 들려오는 터라 창가로 가서 확인했다.

“하아. 하아.”

아까 그 소리는 담벼락이 무너지며 난 소리였다.

‘세상에.’

담벼락이 무너진 건 처음 보았다.

어지간히 저택 관리를 소홀히하지 않는 이상 담벼락이 무너지는 일은 잘 없을 텐데…….

황실이 최소한의 관리도 안 된 저택을 선물한 걸 보니 그들이 에이든 경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상황을 파악하려 에이든 경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길 내내 엉망진창인 저택 상태를 보니 눈앞이 아연해졌다.

구국의 영웅인 만큼 금전적 문제 때문에 방치할 리도 없고, 전쟁이 끝난 지 몇 년씩 지난 만큼 시간적 문제도 아닐 테다. 그런데 지금 저택 상태는…….

‘버려진 집에 얹혀사는 것 같아.’

밖으로 나오자 에이든 경과 소피가 무너진 담벼락을 확인하며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살다 살다 이게 무너지는 것도 다 보네. 이걸 복구하려면 또 사람을 써야 하잖아.”

“이대로 두실 건가요?”

“담벼락이 없는 저택도 많은데 없이 살지 뭐.”

소피와 담벼락에 대해 얘기하는 에이든 경은 내게 말할 때보다 훨씬 껄렁한 말투를 구사했다.

“하지만 안전의 문제도 있거니와 이렇게 두는 건 미관상으로도 그리 좋지 않은 듯해요.”

“이 거지소굴 같은 집에 훔쳐 갈 게 뭐 있다고. 담벼락이 무너진 게 흉한 거라면 이참에 싹 밀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고.”

거친 대답에 소피는 할 말을 잃은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큼. 흠.”

기척을 내자 에이든 경이 깜짝 놀라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를 확인한 그는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별일 아니니 선생님은 염려할 필요 없어.”

소피에게 말할 때와 달리 꽤 힘을 준 말투였다.

“인부를 부르시는 것보단 하인을 들이는 게 나아 보여요.”

철이 들 때쯤부터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안주인 노릇을 해 왔다.

에스타리온 백작은 바깥일만으로도 바빴고 집사는 노쇠했으며 시온은 후계자 수업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바람이 차니 들어가세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잖아요.”

소피가 나를 보곤 질색해서 안으로 이끌었다.

에이든 경에게서 멀어지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지금은 이래도 봄이 되면 훨씬 나을 거예요. 기본적으로 근사한 저택이잖아요.”

“다른 고용인을 본 적이 없는데 하녀가 너뿐인 거니?”

“공작님께선 저택을 관리하는 것에 무심하세요.”

“…그동안 혼자 고생이 많았어.”

내 말에 소피가 멈칫거리더니 걸음을 멈췄다.

눈을 커다랗게 뜬 소피가 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라고는 말을 못 하겠어요. 대체 왜 고용인을 들이는 일에 소극적인지 모르겠어요.”

“혼자 청소와 빨래를 다 하는 거야? 이 큰 집에서 힘들 텐데.”

“마리라고 주방일을 하는 하녀는 따로 있긴 한데… 일이 쉽지는 않죠. 그보다 걷는 게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미묘하게 발목을 절뚝거리시던데.”

“동상에 걸려서 그런 거야. 곧 나아지겠지.”

하아. 입김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픽,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단심문소에 있을 땐 저 입김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그땐 이렇게 살아나올 줄 몰랐는데.

“아가씨. 바로 식당으로 가세요. 저녁 준비가 다 끝났을 시간이에요.”

“그래.”

여태 몸이 아파 방에서 묽은 수프만 마셨지만 오늘부터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식당엔 이미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뒤따라온 에이든 경이 급히 의자를 빼주었다.

그에게선 우아함보다는 조급함이 엿보였다. 그가 머쓱하게 내 맞은편에 앉았다.

“부지런히 먹어서 그대의 안색이 더 좋아지면 좋겠어.”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에이든 경이 픽 웃으며 이어 말했다.

“선생님이 건강하길 바라는 제자의 절절한 마음이라고 해 두지.”

“…그래요. 그러고 보니 에이든 경과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이네요.”

“큼. 흠. 그렇군.”

에이든 경은 힐끔 내 눈치를 보다 포크를 쥐었다. 그는 식사 예절에 대해서도 몰랐다.

“포크와 나이프는 가장 바깥쪽 것부터 쓰고 나이프 날은 안을 향하도록 해야 해요. 그리고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려서는 안 돼요.”

내 말에 에이든 경은 조심스레 팔꿈치를 떼었다.

접시에 놓인 식사 거리를 확인한 뒤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새우를 먹을 땐 나이프로 껍질을 벗기셔야 해요. 포크로는 머리 부분을 누르고요. 이렇게요.”

익숙하게 새우 껍질을 벗겼다. 에이든 경은 내 손을 훔쳐보며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

검을 쓰던 사람이라서일까. 조금 어설퍼 보이긴 했지만 새우를 아주 깔끔하게 깠다.

“네. 맞아요.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물은 항상 오른쪽에, 빵은 왼쪽에 두는 걸 잊지 마세요. 고기와 생선을 드시는 법은 후에 말씀드릴게요. 식사 순서는…….”

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당장 식사 자리에서 자세히 익히기엔 음식이 체계 없이 나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에이든 경은 내가 쏟아내는 정보를 유심히 들었다.

그러면서도 새우 껍질을 벗기는 건 멈추질 않았다.

“그만하면 됐어.”

에이든 경이 내 말을 잘랐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내게 피식 웃어 보였다.

“일단은 식사부터 하자고. 설명하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아…….”

“스승님은 이거 먹고, 그 접시는 나 줬으면 하는데.”

에이든 경이 내 앞의 접시를 가져간 뒤 제 접시를 주었다.

그의 접시 위엔 새우 껍질이 모두 까져 있었다.

“이건 받을 수 없어요.”

“부담스럽나?”

“아뇨. 그게 아니라.”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새우 알레르기는 내 출생을 증명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괜스레 그때의 감정이 재현되어 가슴이 쓰라렸다.

그리고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새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려고 했다.

“친절은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새우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알레르기?”

에이든 경이 이해할 수 없단 듯 되물었다. 그의 미간이 주름졌다.

“네.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을 수가 없어요.”

“알레르기가 있다고?”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처럼 에이든 경도 알레르기가 있단 내 말을 의심하는 걸까?

나를 신뢰치 못해 의심과 혼란을 오가던 그 얼굴들을 기억한다.

세찬 불안 속에 나를 믿어 달라 가슴 깊이 애원했다.

가슴 깊이서부터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이든 경 앞에서 울 수는 없다.

“새우를 못 먹는다니 주방에 주의하라고 일러둬야겠군. 그나저나 괜찮은가?”

“네. 괜찮아요.”

이 짧은 대답이 왜 이리도 힘든지. 숨을 씩씩 내쉬며 간신히 감정을 진정시켰다.

에이든 경의 염려 섞인 시선을 피하며 구운 연어의 살을 발랐다.

잘그락. 잘그락.

태연한 척하려 해도 복잡한 감정은 도무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손이 잘게 떨려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며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죄송해요.”

결국엔 식기를 내려놓았다.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가 쉬겠습니다.”

“몸이? 소피를 부르-.”

“아뇨. 너무 염려치 않으셔도 돼요. 머리가 아파서… 식사는 다음에 같이 해요.”

에이든 경의 말을 자르곤 도망치듯 식당을 벗어났다.

와중에 온전치 않아 절뚝거리게 되는 걸음이 비참했다.

복도의 찬 공기보다 마음이 더 시렸다. 기거하는 손님방에 들어서자마자 저절로 눈물이 툭툭 흘렀다.

‘바보 같아.’

그들도 나를 버렸고 나도 그들을 버렸는데 이렇게 복받치는 건 그만큼 상처가 깊어서일 테다.

‘억울해.’

이단심문소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할 정도로 고생했던 것도, 갖은 누명을 써서 차디찬 냉대를 받았던 것도 다.

“흐으으으.”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입술이 붓고 턱이 덜덜 떨렸다.

내가 다시 사람을 사랑하고 믿게 될 날이 올까. 가족과 친구에게 버림받았는데?

‘사람 같은 건 없어도 돼. 혼자서 잘 사는 사람이 될 거야.’

이를 악물고선 얼굴을 정리했다.

이제 하늘 아래 믿을 건 나 자신뿐이다. 그러니 잘 먹고 잘 자서 몸을 회복해야 했다.

‘억지로라도 먹자.’

먹고 몸이 나아지면 에이든 경의 공부와 복수 계획을 짜는 건 병행할 수 있을 테다.

식사 시간이 끝난 터라 주방에 들러 간단한 요깃거리를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주방에 들른 내 눈에 보이는 건…….

“지금 뭘 하는 거지?”

나는 도둑질을 하는 하녀에게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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