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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7화 (18/134)

<17>

먼발치에서 목례만 나눈 게 전부인 남자다. 그런 이가 내게 이런 친절을 보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정치적 이득을 생각해도 그리 이로울 게 없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황실을 능멸한 존재다.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 자리인 에스타리온의 영애 자리를 도둑질한 악녀가 아니던가.

아직 귀족으로서의 지위도 확실하지 않은 이가 그런 내게 접근해 추문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야.”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에요.”

“아, 내가 앞의 말을 잘라먹어 그래.”

공작은 가슴팍에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였다.

두툼한 팔뚝과 선명한 가슴 근육이 헐렁한 옷자락 아래로 보였다.

사슴처럼 우아하던 황태자 전하와는 상반되는 모습에 괜스레 민망해졌다.

시선을 비스듬히 피한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음.”

그는 긴 긴 사연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약간의 날티와 가벼운 제스처엔 귀족 사회에서 흔히 보기 힘든 자유분방함이 엿보였다.

“뭐, 간단해. 이쪽은 능력 좋은 가정교사가 필요하고 그쪽은 오갈 데가 필요하지. 당신이 이런 방면으로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들었거든.”

“…….”

“알다시피 난 노예 출신이야.”

“그렇죠.”

“제대로 된 인사법이나 식사 예절은커녕 글도 모르는 까막눈이지.”

스스로를 까막눈이라며 노골적으로 표현할 줄은 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는 신랄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왜 하필 그쪽이냐면, 귀족 사회와 연줄이 끊겨서 내가 어떤 실수를 하건 새어나갈 틈이 없으니까. 그런데 또 귀족 사회를 누구보다 잘 알기도 하지.”

절로 미간이 모였다. 내 처지와 필요가 딱딱 맞아떨어져 가정교사로 원한단 말이었다.

“맘 상해하진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현실이잖아?”

“…그래요.”

모욕감을 느끼냐 한다면 그건 아니다. 그저 하루아침에 뒤바뀐 내 신세가 어처구니가 없어 그렇다.

혈통을 부정당한 것만으로 우정마저 사라지는 이 세계의 비정함이 웃겨서…….

“갈 데, 있나?”

“아뇨. 없어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내 상황이 우스워 보이지 않기만을 바랐다.

에이든 경은 내 태도가 흥미로운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가 기분 좋게 피식 웃었다.

“할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

“급료는 얼마나 되나요?”

“30골드. 이 정도 월급이면 이 집을 나갈 때쯤 평생 살 돈 정도는 모을 수 있을 거야.”

30골드면 어지간한 중상류층의 일 년 치 생활비다. 그만한 돈을 월급으로 준다는 건 파격적인 조건이 분명하다.

‘아… 이러면 정말 거절하기가 곤란해.’

사실 더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나는 갈 곳이 없고 돈이 필요하다.

그런 내게 30골드나 제안한 건 그만큼 내 자존심을 세워 주겠단 뜻이자 그만큼 빠른 시간 안에 완벽한 예법을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단 의미다.

좋다고 대꾸하려는 찰나 그가 치고 들어왔다.

“승낙한 걸로 알지. 수업은 그쪽이 몸부터 회복시킨 뒤 하는 게 좋겠어.”

“네. 그러도록 해요.”

내 대답에 에이든 경이 피식 웃으며 능글맞은 미소를 흘렸다.

그러자 볼가에 난 흐릿한 흉터가 패이며 짙은 볼우물이 만들어졌다.

에이든 경이 느물거리는 눈웃음과 함께 귀족의 예법을 어설프게 흉내 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잘 부탁해. 선생님.”

있는 격식조차 멋대로 소화하는 그 모습에, 수업이 꽤 힘들 것이란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 * *

“일찍 일어나셨군요.”

내게 말을 건 사람은 칼립소 공작 저의 하녀로 그녀는 자신을 소피라고 소개했다.

소피는 이단심문소에서 에이든 경의 저택으로 온 뒤 기절한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기도 했다.

“하아. 하아.”

“악몽을 꾸셨나 봐요. 이제 안전해요. 다 괜찮답니다. 더 이상 아플 일도, 겁먹을 필요도 없어요.”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소피는 내게 필요한 말을 해 주었다.

설사 그것이 거짓이라도 눈물이 나게 기뻤다.

더 이상 이단심문관을 보지 않아도 되고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니. 무엇보다 고문당할 필요가 없단 게 기쁘다.

“누워 계세요. 몸이 많이 상하셨어요.”

“…어떻게… 큼. 콜록. 콜록!”

“잠드셨다가 그대로 이틀을 앓아누우셨어요. 생각보다 몸이 더 안 좋으신 듯해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기침을 할 때마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렸다.

“물을, 줘.”

소피는 등을 감싸 일으켜 준 뒤 입가에 물을 흘려넣어 주었다.

물이 들어가자 숨통이 트였다. 소피가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동상으로 손발을 잘라야 할 수도 있었다고 해요.”

뒤늦게 손발을 확인하는 내게 그녀가 이어 설명했다.

“공작님께서 치유 신관을 모셔와 간신히 치료했지만 몸에 누적된 피로와 정신적인 문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대요.”

“괜찮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런데 치유 신관까지 불러 주었다니… 생각지 못한 기대 이상의 친절이었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런 손님은 다름 아닌 에이든 경이었다.

훈련을 마친 뒤 씻고 바로 온 건지 에이든 경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일어났군. 여기 온 뒤 두 번이나 의식이 없었어.”

그가 나를 살폈다. 내 처지에 대한 부끄러움에 저절로 고개가 떨어졌다.

그러자 시퍼렇게 살이 죽은 손목이 보였다. 멍과 동상 때문에 아주 흉했다.

“첫날 발목과 손목을 확인했어야 하는데 옷 아래 감춰져서 치료가 늦었어. 흉터가 남을 거래.”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 여자들은 조그만 흉이 나는 것도 싫어하잖아.”

“손발을 잘라내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에이든 경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피는 그를 피해 방을 나갔다.

“큼. 흠.”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헛기침을 하며 말을 골랐다.

머리를 쓸자 물방울이 내게도 툭 튀었다.

“아, 미안해.”

“괜찮아요. 그보다 치유 신관을 불러 주셔서 감사해요.”

내 인사에 에이든 경은 가슴팍에 팔짱을 끼곤 흐릿하게 웃었다.

퍽 능글맞은 미소지만 전체적으론 어딘가 초조하고 피로한 기색이 엿보였다.

“제자가 위기에 빠진 선생님을 모시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저 때문에 곤란해지시진 않을까 염려되어요. 알다시피 이단심문소에 다녀왔잖아요.”

“흑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흑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럼 문제 될 것 없지.”

그리 말하는 에이든 경에게선 세상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얼른 회복해서 수업이나 시작하자고.”

대체 이 사람의 의도가 뭘까. 고작 가정교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에이든 칼립소. 저 인간, 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나한테 이러는 거지?”

“네?”

“선생님이 지금 딱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궁금하긴 해요. 처음에 저를 찾으신 건 그렇다 쳐도 이단심문소까지 간 저를 도와준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이단심문소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소름이 끼쳐 몸이 떨렸다. 생각만 해도 공포가 올라와 숨이 막혔다.

그런 나를 보는 에이든 경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이단심문소에서 공식적으로 죄가 없다 공표했으니 또다시 그곳에 들어갈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이젠 당신과 관련 없는 곳이니까.

그의 말에도 떨림은 계속되었다. 밀려오는 두려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참으려 했지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며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진정해. 괜찮으니까.”

에이든 경은 등을 쓸어주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그런 스킨십을 할 만큼 우리는 가깝지도, 알고 지낸 시간이 길지도 않다. 대신 그는 이불을 끌어와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푹신하고 따뜻한 감각에 시간이 지날수록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는 내가 평안을 찾을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이제, 큼. 괜찮아요.”

안정을 찾은 건 한참 뒤였다. 그때까지도 에이든 경은 비난도 탄식도 없이 잠자코 내 곁에 있었다.

“고생했어.”

“…….”

“그리고 잘 버텼고.”

그 말이 뭐라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못 보일 꼴을 보인단 생각에 입술을 콱 깨물었다.

“공작님의 친절에 대한 값어치는 할게요.”

“…뭐?”

에이든 경의 미간이 형편없이 좁혀들었다.

“필요에 대한 쓸모를 할 거예요.”

“…….”

그는 마땅히 할 말을 못 찾았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후.”

깊은 한숨을 쉰 에이든 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좋아. 난 당신 능력이 필요해. 그것도 맞지.”

검은 눈이 형형했다. 그러나 칼립소 공작을 잘 몰라 그 속에 벼려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얼른 회복해서 일어나. 난 글도 모르고 아는 것도 없는 들짐승에 불과하니, 어서 날 가르쳐서 사람으로 만들어.”

“…….”

“나는 당신 생각보다 더 엉망진창이거든.”

“그래 보이진 않아요.”

“아니, 맞아. 날 것 그대로의 날 못 봐서 그래. 굳이 보이고 싶지도 않고. 난 많은 걸 배우고 익혀야 하고 그쪽이 아니면 누구도 안 돼. 왜냐면…….”

괜스레 입이 말라 침을 삼켰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 깊은숨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막 일어난 사람한테 이런 말 해서 뭐 해. 그나저나 식사는? 배 안 고파? 약 먹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할 텐데.”

에이든 경은 내가 대꾸할 새도 없이 큰 소리로 소피를 불러 먹을 것을 챙겨오도록 했다.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뭐지?”

“왜 저였나요?”

“무슨 소리지?”

“다른 가정교사도 많잖아요. 귀족 사회에 진출하고 싶으신 거라면 다른 방법도 많은 걸로 알아요.”

“말했잖아. 당신이 적임자였다고.”

“이단심문소에 들어갔나 나온 이들에겐 꼬리표가 붙어요. 제가 아무리 적임자라도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잖아요. 그래서 왜 저인지 모르겠어요.”

“무슨 대답을 바라?”

“예?”

“원하는 대답을 해 줄게.”

그런 말을 하는 에이든 경을 이해할 수 없어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날 동정한 건가요?”

“아니.”

“날 가정교사로 들여서 괜히 이상한 소문이 붙을지도 몰라요.”

“노예 출신에 경박한 공작인지라 소문은 차고 넘쳐서.”

그는 이 상황이 짜증 나는지 불만스레 혀를 찼다. 마침 소피가 묽은 수프를 가지고 들어왔다.

“선생님. 중요한 건.”

에이든 경이 허리를 굽혀 불쑥 얼굴을 들이댔다. 붉은 입술과 새까만 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가 우아한 눈꼬리를 접으며 빙그레 웃었다.

“내게 당신이 아주 많이 필요하단 거야.”

귓가에 속삭이는 낮고 은밀한 음성에, 우수수 소름이 돋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에 에이든 경은 킥킥 웃어 대며 내 어깨에 둘러싸인 이불을 세심하게 고쳐주었다. 그러고선 소피에게 명령했다.

“선생님을 잘 모시도록 해.”

“네. 걱정 놓으세요.”

방을 나가는 에이든 경의 뒷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무뚝뚝한가 하면 장난스럽고, 예의를 아는 듯하지만 행동거지 어딘가에 경박함이 밴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수업을 해 나가며 알게 되겠지.’

에이든 경이 어떤 사람이며 그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그에게 내가 필요하듯이 나 또한 그가 필요하다.

“소피. 약부터 줘. 몸을 회복시켜야 하거든.”

얼른 회복해서 에이든 경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진실을 파헤칠 것이다. 그런 뒤엔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복수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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