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소피가 협탁에 놓인 그릇을 확인하곤 염려스레 말했다.
“아가씨. 또 식사를 남기셨군요.”
“배가 불러서.”
“몸이 회복되려면 많이 드셔야 해요.”
“노력할게. 그간 굶는 일이 많았더니 속에서 받아주질 않네.”
“더 좋아지실 거예요.”
“공작님은 무얼하고 계시니?”
“공작님께선 연무장에 계십니다.”
에이든 경은 아주 부지런한 사람인 듯했다. 방에서 쉬다 보면 저택 뒤편 연무장에서 검술을 연마하는 소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왔다.
‘시온도 검술에 매진했지.’
에스타리온 백작이 뛰어난 검사라 시온 역시 검술에 재능이 많았다.
나는 그런 시온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비울 때면 늘 검을 쥐었는데…….’
내가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란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시온은 매일 같이 연무장에서 땀을 흘렸었다.
‘그러고는 나를 버렸지. 아주 철저하게 이단심문소에 말이야.’
그 당시 느꼈던 절망을 떠올리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 왔다.
시에나가 나타난 이후, 바늘 위를 걷는 듯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내 가족이 실은 내 가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내가 살아온 세상을 허물고 상식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했다. 이단심문소에서 죽느니 못 한 고통을 당하기 전까지는.
‘언젠가 내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빌게 만들어 줄 테야.’
이를 꾹 악물고는 뜨거워진 숨을 내쉬었다.
그들을 용서하기엔 내가 겪은 일이 지나치게 참혹했다.
그들이 내게 한 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그들을 애틋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사람을 지옥까지 내몰았어. 더 이상 마음을 쓸 가치가 없는 이들이야.’
얼른 몸부터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긴 빵을 찢어 억지로 삼켰다.
“얼른 회복해야겠어. 이렇게 신세만 지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잖아.”
세 달 뒤가 봄 축제다. 그 말은 즉, 봄 축제를 맞이해 열리는 황태자 전하의 탄신일 무도회가 에이든 경의 사교계 데뷔일이 될 거란 말이다.
그날 에이든 경은 귀족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연스레 상류 사회에 녹아들 예정이다.
그리하여 종례엔 귀족가의 여식과 혼인해 제 자리를 공고히 하려는 것일 터.
내 역할은 그가 가진 과거를 완벽히 끊어내 완벽한 칼립소 공작으로 만들어 주는 거다.
세 달은 긴 노예생활을 지우기에 그리 긴 시간이 못 된다. 그는 아직 글도 제대로 못 읽는 상태니까.
‘하루빨리 수업을 시작해야 해. 세 달 뒤면 헤레이스도…….’
가정교사가 아주 인정받는 명예로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잘 해내고 싶었다.
책임 의식 없이 돈만 탐하는 몰지각한 사람이 되는 건 원치 않으니까. 그나저나.
“신문을 가져다주겠어?”
내가 가문에서 내쳐지고 시에나가 자리를 찾았으니 이런저런 중요한 변화가 있을 테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만 했다.
사실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어떤 내용을 접하게 될지 몰라 두렵다. 그럼에도 알아야만 했다. 복수를 위해, 내 생존을 위해서.
“신문을요?”
소피가 조금 곤란한 얼굴로 딴청을 피웠다.
그 모습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단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지금은 몸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하세요. 그리고 지금은 오후라 신문도 없어요. 이미 불쏘시개가 되었을 거예요.”
이 집에 신문을 보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읽기 전에 불쏘시개로 쓰는 일도 없다. 그녀의 어설픈 거짓말에 주의를 주었다.
“소피.”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소피가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괜찮으니 신문을 가져다주겠어?”
“아가씨. 안 보시면 안 될까요?”
“무슨 내용이든 그건 내가 감당할 일이야. 그러니 가져오도록 해.”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소피가 마지못해 신문을 가지러 나갔다.
한참 뒤 돌아온 그녀의 손엔 오늘 자 조간 신문이 들려 있었다.
소피는 내키지 않는 듯 한참 망설이다 내게 주의를 주었다.
“보지 않으시는 걸 추천드려요.”
“난 괜찮아. 그러니 염려 마렴.”
소피에게서 신문을 건네받았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실상은 가슴이 세차게 떨려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후우.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켠 뒤 헤드라인을 확인했다.
“아…….”
반사적으로 탄성이 나왔다.
[황태자와 셀레나 에스타리온의 약혼 전면 취소]
예상했던 일이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황태자비 자리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바란 건 필립소 마르티네슨이란 남자였다.
그의 지적인 면모, 차가운 듯 다정한 행동, 품위 있는 말투를 사랑했다.
귀족 사회에서 첫사랑이 약혼자인 것은 정말로 축복받은 일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미래를 앞두고 마음고생 할 필요가 없으니까.
‘한때나마 그분의 옆에 있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자.’
애써 무너지는 마음을 잡으며 신문을 읽어내렸다. 중요한 내용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구절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가씨.”
소피가 염려스레 나를 불렀다.
괜찮단 의미로 치켜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왜냐면…….
[백작이 애지중지 숨겨 둔 둘째 여식과 약혼 예정]
기사의 마지막 문구가 심장을 후벼판 탓이다.
* * *
황태자 전하, 그러니까 필립소 마르티네슨을 처음 만난 건 내 나이 열네 살 때였다.
우리의 만남은 약혼식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분의 하얀 피부가 말갛게 반짝이도록 햇빛이 눈부신 날이었다.
‘아름다운 분이시다.’
수려하다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분이었다. 푸른 정복 위로 흐드러진 은발머리와 섬세한 이목구비가 아름다웠다.
반듯한 이마와 미끈한 콧대. 우아한 눈꼬리. 그분의 모든 것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특히 긴 속눈썹 아래 드러난 짙푸른 눈은 남성적이면서도 유려했다.
황태자 전하는 달의 요정처럼 신비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드디어 만나는군. 시온이 어찌나 그대 자랑을 하던지 그대를 만날 날을 고대해 왔어.”
뜻을 알 수 없는 눈빛이 나를 향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그의 눈이 굉장히 차갑다고 생각했다.
푸른 눈은 시리게 빛났고 세상 모든 것을 관망하듯 무심한 태도는 쌀쌀맞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말투만은 다정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의 눈이 따뜻하게 접어들었다.
“앗. 죄송합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제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내 태도가 예의에 어긋남을 깨달았다. 다급히 인사를 올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셀레나 에스타리온이라 합니다. 편히 불러 주셔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황해서, 돌발상황에 익숙치 않은 어린 나이라서… 갖은 이유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였다.
“하하. 셀레나가 부끄러움을 타는군요.”
“오, 오라버니.”
시온이 낮게 웃으며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가 초면인 나와 달리 시온은 전하와 제법 안면이 있었다. 사실 절친한 사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전하. 제 누이, 셀레나입니다.”
“아아, 그래. 한눈에 알 수 있었지. 초상화보다 훨씬 아름다워.”
“과, 과찬이세요.”
또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자꾸 부끄러움을 타는 건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전하의 눈길을 받는다면 나처럼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될 테다.
아무리 열심히 묘사해도 글이나 글로는 담을 수 없는 우아함이 흘렀으니까.
약혼식 날 느낀 그 감정은 강렬한 호감이었다. 그 호감이 애정으로 변한 건 아주 작은 계기였다.
“식사는 입에 맞았나 모르겠군.”
“정말로 맛있었어요.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야. 참, 셀레나. 함께 후원을 산책하겠어? 봄이 되어서 조경이 완벽해.”
“영광이에요.”
그렇게 후원을 산책하던 때에, 갑작스레 구두 굽이 부러졌다.
다행히 균형을 잃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온전히 걷기는 힘들었다. 굽이 부러지며 밑창이 벌어져 헐떡였기 때문이다.
내 곤란함을 읽은 전하께선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셀레나. 황궁 바닥에 새로 깐 바닥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알아?”
“구두를 신어서 온전히 알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바닥 장식이 늘 아름답다고는 생각했어요.”
“바닥 장식도 아름답지. 황궁 바닥에 깐 대리석은 동부 오링턴에서 공수해 온 최고급 대리석이야. 하지만 그 가치를 두터운 가죽 신을 신은 채로는 알 수 없어.”
의아할 새도 없이 전하는 그 자리에서 신발을 벗고는 맨발 차림을 하였다.
“이렇게 맨발을 하면 유리 위를 걷듯 부드러운 감촉을 온전히 느낄 수 있지. 그대도 이렇게 해 보길 권하고 싶은데.”
“아…….”
당장 구두를 찾아오기 힘듦을 알고는 나를 배려한 거였다.
보통은 신발을 벗어 주거나 안아 들어 옮겨주겠지만, 그분의 신을 대신 신기에 내 발은 유독 작았고 안아 들기에 우린 적잖게 조심스런 관계였다.
또한 맨발을 하자니 여인이 발을 보이는 건 흉을 보이는 것과 같아 힘들었다.
그러나 황태자 전하의 권유라면 다르다. 그것은 흉이 아니라 중요한 명령이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신발을 벗고 대리석 돌담 위에 발을 디뎠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발이 시릴 법도 하건만 가슴 속이 홧홧해져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어때?”
“부드…러워요. 정말로.”
“그래? 셀레나, 그대라도 오링턴 산 최고급 대리석의 가치를 알게 되어 다행이야. 황궁에는 양가죽 신을 신고 다니면서 바닥이 딱딱하다고 불평하는 자들밖에 없거든.”
전하께서 내게 보여 주신 친절은 눈물이 나도록 다정했다.
차가운 외향과 달리 섬세한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날 나는 필립소 마르티네슨이란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린 날의 풋사랑이었지만 그 감정은 내가 여인이 되어감에 따라 뿌리를 단단히 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