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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21화 (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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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가정교사의 자질

“빌어먹을 이네트! 어서 처먹으란 말이다!”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한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쾅!

식탁 다리를 차며 나는 둔탁한 소리가 공포스러웠다. 두려움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입 안으로 툭툭 흘러 들어오는 눈물이 짭쪼름했다.

코를 훔치며 우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우는 소리를 냈다간 또 때릴 거야.’

옷 소매를 길게 늘어트려 눈가를 비볐다. 그리고 대꾸했다.

“죄송해요. 엄마.”

엄마.

그 여자는 엄마였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인 모녀 관계가 아니었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게 없다니까!”

엄마는 불만스러운 게 많았다. 그녀는 세상을 미워했고 제 처지를 한탄했으며 나를 증오했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미워할 수 있는지,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배웠다.

“흡.”

억지로 묽은 수프를 떴다. 수프는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 만든 쓰레기에 가까웠다.

역한 맛에 토악질이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얼른 엄마의 눈치를 봤다.

그녀의 심술궂은 얼굴에 일말의 만족감 같은 게 스쳤다.

“우웩!”

결국 수프를 마시다가 헛구역질을 했다.

엄마의 눈치를 볼 새도 없이 뒷통수를 얻어맞아 그릇에 이마가 처박혔다.

“음식 귀한 줄 모르다니, 정말이지 구제불능이로구나! 얼른 가서 얼굴이나 닦아라!”

엄마는 나를 일으켜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반쯤은 질질 끌려가는 거였지만 비위 상하는 수프를 마시는 것보다 더 나았다. 얼굴을 닦으며 생각했다.

‘언제까지 엄마와 지내야 하는 걸까.’

벗어나고 싶었고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때 밖에서 문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엄마의 말소리가 울렸다.

“시에나. 어딜 갔다 오는 거냐?”

아. 시에나가 왔다. 나는 단박에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눈이 떠졌다.

“하아. 하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진통제를 찾아 협탁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협탁이 있을 리 만무하다.

‘맞아.’

여긴 내가 살던 에스타리온 백작가가 아니었다. 이곳은 칼립소 공작의 집이었다.

끔찍한 두통에 머리를 감싸곤 고통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꿈을 꾸고 나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무슨 꿈인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 기분 나쁜 꿈을 꾸는 건 확실한데 막상 깨고 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체 어떤 꿈이길래…….’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 있는 걸까.

무슨 이유로 기억을 잃었는지 몰라도 매번 이렇게 힘든 걸 볼 때 아주 끔찍한 꿈인 듯하다.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막 방에 들어온 소피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침 식사와 약이 들려 있었다.

“두통이야. 약. 약부터 주겠어?”

“여기 있어요.”

소피가 건네준 약을 먹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두통이 잦아들었다. 그러자 숨통이 좀 트였다.

“하아…….”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가끔 있는 일이야. 괜찮아.”

소피는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대충 아침을 해결한 뒤 몸을 깨끗이 했다.

“좀 더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언제까지 침대에 누워 있을 수만은 없잖니. 그리고 공작님 배려 덕분에 충분히 회복했어.”

이단심문소에서 나온 뒤에도 불시에 열이 끓고 밤에는 헛소리를 하는 일이 있었다.

몸에 누적된 피로나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칼립소 공작은 그런 부분을 알면서도 나를 도와주었다.

단지 내게 얻어 낼 점이 있어 그렇다기에는 그의 친절은 극진한 면이 있었다.

‘고마운 만큼 열심히 가르쳐서 갚자.’

곧 첫 수업이 시작할 때였다. 수업은 서재에서 하기로 했다.

서재 위치를 몰라 소피가 길을 안내해 주었다.

공작 저에 온 뒤로 줄곧 앓아눕느라 손님방 이외엔 들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직접 저택을 돌아다니니 이제껏 보지 못한 면이 보였다.

‘아주 침체되어 있어.’

장례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축 가라앉은 분위기에 환경도 아주 나빴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가득했고 나무 바닥은 군데군데가 썩어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유리창부터 풀이 무성한 정원까지, 이 저택엔 무엇 하나 제대로 관리된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고용인을 본 적이 없어.’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만난 사람이라곤 에이든 경과 소피가 전부였다.

황실에서 에이든 경에게 저택을 하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럴 테다.

다만 고용인이 몇 없어서 소피에게 업무가 가중된 건 아닐까 염려되었다. 에이든 경도 여러모로 불편할 게 많을 테고.

‘하지만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야. 월권이지.’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안주인 노릇을 하던 습관이 사라지지 않아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방안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딴생각을 하는 사이 서재에 도착했다.

에이든 경의 저택은 본래 다른 귀족의 집이었다가 대가 끊기며 황실에 귀속되었다.

황실은 저택 관리에 많은 돈이 드니 에이든 경에게 하사한답시고 떠맡긴 것으로 안다.

소유권이 유서 깊은 귀족가와 황실을 거쳐서 그런지 서재엔 아주 오래된 책이 많았다.

사람이 살며 관리가 되었다면 버려졌을 서적도 제법 보였다.

‘에이든 경의 수준에는 많이 힘들겠는데.’

다행이라면 에이든 경은 당장 책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주말에 번화가 서점에 가서 책을 사 와야겠다고 마음먹을 무렵 에이든 경이 나타났다.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한 그가 여유를 가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일찍 오셨네요?”

“그러는 선생님이야말로.”

에이든 경은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손에는 수업 전 미리 언질을 줬던 대로 빈 노트와 깃펜, 잉크가 들려 있었다.

그가 어색하게 노트를 펴고 깃펜을 쥐었다. 그리고는 노트에 몇몇 글자를 써 보였다.

“이게 에, 이. 으. 맞지?”

에이든 경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쓴 것을 확인했다.

“에이든 경의 이는 앞에 모음만 왔기 때문에 이 발음이 난 거예요. 원래 이 발음을 하는 건 이거예요.”

내 깃펜을 꺼내서 노트에 철자를 적어 보였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드릴게요. 모음은…….”

그렇게 하나하나 설명을 시작했다. 에이든 경과의 첫 수업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맞아요. 대체로 앞뒤 자음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죠. 그럼 다시금 복습해 볼게요.”

“내가 읽어볼게. 이건 차료. 아니, 치료? 그래, 치료야.”

“네. 맞아요. 치료예요.”

더듬더듬 단어를 읽어나가며 읽기 연습을 하길 수 분. 시계의 시침이 바뀌자 에이든 경이 피로한 얼굴로 깃펜을 툭 내려놓았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 십 분만 쉬고 하자.”

“그래요.”

에이든 경은 벌러덩 눕다시피 의자에 몸을 뉘였다.

공부가 익숙치 않은 터라 가만히 앉아 집중하는 게 어지간히 힘든 듯했다.

에이든 경은 습관적으로 팔짱을 꼈고 나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피로해 보여. 잠을 잘 못 자나?”

“조금요.”

“불면의 밤이라… 우리 선생님은 생각보다 예민한 분이었군. 하긴, 그런 일을 겪었으니 당연하겠지.

“…….”

“집안일을 꺼내는 게 불편해?”

“네. 불편해요.”

“그럼 앞으로 그 얘기는 꺼내지 않을게.”

“일부러 배려할 필요는 없어요.”

“피하진 않겠다?”

“제가 가문에서 파면되고 가계도에서 지워진 건 수도에 파다하게 퍼진걸요. 그 속사정이야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 속사정이 뭐지?”

빙그레 웃는 미소가 능글맞다. 고이 접히는 눈매와 보조개처럼 파이는 볼가 흐릿한 흉터는 짓궂고.

‘어디까지 아는 걸까?’

내가 이단심문소에 들어간 걸 알았다.

황태자 전하는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끈이 있고, 아멜리아는 나와 친구 사이여서 알아냈을 테다.

그런데 에이든 경은 어느 쪽도 아닌데 내가 나오는 날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어디까지 아는 거지?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주시하고 있던 걸까? 왜?’

거친 야생의 삶이 그대로 묻어난 표정을 샅샅이 훑으면 무언가 드러날지도 모른겠단 생각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이든 경이 볼을 긁적이며 짧게 혀를 찼다.

“이거 참.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볼가의 상처는 어떻게 생긴 건가요?”

“아. 이거?”

에이든 경의 오른 볼엔 각도에 따라 선명했다가 흐릿해지기도 하는 기다란 흉터가 자리했다.

그 흉터는 근육 움직임에 따라 움푹 패였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그가 입꼬리를 올릴 때면 어김없이 보조개처럼 보였는데 그 점이 꽤 멋스러웠다.

“영광의 상처지.”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전투 중 입은 상처인가 보다.

“징그럽나?”

“아뇨.”

“빈말이라도 고마워.”

“정말로 괜찮아요.”

그가 의외란 듯 눈썹을 치켜떴다. 에스타리온 백작과 시온이 검을 다룬 덕에 크고 작은 흉터는 익숙했다.

이렇게 얼굴에 자리한 건 보기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혐오스럽거나 유사한 감정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많이 아팠겠어요.”

내 말에 에이든 경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예전에 호기심에 오라버니의 진검을 구경하다 손바닥에 베인 적이 있다.

살갗이 살짝 찢어진 정도였는데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온종일 화끈거렸다.

하지만 더 힘든 건 생활 속에 상처 부위를 확인하게 된단 거였다.

피부가 갈라진 상처 부위를 볼 때마다 상처가 날 때의 공포와 통증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그리도 힘들었던 터라, 얼굴에 부상을 입었을 에이든 경이 먼저 그려졌다.

“…….”

에이든 경의 얼굴이 묘했다. 은근히 일그러진 게 감정에 북받친 것 같기도 했고 내 염려가 불쾌한 듯도 하다.

‘이상해.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인데…….’

그가 산만 한 덩치와 달리 칭찬에 어쩔 줄 모르는 부끄럼쟁이 소년처럼 보였다.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아니, 아냐. 그냥 그런 관점은 신선해서.”

“그런가요. 그보다 깃펜 말이에요.”

“깃펜?”

“이렇게 쥐면 더 편할 거예요.”

에이든 경의 깃펜을 쥔 모양새가 불편해 보였던 터라 신경이 쓰였다.

“아…….”

탄성을 내지른 그가 내 손을 흉내 내어 깃펜을 고쳐 쥐었다. 표정이 영 불편해 보였다.

“이렇게요. 많은 분들이 에이드 경처럼 쥐곤 하는데, 우선은 편해도 오랫동안 글을 쓸 일이 있으면 이래저래 불편해져서 그런 방식은 지양하는 게 좋아요.”

“그래?”

에이든 경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여태까지 쓴 글자 중 가장 형편없는 글자가 나왔다.

“아, 손가락이 잘못되었어요. 검지를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

내가 쥐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고 에이든 경의 손에 손가락을 올렸다.

거친 살갗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 움직였다.

손가락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손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적응하기까지 불편하겠지만 일주일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

에이든 경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왜 그런가 해서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했다.

에이든 경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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