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아가씨. 정말로 치료를 받아 보시는 건 어떠세요?”
지난밤, 또다시 비명을 내지르다 깬 뒤 아침까지 헛구역질을 했다.
아침 시중을 들러 온 로지는 반쯤 쓰러져 있던 내 안색에 제 일처럼 힘들어했다.
“괜찮으니 비밀로 해 줘.”
“언제까지나 숨기실 수는 없어요.”
아버지와 오라버니껜 되도록 이런 내 상태를 비밀로 했다.
그래서 내가 악몽을 꾸고 이따금 두통으로 힘들어하는 건 알아도 이 정도로 심한 줄은 모른다.
“굳이 말할 필요 없는 거잖아. 걱정만 살 뿐이야.”
“악몽 내용은 여전히 모르시고요?”
“뭔가를 보긴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
“뭘 보셨는데요? 잘 떠올려 보셔요.”
꿈에서 본 것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머릿속을 떠도는 건 끊임없는 비명소리였다.
그 소리는 귓가에서 외치는 것처럼 커졌다가 아주 멀리서 바람을 타고 넘어온 것마냥 희미해지길 반복했다.
눈을 뜨자 불안한 얼굴을 한 로지가 보였다.
“아가씨?”
“괜, 찮아.”
“참. 아멜리아 아가씨께서 편지를 보내셨어요.”
얼른 편지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시에나가 온 뒤로 정신이 없어서 아멜리아를 못 본 지 몇 달이나 되었다.
“아멜리아 아가씨가 그렇게 좋으셔요?”
로지가 질투가 난다는 양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한 로지는 백작가에 몸을 의탁하며 하녀 일을 해 왔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서 동생처럼 살뜰히 챙겼더니, 로지는 이렇게 나와 아멜리아와 관계에 질투 아닌 질투를 하곤 했다.
“아멜리아는 친구고 넌 동생 같은 아이야.”
로지가 백작가에 온 지 5년이나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열다섯, 어린 나이였다.
반면 아멜리아는 나와 동갑인데다가 벌써 10년이나 봐 온 사이였다.
[셀레나. 네가 전해 준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 줄 모를 거야. 네가 셀레나 에스타리온이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세 번이나 다시 읽었어.
너와 시온이 그리 닮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성격이나 행동은 쏙 빼닮았어. 꼭 피가 이어져야만 가족은 아니겠지.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
그리고 네가 친딸이 아니더라도 너는 여전히 내 친구 셀레나 에스타리온이야. 알지?]
나를 잘 아는 아멜리아는 단박에 내가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을 거라 파악해 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란 조언을 덧붙인 뒤 제 이야기를 꺼내었다.
또 아버지의 정부가 사생아를 데리고 나타났다는 소식부터 어머니가 홧김에 맞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몇 개월간 연락을 하지 않는 동안 아멜리아 또한 많은 일이 있었던 듯했다.
우린 남들에겐 하지 못할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절친한 사이였다. 서로를 깊이 믿었고 사소한 모든 것을 공유해 왔다.
‘아멜리아가 있어서 다행이야.’
몸이 약해 친구라고 부를 존재가 몇 없는 내게 아멜리아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단짝이었다.
시에나가 진짜 딸이라도 아멜리아와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우정은 핏줄이 대신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아멜리아가 더 각별하게 여겨졌다.
종이를 가져와 깃펜에 잉크를 푹 적셨다. 아멜리아에게 답장을 할 차례였다.
[아멜리아, 잘 지냈어? 너와 수다를 떨던 순간이 너무 그리워. 네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모를 거야.
…(중략)… 요즘 들어서 악몽이 잦아졌어. 자꾸 꿈에 누군가가 나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고백하자면 꿈에서 듣는 그 비명은 내 것인 것 같아.
실은,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기억이 하나 있어. 그건 바로…….]
깃펜을 쥔 손이 멈췄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아주 오래되고 흐릿한 기억이 하나 있었다.
어려선 두려움에 질려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커서는 스스로도 그 기억에 자신이 없어서 언급하지 못한 것. 그때였다.
똑똑.
깃펜을 움직이려다가 노크 소리에 깜짝 놀라 잉크통을 쏟아 버렸다.
“아… 들어와도 좋아요.”
허둥지둥 책상에 흐르는 잉크를 닦는 사이 오라버니가 들어왔다.
“셀레나. 잠시 시간 돼?”
“아, 네. 잠시만요. 잉크통을 쏟아서…….”
“로지는 어디 가고 네가 하는 거야.”
“빨래를 하러 갔을 거예요.”
바닥에 뚝뚝 떨어진 잉크를 닦는 동안 오라버니가 다가왔다.
번진 잉크를 깨끗이 닦고 허리를 들자 쓰다 만 편지에 시선을 준 오라버니가 보였다.
“아멜리아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어요.”
“미안. 무슨 편지길래 이렇게 길게 썼나 해서 나도 모르게… 그런데 네가 말하지 않은 기억이 있다니 좀 서운하네.”
“별건 아니에요.”
“무슨 기억인데 그래?”
오라버니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았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려 왔다.
그간 함께해 온 가족의 입장에선 내가 감추고 있었다는 기억이 있는 게 못마땅할 법도 하다.
그토록 걱정하고 신경 썼는데 숨긴 것이 있단 걸 알면 얼마나 서운할까.
“…도망쳐야 한단 거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오라버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 첫 기억은 맨발로 거리를 뛰어다니던 거였어요. 그때 전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 애가 말한 대로 얼른 도망치자.’ 그런데 이 기억이 꿈인지 현실인지 불분명해서 말하지 못했어요.”
꿈이 아니라면 내가 생각한 ‘그 애’는 누구일까.
“구조되었을 당시엔 낯선 환경에다가 경황이 없었잖아요. 모든 게 혼란스럽고 겁이 났어서 까맣게 잊어버렸었어요.”
열 살 첫 기억이 시작되던 때, 나는 맨발로 죽어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애가 말한 대로 얼른 도망치자.’
그렇게 생각하며 미친 듯이 도망쳤다. 그러다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사병에게 구조되어서 집으로 인계되었다.
당시의 나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선 반쯤 미쳐 있었다. 제 이름도 몰랐고 기억하는 바도 없었다.
왜 그렇게 도로를 뛰어다니고 있었는지, 뛰기 전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내게 남은 건 두려움이란 감정뿐이었다.
‘셀레나. 아버지다. 아버지!’
이 낯선 아저씨는 누구인데 나를 셀레나라고 부르는 걸까. 얼른 도망쳐야 하는데… 무엇으로부터? 괴물이 나를 쫓아오는 걸까?
기억의 부재에서 오는 막연한 공포에 쉴 새 없이 울음이 났다. 울다 지쳐 잠들고 꿈결에 악몽에 깨서 울기를 수 번.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게 시작된 건 열두어 살 무렵으로 처음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오고 얼마간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그 사실을 아는 오라버니는 심각해진 얼굴을 했다. 나는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고 오라버니는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있다가 말을 꺼냈다.
“셀레나.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니?”
“무슨… 뜻인가요?”
“정말, 아무 기억도 없어?”
“없어요.”
“하녀들의 말이 네가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 같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네트.”
“이네트요?”
오라버니가 꺼낸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한숨을 삼키는 찰나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네트!’
며칠 전 시에나가 내 뒷모습을 보고선 누군가와 착각해 그리 불렀었다.
하녀들과는 옷차림이 다른데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나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뒤돌아 반응한 것이다.
‘네?’
‘아, 미안해요. 셀레나였네요.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과 착각했어요.’
시에나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끝이었다.
“이네트라는 이름에 반응했다고 들었어. 정말 기억이 없는 게 맞아?”
“시에나의 목소리라서 저도 모르게 그런 걸 거예요. 이네트라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워낙 흔한 이름이잖아요.”
오라버니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 믿지 못하고 있다. 감정을 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에나의 등장으로 힘이 들 오라버니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다 치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그건 아니라고 부정하려는데 오라버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셀레나. 시에나에게 마음을 여는 건 어때? 요즘 널 보면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 같아.”
오라버니의 말투엔 가시가 가득했다. 음성은 딱딱했고 눈빛은 차가웠다. 오라버니야말로 내가 알던 오라버니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뜻인가요?”
“네가 시에나를 계단에서 밀었다며.”
“시에나를 밀다뇨? 그런 적 없어요.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지어내던가요?”
“네가 교묘하게 시에나를 괴롭히고 있는 걸 알아.”
“아,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맹세코 그런 적 없어요!”
“셀레나. 아닌 척해도 다 알고 있어. 시에나가 나타나서 불안한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계단에서 미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었다. “
“아니에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셀레나! 거짓말이라면 그만해!”
억울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내가 시에나를 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 오고 언성이 높아졌다.
“오라버니께서 보셨나요? 아니면 누군가 제가 시에나를 미는 걸 보기라도 했던가요? 그런 적이 없는데 제가 시에나를 밀었다고 어떻게 확신하세요.”
어떻게 오라버니가 나를 의심할 수 있을까. 시에나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어디서 그런 얼토당토않는 소리를 듣고선 내가 시에나를 괴롭혔단 말을 하는지…….
“시에나가 그러던가요?”
“네 잘못을 뉘우치긴커녕 그 애를 물고 늘어지다니 실망이다. 셀레나!”
“오라버니!”
나도 모르게 비명과 같은 부름이 나왔다. 너무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털어놓았다.
“시에나는 제 호의를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어요. 그녀의 말이라면 믿어선 안 돼요.”
오라버니의 얼굴에 짙은 실망이 번져갔다.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이미 오라버니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시에나를 괴롭히고 있으며 시에나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실망이다. 셀레나. 네가 스스로 털어놓고 반성한다면 내 선에서 덮으려 했는데 안 되겠어. 이 문제는 아버지께 올라갈 예정이니 그리 알아.”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오라버-.”
“듣기 싫다! 네 방에서 반성이나 하고 있어라.”
내게 차가운 말을 남긴 오라버니는 매섭게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서운했다.
피 섞이진 않았지만 아멜리아와 나처럼 제법 끈끈한 남매지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믿어 줄 줄 알았는데… 혈육의 정은 시간이 이길 수 없는 듯했다.
‘그렇게 보면 이 집에서 나는 혼자구나.’
유일하게 에스타리온의 피를 잇지 않은 가짜. 진짜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냈던 불순물. 기억이 불안정한 반푼이. 그게 바로 나였다.
“하…….”
서러운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일부러 셀레나인 척을 했다는 누명을 쓴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 시에나를 길러 준 여인의 친구가 저택에 와서 증언을 하면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