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0화 (11/134)

<10>

그렇게 나는 이 집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시에나로부터 의미심장한 말을 듣게 되었다.

‘당신은 가짜로 살아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아는 눈치였다.

내가 진짜이고 자신이 가짜인데 상황을 바꿨다는 뜻인 건가.

내가 미워 얄궂은 장난을 쳤을 가능성은? 설사 그녀가 가짜가 맞더라도 기억이 없는 내 말을 누가 믿어 준단 말인가.

“괜찮아. 셀레나 에스타리온.”

아. 더 이상 에스타리온이 아니다.

엄지손가락으로 감히 에스타리온을 입에 담은 입술을 문질렀다.

방금 전까지 내 이름이었던 것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의 딸이 아님을, 오라버니의 동생이 아님을 의미한다.

“아버지… 오라버니…….”

서글픔에 눈물이 솟았지만 언제까지 빗속에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가방을 들고 서둘러 마차를 잡았다.

지금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생각해 보니 아멜리아 로펜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멜리아라면 날 도와줄 거야.’

아멜리아는 내 사정을 알고 있다. 아멜리아에게 가서 이 일을 털어놓고 며칠만 손님으로 받아 달라고 부탁하면 될 테다.

“로펜 가로 가 주게.”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로펜 가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가문에서 내쳐지는 건 지난 며칠 만에 갑작스레 결정되었다.

내가 가짜이고 다른 곳에 아버지의 친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시에나의 존재와는 별개로 나를 사랑하노라 했다.

‘그 애를 찾게 되어도 너는 여전히 우리 가족이야.’

그날의 그 다정한 위로는 어디 간 걸까.

시에나가 집에 오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나를 비롯해 우린 시에나의 상태에 끝없이 탄식했고 슬퍼했다.

가슴에 콕하고 박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건 어느 날 시에나가 한 말이었다.

‘다, 당신이 부러워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우아해질 수 있나요?’

그녀는 복도에서 나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그리 말했다.

마침 시에나의 교육 때문에 의논을 하러 나오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녀의 뒤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때 두 사람의 얼굴이 어쨌더라…….

‘끔찍했어.’

부채감과 안쓰러움 가득한 그 얼굴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부자가 느끼는 괴로움이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죄책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나 스스로 흠결 없는 자라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게 도둑질 위에 이루어진 모래성이었다니. 처참했다.

어느덧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 문이 열리더니 마부가 말했다.

“아가씨. 다 왔습니다.”

“고맙네. 여기, 삯일세.”

가방을 꼭 안은 채 얼른 로펜 백작가의 대문을 두드렸다.

저택 출입문에서 나를 알아본 집사가 헐레벌떡 우산을 챙겨 뛰쳐나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를 봐 온 이였다.

“아가씨.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아하게 수염을 기른 집사가 내 몰골에 경악 어린 얼굴을 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게 민망해 머쓱하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아멜리아는 어디 있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안으로 가시죠.”

사실 안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아멜리아와 난 서로의 집을 숱하게 드나들었다.

우린 함께 사춘기를 겪었고 서로의 약혼을 축하하며 나란히 어른이 되어갔다.

응접실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집사는 하녀를 시켜 몸을 닦을 수건을 건네주었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짜낼 무렵 응접실 문이 열리더니 아멜리아가 나타났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된 거니?”

아멜리아가 응접실 바닥에 떨어진 물기에 인상을 썼다. 그러다 그녀는 벽난로에 불을 넣으러 오는 하녀를 물렸다.

추위에 몸이 달달 떨리며 이빨이 딱딱 부딪쳐 왔다.

아멜리아에게 불을 피워 달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당장 내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 듯했다.

“쫓겨났어?”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절로 얼굴이 굳었다. 아멜리아는 내 반응에 상황을 읽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딸이 돌아와도 넌 여전히 백작가의 사람일 줄 알았어.”

“그러게. 이렇게 되었네.”

“전혀 도움을 안 줘?”

“응. 주셔도… 어떻게 받아. 내가 감히 염치가 있지…….”

‘그만큼 길러 줬으면 너 스스로 먹고살 길을 마련할 수 있을 게다.’

아버지께선 노기를 누른 채 그렇게 얘기했다. 그 말이 맞다. 이 한 몸 먹고살 길은 마련할 수 있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뻔하다.

배운 것들을 이용해 가정교사를 전전하거나 젊고 예쁜 외모를 이용해 적당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먹고살 길은 마련되니, 아버지께선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둔 채 얘기한 걸 테다.

그래서일까. 나는 정말로 돈 한 푼 없이 쫓겨났다. 가지고 나온 거라곤 여벌의 옷이 전부였다.

“너무하신다. 그래도 평생을 키웠는데 어떻게 그래.”

“나 때문에 황태자 전하와 약혼한 게 어그러지며 황실 능멸죄로 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잖아. 이 정도 본보기는 보여야 서로가 해를 입지 않을 거야.”

“와중에도 백작님을 감싸는구나. 하. 그래, 맞아. 생각해 보면 너와 시온은 별로 닮은 구석이 없었어.”

정확히 말해 나는 아버지와도 오라버니와도 닮지 않았다.

금발에 녹안인 아버지, 오라버니와 달리 나는 평범한 브루넷에 금빛 눈이었다.

거기다 이목구비마저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와 달랐다. 친딸이 아닌 만큼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자라며 단 한 번도 내가 친딸이 아닐지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은 건 외모 따윈 별반 문제가 안 될 만큼 화목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남매간의 우애가 깊었고 부모 자식간엔 깊은 신뢰가 자리했다.

“에취.”

추위에 기침이 나왔다. 젖은 수건에 손을 닦으며 소파에 앉으려 하자 아멜리아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앉지 마! 소파가 젖잖아.”

“아, 그래. 맞아. 미안해. 너무 피로해서 미처 생각지 못했어. 드레스 좀 빌릴 수 있을까? 가방 안에 있는 것들도 다 젖은 것 같아서.”

“친딸이라던 걘 어때?”

“아멜리아. 몸이 너무 추워. 숄이라도 빌려줘.”

“걘 어떻냐니깐.”

제 얘기만 하는 아멜리아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비를 맞았기 때문인지 몸이 으슬으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른 대답을 하고 옷을 갈아입자는 결론이 났다.

“잘 모르겠어. 의문스러운 애 같아.”

“왜?”

“내가 나오던 때… 이상한 말을 했어.”

“무슨?”

코가 나왔다. 목이 따끔따끔거렸고 기침이 올라오려 했다. 정수리에서 내려온 물기에 흐려지는 눈가를 비비며 대답했다.

“자신이 가짜가 맞대. 그리고 내게 가짜로 살래.”

“무슨 말이야?”

“모르겠어. 날 놀리려 한 말인지 진짜인 건지. 그 말도 이상하지만 그동안 얄궂은 면면을 숨긴 것 같아서 찝찝해.”

아멜리아는 심각해진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몸을 떨며 그녀가 얼른 생각을 정리하기만을 기다렸다. 너무 추웠다.

얼마 뒤 머릿속을 정리한 아멜리아가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 봐.”

“응. 방은 손님방을 쓸게.”

얼른 손님방으로 넘어가려 걸음을 옮기던 때 아멜리아가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니? 이 집에서 나가란 말인데.”

“미안한데 다시 말해 줄래? 제대로 못 들었어.”

아멜리아가 뭐 그런 한심한 소리가 있냐는 투로 말했다.

“내 집에서 나가라구.”

대체 무슨 말이지…? 집이라는 게 내가 아는 그 단어가 맞는 걸까? 내가 모르는 사이 단어의 정의가 바뀐 건 아닐까?

“…아멜…리아?”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우린 10년이나 알고 지낸 사이다.

서로 비밀 편지를 교환하고 밤새 수다를 떨며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던 친구 아니었던가.

“대체 무슨…….”

“내가 널 왜 도와줘야 하니? 널 도우면 어떤 이득이 있다고.”

눈앞이 아연해지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태도가 변한 데엔 합리적인 이유가 있지만 아멜리아의 갑작스런 변화는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말이 친구지 피가 섞이지 않은 자매라 여겼는데…….

“셀레나. 착각하나 본데 백작가에서 내친 거면 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냐.”

“…….”

우리의 10년 우정이 아무렇지 않은 시간인 양 깨어지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멜리아가 대체 내게 왜 이런단 말인가.

“내가 너와 친구를 할 이유도, 도울 필요도 없단 말이지. 그러니 이만 그 물기 좀 그만 흘리고 꺼져.”

“어, 어떻게… 대체 왜…….”

“그리고 내게 말을 높이라 명하지 않는 건 그동안의 정을 생각한 마지막 자비야.”

몸이 떨리는 이유가 추위 때문인지 배신감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멜리아가 이런 애였던가? 우리 우정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거였던가?

내 표정에 의문이 보였던지 아멜리아가 코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넌 너무 순진해. 순수한 우정이 세상에 어딨니?”

“우린 친구잖아.”

“친구도 쓸모를 다하면 의미 없는 것 아냐?”

“아멜리아!”

“아멜리아 아가씨!”

“뭐, 뭐?”

“아멜리아, 아.가.씨! 넌 평민이잖아. 그것도 남의 인생을 도둑질한 파렴치한의 딸. 더러운 피를 이었지. 그런 널 가까이 두긴 싫어. 내 평판까지 떨어질 수도 있거든. 아랫것들 시키기 전에 어서 나가.”

“…….”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바보처럼 눈물을 쏟으며 펑펑 울 것 같았다.

아멜리아 앞에서 울긴 싫었다. 저런 애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수치다.

축축하게 젖은 가방을 들고 응접실을 나갔다. 뒷모습이 초라해 보일까 적잖게 신경 쓰였다.

아멜리아는 내가 복도를 지나 저택 출입문에 도착할 때까지 붙잡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끝없이 내리는 비를 확인했다. 차갑고 따가운 빗방울 속으로 파고드는 것보다 내가 사랑한 이들의 외면이 더 시렸다.

“우산은 쥐여 보내. 그 정도도 않으면 내가 사람이니?”

뒤에서 아멜리아가 집사에게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 그녀는 끝까지 날 우습게 만들려 한다.

곧 집사가 우산을 들고 오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 없네. 난 동정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전해 주게.”

그리 말을 남긴 뒤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머리맡을 가린 채 저택을 빠져나왔다. 비를 머금어 가방이 점점 무거워졌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담…….’

알고 지낸 이들에게 가기에는 마차 삯이 부족했다. 걸어서 갈 길도 아니다. 무엇보다…….

‘아멜리아와 다르단 확신이 없어.’

그들 또한 아멜리아처럼 태도를 바꾸어 하루아침에 이런 꼴이 된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주먹을 꽉 쥐었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허상이 되었다.

‘우선은 비부터 피하자.’

사람을 가려내고 미래를 계획하는 건 이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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