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4화 (15/134)

<14>

어둠 속 흐릿한 달빛 아래 드러난 전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분이 아름다운 만큼 스스로가 초라해져서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이에게 가장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되다니.

내 행색이 부끄러워 차마 그분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하필 이런 모습을…….’

때가 낀 손톱이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하의 짙푸른 눈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

이런 모습으로라도 그분을 보았다는 반가움과 기쁨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하의 빛나는 은발과 선명한 벽안을 보니 가슴 한편이 울렁거렸다.

한때는 내 약혼자였고 그때도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이였다.

“전하께선…….”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민망해 얼굴에 열이 올랐다. 드르렁. 드르렁. 죄수들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목에 힘을 주어야 했다. 전하께선 대답이 없었다. 그분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는 미동도 어떤 표현도 없이 그저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분이셨지만 오늘의 전하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내가 부끄러운 걸까.’

저런 이가 약혼녀였단 게 수치스러운 걸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전하께선 명예를 중요시하였고 자존심 강하고 꼿꼿한 분이었다.

그러니 백작가를 통해 내 소식을 전해 듣고선 천한 사기꾼의 딸과 연이 닿았다는 것에 분노를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전하께선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나를 바라보았다.

눈길이 향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끄러움에 고개가 떨어졌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 지금 당장 전하 앞에서 사라질 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하겠다.

“…그대는…….”

황태자 전하의 목소리는 마치 스산한 바람 같았다.

“여전하군.”

여전하다니 무슨 뜻인 걸까. 전하의 시선이 내 손끝에 닿았다. 더러워진 손톱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오므렸다.

하고픈 말이 많은데 비참한 처지와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행이야.”

“…네?”

뜻을 해석하려는 때에 전하께서 몸을 돌렸다.

‘아, 안 돼.’

다급히 전하를 불렀다.

“전하!”

황태자 전하께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싫었다. 그렇다고 그분이 멀어지는 건 더 싫다.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이제 나는 백작가의 아가씨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다. 그러니 전하를 만날 기회는 없다고 봐도 된다.

‘난 전하께 평생 이런 모습으로 기억되겠지.’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이 내가 보이는 마지막 순간이란 게 서글펐다.

황태자 전하께서 다시 몸을 돌렸다. 차갑게 빛나는 시선을 마주하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에게 한 번은 내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정말로 사랑하노라고…….

“이런 모습을 보여서-.”

“이제까지 보아 온 시간이 있으니 몇 가지 부탁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다.”

내 말을 자르고 전하께서 얘기하였다. 나른한 목소리가 창백한 달빛처럼 느껴졌다.

“셀레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힘들지 않은가?”

“아…….”

힘들다. 추위와 배고픔에 죽을 것 같고 가족을 잃고 슬픔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진 느낌이다.

그가 창살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달빛에 전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 순간이 그대에게 유일한 기회가 될 거다.”

이곳에서 꺼내 달라 부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 뜻이다.

몸이 덜덜 떨렸다. 사랑을 고백하느냐, 아니면 나를 살려 달라 부탁하느냐 선택해야만 했다.

‘나가고 싶어. 하지만…….’

도와 달라 빌고 나서 고백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 기회를 놓치기에 앞으로 어떤 고초를 겪게 될지 모른다.

혼란에 빠졌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전하를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다.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이 말을 하는 게 이토록 어려울 줄 알았다면 미리 실컷 해 놓을걸 그랬다. 한쪽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흘렀다.

“도와…주셔요.”

“…….”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곳에 갇혀 있는 건 못 견디게 힘들다.

추위와 배고픔, 외로움과 고독, 버림받았다는 공허함까지… 숱한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혼자가 되었다. 나를 버리고, 이런 끔찍한 곳에 밀어넣은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원망스럽다.

그들이 밉다. 와중에도 그들을 아주 조금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내가 싫다.

가슴 밑바닥에 아롱아롱 매달린 이 마지막 애정은 곧 연기가 되어 사라질 테다.

감옥 생활에 메말라가는 몸처럼 마음 또한 말라가는 게 느껴진다.

“도와주세요. 전하.”

툭. 눈물방울이 옷자락에 떨어졌다. 전하의 입꼬리가 흐릿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거절하지.”

“…예?”

그분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비틀렸다. 피식 미소 짓는 모습이 차갑다 못해 시렸다.

“그대도 이리 무너지는 날이 오는군. 그럼, 행운을 비네.”

그리 말한 전하는 내가 당신을 붙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무정히 떠나갔다.

쾅 하고 닫히는 문이 버림받은 처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처음부터 부탁 같은 건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조롱하고 싶었던 거야.’

원래 저런 분이셨던 걸까. 아니면 오해로 인해 그만큼이나 치가 떨리게 싫어진 걸까.

무엇이 되었건 나는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놓쳤고 비웃음만 당했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웠고 우스웠고 불쌍해 미칠 것 같았다.

“흐으으…….”

짐승 같은 울음이 흘러나왔다. 뼛속 깊이 파고드는 추위보다 모멸감에 죽을 것 같다.

해서 나는 울고 웃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 * *

아침 해가 뜨자마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이번 손님은 아멜리아였다. 한때 친구였다 생각했던 이.

‘너 또한 나를 조롱하러 온 거니?’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발목이 잠기고 가슴에 수압이 차올랐다.

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가족도 친구도 이런 걸까. 내가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애초에 살아나갈 수는 있을까?

“꼴이 아주 볼만하구나.”

아멜리아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입 안을 잘근잘근 씹으며 당장 서러워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았다.

“용건이나 말해. 아멜리아, 여긴 왜 왔니?”

“별건 아니고, 너와 함께 주최할 예정이었던 수제향수 시향회 말이야.”

“그런데?”

“백작가로부터 다른 서류는 다 이관받았거든? 그런데 핵심원료 수입품질보증서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길래.”

“……하.”

헛웃음이 터졌다.

아멜리아, 넌 이런 사람이었구나. 어째서 여태 네 본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거지?

“고작 그런 일로 찾았어?”

“네겐 고작이겠지만 나한텐 제법 중요한 일이잖아? 뭐, 그것만이 이유라고는 못 하긴 해.”

아멜리아의 시선이 내 헝클어진 머리와 손목의 수갑을 훑었다. 나를 구경하러 온 거였다.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모멸감에 미칠 것 같았다. 황태자 전하에 이어 아멜리아까지…….

들끓는 분노가 활화산이 되어서 온몸을 관통했다. 철창만 없다면 아멜리아의 뺨이라도 때렸을 테다.

“가.”

“품질보증서가 없으면 행정허락을 못 받는단 말야. 다시 발급받는 것도 일이니 어디에 놔뒀는지만 말해.”

“이런 상황에 그런 것들을 찾아야겠어?”

“셀레나. 양심이 있으면 최소한의 협조는 해야지.”

“뭐?”

아멜리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녀가 구두 코로 창살을 툭 찼다. 그러자 탁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진동이 전해졌다.

“너 때문에 내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진 줄 알아? 단짝친구가 순 사기꾼이었다니! 한동안은 비련의 여인처럼 굴어야 하잖아.”

“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눈을 감으며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네겐 내 처지가 보이지 않는구나. 나는 단 한 번도 네 친구였던 적이 없구나. 그러니 이런 꼴이 된 나보다 네 평판이 더 중요한 거겠지.

이런 애를 단짝인 줄 알았다니. 고작 이 정도인 사람을 친구라고 믿었다니! 사람 보는 눈이 이따위인 내 눈을 파내고 싶었다.

“네 눈엔 내가 보이지 않아?”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받는 중인데 뭐.”

“아멜리아 로펜!”

“아가씨라고 몇 번을 말해? 너 똑똑하잖아. 그게 그렇게도 머리에 안 들어가? 아멜리아 아.가.씨!”

기가 차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에 아멜리아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동안 힘들었겠어.”

“무슨 말이니?”

“그런 본 모습을 숨기고 나와 어울리느라 많이 힘들었겠어.”

“말이라고 해? 네가 셀레나 에스타리온이 아니었다면 뭣하러 옆에 있겠어.”

담담한 말투에서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멜리아가 드레스를 붙잡고선 몸을 낮춰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이 은근하게 비틀렸다. 그러나 가라앉은 두 눈 만큼은 진지했다.

“네 친구로 지내면 먼 미래에 황후의 시녀가 될 수 있으니 다 참고 지낸 거지. 처음부터 난 네가 싫었어.”

“……왜? 내가 왜 싫었어?”

아멜리아의 고운 입술이 비틀렸다.

“온통 셀레나, 셀레나. 셀레나의 반만 닮아 봐라, 그 애의 예의 바름을 배우거라, 그 애의 학식을 본받아라. 그뿐일까. 에드가는 널 좋아했어!”

에드가는 아멜리아의 약혼자였다.

“약혼녀의 친구를 말이야. 뻔히 네게 황태자 전하가 있는 걸 알면서도 바보처럼……!”

나는 몰랐던 사실이다. 에드가가 내게 친절하긴 했지만 아멜리아의 단짝친구라 특별히 신경 써 주는 거라 생각했다.

“넌 아무것도 모른 채 늘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다녔지. 우아하게 고상이나 떨며 말이야.”

“그런 적 없어. 헛소리 그만해.”

“넌 최악이었어.”

“…….”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늘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마냥 빳빳이 턱을 치켜들고 살았지. 성녀마냥 갖은 착한 척은 다 하고 뭐라도 되는 양 굴었잖아. 아주 끔찍하고 지독했어.”

“네가 이런 애인 줄은 몰랐는데…… 네 이런 모습을 몰랐던 난 정말 얼간이였구나.”

“네가 너무 순진한 거겠지. 그런데 말야. 지금 그 모습을 보니, 항상 꼿꼿하니 대단한 모습보다 더 인간적이라 보기 좋단 생각이 들어.”

결국 눈물 한 줄기가 툭 흘러내렸다. 친구의 본모습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할퀴었다.

“서류는 됐어. 다시금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지 뭐. 이렇게 네가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걸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걸음한 보상이 됐거든.”

깔깔깔 웃는 아멜리아가 낯설었다. 곧 간수가 와서 시간이 되었다며 그녀를 쫓아냈다.

사라져가는 옛 친구의 뒷모습에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내가 살던 세계는 거짓이었다. 가짜 친구, 가짜 가족. 그리고 가짜 셀레나 에스타리온.

“흐으윽.”

고통에 받쳐 우는 와중에도 간수들은 감옥 문을 열고는 나를 붙잡아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거짓 세계가 부서지고 남은 건 진탕 속을 뒹구는 현실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