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오라버니가 아버지께 무어라 말했는지, 아버지께선 내게 생전 보이지 않은 노성을 지르며 화란 화는 다 내었다.
2주간 방에 갇혀 하루 한 끼 식사만 지급되는 벌을 받게 되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보다 앞서서 너무 서운했다.
내 가족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갑갑하고도 슬픈 감정이 쉴 새 없이 가슴을 갉아먹었다.
그날은 방에 외출 금지가 내려진 마지막 날이었다.
“아가씨! 어서 백작님 서재로 가 보셔요.”
로지의 겁먹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가슴이 조여 왔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치밀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서재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상태가 심상찮았다.
날 선 분위기 속 오라버니는 불그죽죽해선 이를 악문 상태였고 아버지는 애써 숨을 고르는 게 역력했다.
“앉아라.”
“네. 그런데 저 이는 누구인가요?”
내 맞은편엔 허름하고 촌스러운 치마를 두른 시골 아낙 한 명이 자리해 있었다.
“시에나를 길러 준 분의 절친한 친구다.”
“벌써 찾았군요.”
아버지께서 거친 숨을 내쉬며 창가로 자리를 이동했다. 오라버니가 자리에 앉아 아버지 대신 말했다.
“확인해 보거라.”
“예, 예.”
아낙은 몸을 떨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거뭇하게 탄 피부임에도 창백하게 긴장해 혈색이 없어진 걸 알 수 있었다.
“마, 맞습니다.”
“다시금 확인해라! 확실하더냐?”
“예, 예! 부, 분명… 분명 그 애가 맞습니다.”
그녀의 말에 의아해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살폈다. 두 사람은 설명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서 물었다.
“셀레나. 정말 기억이 없는 게 맞더냐?”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줄리아의 딸이 맞습니다.”
“시에나와 헷갈린 것은 아니고?”
“아닙니다. 두 사람이 아무리 닮았다 해도 은근히 다른 구석이 많습니다. 아가씨의 눈꼬리나 코가 줄리아를 많이 닮았습니다.”
“…….”
오라버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줄리아, 그러니까 시에나를 길러 준 여인과 닮았다고 한다.
그게 무얼 의미할까. 이 참담한 분위기는 뭐며…….
“피터! 이 여인을 데리고 나가라!”
오라버니의 외침에 아버지의 수행원이 와서 맞은편에 있던 아낙을 데리고 나갔다.
아버지와 꼭 닮은 오라버니의 녹색 눈에 실망과 증오가 너울거렸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창가에 못 박은 듯 서 있던 아버지께서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의 미간엔 깊고 짙은 주름이 져 있었다.
“시에나의 증언을 바탕으로 유괴범들을 추적하다 한 가지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게 뭔가요?”
“유괴범들은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아이를 따로 떼어 놓고 독자적으로 움직였지. 그들은 아이를 시골에 있는 어느 여인에게 맡겼다.”
“그럼 그 여인이 시에나를 맡은 거였나요?”
“그래. 시에나는 함께해 온 시간이 있어 아니라 잡아뗐지만 진실은 쉬이 가려지지 않는 것이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버지께서 말을 이으셨다.
“방금 온 그 여인이 그러더구나. 어느 날 제 딸은 어디 간 건지 사라지고, 대신 딸을 닮은 낯선 아이를 데려와 딸 아이 이름을 주고 키웠다고.”
설마. 설마…….
불안한 예감은 곧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친딸은 새우 알레르기가 있었다지.”
나는 새우를 먹지 못했다. 기억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새우를 거부해 죄 토해 낼 정도였다.
손끝이 저려 왔다. 아니라 하고 싶은데 기억이 없으니 무작정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근거가 없으니까.
“제가… 그 딸이란 건가요?”
“셀레나!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흥분한 오라버니가 나서자 아버지께서 손을 들어 막았다.
“무엇을 말하라는 건가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대체 상황이 왜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도 아주 안 좋게 흘러가는 건 알 수 있었다.
“시에나를 기른 그 여인은 유괴범들의 협력자였다.”
“처음부터, 그 여인이 딸을 바꾸기 위해 계획했단 건가요? 시골 아낙이 시에나와 저의 외모가 닮았다는 걸 어떻게 알고요.”
“유괴범들이 데려온 아이가 제 딸아이와 쏙 빼닮았음을 알고 지금처럼 무서운 일을 계획한 걸 테지!”
오라버니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아버지가 깊은숨을 토해 냈다.
“…셀레나. 정말로 기억이 없는 게 맞느냐?”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녀요.”
목소리가 떨려 왔다.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울지 않기 위해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언제든 당당하려 애썼는데 오늘만큼은 잘되지 않았다.
“네 친모가 시켰던 것이냐? 네 어미가 기억이 나지 않는 척 잡아떼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속삭이든? 바른대로 말해라.”
“정말로 전 아무 기억도 없어요. 믿어 주세요. 어째서 그 여인의 말은 믿으시고 제 말은 믿지 않으시는 건가요?”
“셀레나. 거짓말이라면 그만하거라.”
“정말 아녀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란 말예요. 어떻게 하면 제 말을 믿어 주실 건가요.”
정말로 기억이 없다. 기억이 없어서 누구보다 힘들었다.
나를 믿어 줄 수는 없는 걸까. 조금 더 의문을 가지고 문제를 파헤쳐 줄 수는 없을까.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믿어 주세요. 기억이 있다면 없는 척 정교히 연기했단 건데, 지난 10여 년간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보였나요?”
하지만 내 말은 아버지께 그리고 오라버니에게 닿지 않았다.
“교활하고 사악한 악마의 새끼를 내 손으로 키웠구나! 네가 정직한 아이라 믿었건만!”
아버지는 그리 외치며 내게 재떨이를 던졌다.
“꺅!”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리며 머리를 가렸다. 재떨이는 바로 옆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살갗에 튀어 화끈한 감각이 들었다.
“셀레나를 끌고 가서 방에 가둬라! 내 명령이 있기까진 절대로 방 밖으로 내보내어선 안 된다!”
“아버지! 아버지!”
하인 시몬과 제롬이 양쪽에서 나를 붙잡고는 질질 끌었다.
개처럼 끌려 나가고 있다는 부끄러움보다는 신뢰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미칠 것 같았다.
내 방에 내던져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문을 두들겼다.
“열어 줘! 이 문 좀 열어!”
“죄송합니다. 아가씨.”
문밖에서 시몬의 말이 들렸다. 쿵. 문에 이마를 기대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에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누구보다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
울음이 새어 나왔다.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억울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제게 셀레나라고 하셨잖아요. 이제 와 제가 아버지를 속이려 들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아닐 거야. 그 여자의 친딸은 따로 있을 거야. 난 아닐 거야…….’
기억이 없어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항변할 수도 없고, 누명이 누명이라고 스스로조차 확신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다.
“기억해 내. 기억해 내란 말야.”
주먹 쥔 손으로 머리를 쿵쿵 때렸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나 자신이 미웠다. 문에 뒷통수를 박았지만 기억이 날 리 만무하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시에나가 문틈에 대고 속삭였다.
“셀레나, 저예요. 괜찮아요?”
“시에나? 시에나, 당신이에요?”
“네. 저예요. 아버지도 너무하세요. 어떻게 셀레나, 당신 말은 믿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 말은 믿는 걸까요…….”
“…저, 전, 괜찮아요. 시에나, 아버지께 말씀해 주세요. 절 믿어 달라고요.”
“셀레나. 며칠만 기다려요. 조만간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간곡히 말씀드릴 거예요. 당신에 대한 오해를 거둬 달라고요.”
그녀의 말을 믿어도 되는지, 그런다고 무언가 달라질지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몰릴 대로 내몰린 상황에 상황판단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저 그녀의 그 말이 한 줄기 빛처럼 느껴져 가슴이 요동쳤다.
“아, 아버지께요?”
“그럼요. 셀레나, 당신이 이렇게 방에 갇히다니 가슴이 너무 아파요.”
“시에나. 잘 좀 말씀드려 주세요. 전 정말로 아니에요. 맹세코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속인 적 없어요.”
울음이 치밀어 올랐다. 숨이 바르르 떨려 왔다. 눈물이 자꾸 흘러서 더 이상 소매로 닦이지 않았다.
“셀레나. 진정해요. 다 잘될 거예요.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고마워요. 부탁할게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무 울어서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너무 괴로운 바람에 시에나를 믿어도 될지 의심되지 않았다.
시에나는 얼마간 문밖에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잦은 울음으로 숨이 찼다. 두통과 안통으로 죽을 것 같았다. 시에나가 떠나고 얼마 뒤 울다 지쳐 그대로 바닥에서 잠들었다.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문가에서 나는 인기척에 정신을 차렸다.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아버지!”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얼굴이 어두웠다. 눈빛은 차가웠고 입술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안 좋은 일어나게 될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불안이 엄습해 왔다.
“아버지. 저는, 저는-.”
억울해요. 문장을 맺기 전에 아버지께서 입을 열었다.
“네 처분을 결정지었다.”
“제게 셀레나라 하셨잖아요. 그런 제가 아버지를 속이려 들었다니, 말이 안 맞아요. 아버지, 제발 저를 믿어 주세요.”
아버지의 꾹 다물린 입과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찮았다.
아버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만으로도 묵직한 분노가 전해지는 듯했다.
“…저를… 믿지 않으시는군요.”
고개가 떨어져 내렸다. 무슨 말씀을 할지 알 수 없지만 왜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정하자. 차근차근 내 결백을 증명하면 될 거야.
떨리는 어깨에 힘을 주며 애써 평정을 찾으려 했다.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생각을 정리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을, 절대 아버지를 기만한 적 없으며 그 증거를 스스로 찾아오겠노라 말하려던 참이었다.
“나가라.”
“…예?”
“너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에스타리온의 여식도 아니다.”
“…아버…지?”
“셀레나. 너를 이 가문에서 파문하기로 했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발 딛고 있던 땅이 무너지며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게 기억이 없기 때문이라면, 기억이 없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내가 미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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