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9화 (20/134)

<19>

“아가씨. 정말 괜찮으신가요?”

“괜찮단다.”

신문을 덮어 소피에게 넘겨주었다. 소피의 염려 섞인 얼굴이 마치 동정 같아 비참했다.

하지만 진짜 비참한 건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더 이상 옆에서 볼 수 없단 거다.

‘아직 내가 하녀의 딸인 게 확실하진 않지만, 내 신분이 분명해지기 전에는 가까이 갈 수가 없어.’

감옥 안에 갇힌 나를 조롱한 남자지만 아직도 마음을 꺾지 못한 건, 그가 차가운 사람인 걸 앎에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기대가 높지 않았어. 내게 잘해 준 것도 내가 에스타리온이라서겠지.’

내가 누구의 딸인지는 확신하지 않기로 했다.

시에나가 친딸이고 내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냈던 거라면 그때 가서 사과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 문제에 있어서 내 잘못은 기억이 없단 것밖에 없다.

내게 셀레나라고 한 사람은 백작이었다. 내가 아니라.

‘미안해하는 건 진실이 밝혀진 뒤에 해도 늦지 않아.’

고개를 내젓고는 소피에게 명령했다.

“공작님께 전해 줘. 빠른 시일 내에 수업을 시작하고 싶으니 공작님의 배움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하노라고.”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피가 방을 나가고 혼자가 되자 피로가 몰려왔다. 눈을 감고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었다.

시에나가 한 마지막 말, 그 말이 너무도 걸렸던 탓이다.

그녀는 나를 너무 무르게 봤다. 자신이 가짜라면 내게 그런 힌트는 흘려선 안 되었다.

내가 물렀던 건 그들이 내 가족이었고, 나 때문에 인생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한 피해자라서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때 툭툭 두들기는 것에 가까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도 좋아요.”

노크한 이는 에이든 경이었다. 샤워를 하고 온 건지 그의 머리끝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가무잡잡하게 탄 피부는 물기가 어려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반면 새까만 눈은 모래 자갈처럼 거칠었다.

“날 불렀다고. 아, 일어나지 말고 앉아 있어. 환자에게 예의를 차리라고 요구할 만큼 상식을 모르는 건 아니거든.”

그가 머리를 털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어요. 내일에나 들르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같은 집에 사는데 내일 올 필요가 뭐 있어. 아무튼, 내 수준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

껄렁한 말투처럼 그의 웃옷은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않아 단정치 않게 앞섶이 벌어졌다.

언뜻언뜻 옷자락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보이는 게 민망해 시선이 절로 바닥에 떨어졌다.

수업이 시작되면 언제 어디서나 옷을 단정히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줘야겠다고 마음 깊이 결심했다.

“어디서부터 말하면 되려나. 그대의 상식 이상일걸?”

“괜찮아요.”

“내가 까막눈인 건 알아?”

“조금도 모르세요?”

“천한 노예가 어디서 글을 배웠겠어. 숫자나 읽을 줄 알면 다행이지.”

“숫자는-.”

“숫자 정도는 알아. 참, 다행인 일이지. 그것도 모르면 그게 원숭이지, 사람이야? 뭐, 내 수준은 이 정도야. 이만큼 말했으면 대충 알겠지?”

“모르셔도 괜찮아요. 배우면 되니까요. 그럼 하나만 더 여쭐게요. 몇 달 뒤 있을 황실 무도회를 노리시는 것 맞으신가요?”

키가 워낙 큰 터라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나는 그림자 속에서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에이든 경이 비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잘 아네. 들개에서 집 지키는 개쯤으로 신분 상승하는 게 목표긴 해.”

“그런 말씀 마세요.”

“고매하신 나으리들께서 감히 나를 같은 부류로 인정이나 해 주겠어? 제아무리 흉내 낸들 들개는 들개야. 그러니 잘 훈련된 개새끼로 포장되는 게 최선이지.”

신랄한 말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가 한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있잖아. 난 모르는 게 부끄럽진 않아. 그런 걸로 민망해하지도 않을 거야. 내 본질은 귀족이 아니라 노예 놈이고, 노예 놈이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거니까.”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배우지 않으려는 게 부끄러운 거죠.”

“그래? 그것 참 다행이네. 아 참. 수준 하니 떠오르는데.”

“네?”

“이것 하나는 알아.”

그가 방 한편에서 양피지와 깃펜을 찾아와 서툴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깃펜을 잡은 손이…….’

깃펜을 쥔 손 모양새가 아주 어설펐다. 마디 굵은 커다란 손이 부드러운 깃펜을 힘 조절 안 되는 아이처럼 꼭 붙들었다. 당장에라도 깃펜을 툭 부러트릴 것 같은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아니, 우스꽝스럽다는 적절한 단어가 아닌 것 같다. 거대한 덩치와 큰 손, 그 사이에 연약하게 끼워진 깃펜은 꼭…….

‘귀여워.’

그리 편한 사람이 아님에도 이런 일로 심각한 얼굴을 해선 끙끙거리는 게 꽤나 귀여워 보였다.

이런 생각을 품은 걸 내비칠 수는 없어서 얼굴에 힘을 꼭 주었다.

그러나 에이든 경은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신랄한 어투로 말했다.

“그냥 웃어. 나도 내가 웃기단 것쯤은 잘 안다고.”

“아뇨. 웃기지 않아요. 그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거짓말 한 번 되게 서투네. 굳이 그렇게 배려할 필요 없어. 아무튼 내 수준은 이 정도야. 수준이랄 것도 없지만.”

그리 말하며 그가 어색한 솜씨로 종이 위에 제 이름을 마무리했다.

[ㅇㅔㅇㅣㄷㅡㄴ]

처음 글자를 배우는 아이와 다를 바 없는 글씨였다. 스스로도 제 이름을 쓰는 게 어색해 보였다.

푹. 푹. 힘 조절을 하지 못해 깃펜이 양피지를 뚫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금 신기한 점이 있었다.

‘필체가 오래 글을 알고 지낸 사람 같아.’

글 모양 자체는 아주 어설프지만 필체가 또렷한 게 제법 글을 써 본 사람의 특징이 담겨 있었다.

정확히는 습관이 있는 필체였다. 특히 글자 끝을 살짝 구부리는 특징은 내게도 있는 습관이었다.

이름을 쓰는 법은 누구에게 배운 걸까. 이름을 나타내는 철자를 통째로 외우며 그 사람의 글쓰는 습관까지 그대로 외운 듯했다.

“칼립소는 모르시는 건가요?”

에이든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을 모르는 것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데 그는 한결같이 당당했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을 배우건 시작이 좋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이제 그대가 가르쳐 줘야지. 그래서, 칼립소는 어떻게 쓰지?”

깃펜 끝으로 양피지를 뚫어버린 것처럼 새까만 시선이 나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뜨겁다기엔 아프도록 차갑고, 차갑다기엔 은근한 온도로 끓어오르는 묘한 눈빛이었다.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 정말로 글을 배우고 싶어서 나를 가정교사로 받아들인 걸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바보 같은 생각은 말자.’

한숨을 삼킨 뒤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에이든 경이 깃펜을 건네주었는데 언제 묻었는지 손에 잉크가 스며들어 있었다.

“칼립소는 이렇게 적으면 돼요.”

에이든 경의 성을 또박또박 써 보여 줬다.

“카알. 리입. 소. 이게 아 발음의 모음이에요.”

“칼립소…….”

그의 손이 내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제 성을 쓰는 순서를 익히려는 듯해 다시금 써 보이려는 때 그가 양피지를 쑥 빼앗아 갔다.

에이든 경의 시선이 양피지의 칼립소란 단어에 못 박혔다. 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칼립소를 외우는 게 오늘 밤 숙제로 알지.”

“그래요. 수업은 내일부터 당장 시작하도록 해요.”

“좋아. 근데 안 물어봐?”

“무얼요?”

“어떤 미친놈이 노예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지 말야.”

시니컬한 말투 속엔 어딘가 뼈가 있었다.

나는 그것이 황태자 전하를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했다.

전하와 에이든 경은 얼마간 전쟁터에서 함께 활약을 했다.

거기다 다정한 그분의 성격상 그때 에이든 경을 가엾이 여겨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다.

“전하셨나요?”

내 물음에 에이든 경은 무엄할 정도로 크게 코웃음을 쳤다. 그가 말했다.

“그랬다면 성도 같이 가르쳐 줬겠지. 전쟁 중에 성을 받아서 황태자 전하를 만났을 땐 이미 성이 있었으니까. 이름을 배운 건 노예 생활을 하던 때였어.”

그리 말하는 뉘앙스는, 누가 보아도 내게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투였다.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 수 없어 그의 속내를 추측해야 했다.

‘깜짝 놀라는 반응을 바라는 건가.’

이름을 쓸 수 있단 사실을 자랑하는 걸까. 아니면 칭찬을 바라는 걸까. 이런저런 가정을 떠올려봤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일에 신경을 쓰기에 몸도 마음도 적잖게 피로해 적당히 대꾸하기로 했다.

“좋은 친구분을 두셨군요.”

“친구?”

“네. 친구분께서 이름을 가르쳐 주신 것 아닌가요? 글을 아는 다른 신분의 친구분이요.”

에이든 경의 입술이 비틀렸다. 자조적인 미소가 아니었다.

떳떳이 회상하는 게 조금 민망해 억지로 웃음을 참다 나온 표정이었다.

그가 벅벅 머리를 털었다. 그러자 머리끝에서 물기가 살짝 튀었다. 그가 특유의 심드렁한 말투로 대꾸했다.

“뭐. 됐어. 십 년도 더 된 일이라서. 그보다 말야.”

에이든 경이 말을 돌렸다.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건 하나야. 날 당신 수준으로 만들어 주는 거.”

“많이 어려우실 거예요. 자랑이 아니라, 전 수준이 꽤 높거든요.”

“그쪽도 많이 힘들걸. 어지간히 수준이 없어서.”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바라는 바야.”

그가 눈꼬리를 휘었다. 날카롭고 거친 눈빛과 달리 웃는 눈매는 서글서글한 구석이 있었다.

“세 달밖에 남지 않았을 텐데요.”

“고작 세 달 하고 끝낼 생각이야?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도 있다던데. 난 알고 싶은 게 아주 많다고.”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도록 해요.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드릴게요.”

공작이 보이는 의욕적인 태도에 수업시간이 기다려졌다.

“책임지고 훌륭한 귀족으로 만들어드릴게요. 알고 싶으신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세요.”

내 말에 에이든 경이 앞으로가 기대된단 양 화사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잘 부탁해. 선생님.”

그는 새로 부임한 마을 선생님을 놀릴 준비가 된 악동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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