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7화 (8/134)

<07>

“시에나를 경계하는 거야?”

내 방을 찾아온 오라버니가 물었다. 그 말에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뇨. 절대요.”

“그럼 시에나에게 좀 마음을 여는 건 어때?”

“마음이라면 열었어요.”

“거짓말.”

“…….”

오라버니의 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확인하고 있던 서류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오라버니의 말이 맞다. 시에나에게 마음을 연 건 거짓말이다.

마음을 열라치면 그녀의 존재가 나를 위협하는 것 같아서 그녀가 두려워졌다. 그리고 그런 내가 미워져서 스스로를 저주하길 반복했다.

“네가 뭣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알아.”

“죄송해요.”

“미안할 것 뭐 있어. 다 가족이 되는 과정인 건데. 서로 부딪치며 맞춰가는 거지.”

“저도 잘하고 싶어요. 그런데…….”

시에나가 제 말을 곡해해요. 이 말을 내뱉어 봐야 그녀를 음해하려는 것밖에 안 될 게 뻔했다. 그래서 한숨과 함께 말을 삼켰다.

“제가 더 잘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래. 널 믿어.”

이렇게 날 신경 써 주는 오라버니가 고마웠다.

살가운 동생이 아니라 다른 집 남매들보다 건조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오라버니는 늘 이렇게 내게 다정한 형제가 되어 주었다.

기억을 잃은 채 이 집에 들어왔던 때엔 바쁜 아버지 대신 나를 어화둥둥 업고 다니기도 했었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

“네. 약도 꼬박꼬박 먹고 있어요.”

“악몽은?”

“…….”

“여전히 꾸는구나.”

“괜찮아지고 있어요.”

“셀레나. 넌 거짓말이 서툴러. 대체 뭣 때문에 악몽을 꾸는 걸까. 네가 걱정돼.”

“저도 모르겠어요.”

“여전히 기억나는 건 없고?”

“네. 눈을 뜨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곧잘 악몽을 꿨다. 끔찍한 무언가가 나와서 심장이 방망이질치고 두려움에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기억나는 건 단 하나, 어린 소녀의 비명소리다. 하지만 그 비명은 현실의 내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잠결에 내뱉는 비명소리에 정신이 들면, 식은땀과 속절없이 뛰는 심장만이 남았다.

“심리치료를 다시 받아 볼 생각은 없고?”

“생각해 볼게요.”

“그래. 필요하다면 뭐든 해 보도록 해.”

그렇게 염려를 쏟아 낸 오라버니는 검술 연습을 하겠다며 내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도무지 읽히지 않는 서류를 읽고 또 읽었다.

시에나에게 가서 당신이 오해를 하고 있다고 말할까, 아니면 오해를 풀고 싶다고 할까.

‘일부러 그러는 걸까.’

말하는 게 서툴러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건지도 모른다. 시에나를 의심하긴 싫었다.

설사 일부러 그런다 해도… 그녀가 나를 미워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 때문에 귀한 백작가의 영애가 하녀로 자란데다가 가족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까.

‘그렇다한들 시에나가 그러는 게 용납되는 건 아니지만…….’

결국 깃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내저었다. 시에나를 의심하고 그렇게 몰아가고 싶은 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시에나가 오해할 일이 없도록 내가 말조심을 하면 되는 문제인걸.’

모든 화살을 내게로 돌렸다. 기억이 없어서 다른 이의 인생을 망친 내가 용서되지 않아서다.

내가 스스로를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하는지는 오직 나만이 알 테다. 불안정한 정신, 나약한 마음까지… 내가 너무 싫었다.

“후우. 정신 차리자. 다 잘될 거야. 다…….”

다 잘되길 바랐다. 진심으로. 그러나 그건 내 바람에 불과했다.

* * *

연무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던 시온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그곳엔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뛰어오는 시에나가 있었다. 셀레나와 시에나는 정말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쌍둥이가 아닐까 싶도록.

물론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셀레나는 내성적인 성미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데다가 지적이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반면 시에나는 활발하고 기운찬 인상이었다. 셀레나보다 조금 더 화려한 얼굴에 선이 가늘고 새침한 분위기가 흘렀다.

“와. 진짜 검이에요?”

“그래. 위험하니 함부로 만질 생각 마.”

시온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시에나는 특유의 시원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시온이 수건으로 얼굴과 목덜미를 닦으며 말했다.

“적응은 잘되고 있어?”

“조금 힘들긴 한데, 그래도 잘되고 있어요.”

“그래? 다행이야. 잃어버린 10년을 따라잡는 게 많이 힘들 거야. 네가 고생이 많아, 시에나.”

“아니에요. 그리고 셀레나가 많이 도와주는걸요.”

“아참, 그러고 보니 셀레나와 조금 오해가 있는 듯한데.”

“오해요?”

시온이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아버지는 시에나의 말에 조금씩 흔들리는 눈치였지만 그는 달랐다.

셀레나가 처음 집에 온 이후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그가 키우다시피 한 게 셀레나였다. 때문에 그는 셀레나를 잘 알았다.

그가 아는 셀레나는 홀로 속앓이를 하면 했지 시에나에게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네게 말실수를 했더라도 고의는 아닐 거야. 서로 잘 맞춰가 보는 건 어때? 그리고 나나 아버지께도 의지하도록 해. 너무 셀레나에게만 기대는 건 그 애에게도 네게도 안 좋을 거야.”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모두가 무척 바빴다. 아버지인 에스타리온 백작은 황궁에서 중역을 맡아 엄청난 업무량을 자랑했다.

시온, 그도 기사단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일했고, 셀레나는 셀레나대로 안주인 노릇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셀레나에게 맡길 일이 아니지. 네가 적응하는 일은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이긴 해.”

그나마 셀레나가 시간 운용이 쉽단 이유로 시에나를 전담하다시피 했지만 이젠 자신이 시간을 더 빼서 셀레나의 부담을 줄여 줘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느라 시온은 시에나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가는 걸 확인하지 못했다. 붉게 번진 시에나의 시선이 꼭 시온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녀는 그런 눈빛을 지운 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오라버니는 외국어를 잘하시죠?”

“귀족 가문이라면 누구나 외국어 한두 개는 하기 마련이지.”

“그렇군요. 그럼 혹시 ‘****’,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나요?”

시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갔다. 그 모습에 시에나의 한쪽 입꼬리가 희미하게 씰룩거렸다.

“그 말, 어디서 들은 거냐?”

“무슨 뜻인데 그러세요?”

그녀는 시온의 눈치를 보는 척 조심스레 물었다. 시온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시에나가 말한 외국어는 제국어로 ‘쓸모없는 년’이라는 뜻이었다.

그 뜻이 좋지 않아, 시에나에게 그런 말을 한 사용인이 있다면 즉시 처벌을 해야만 했다.

“별 뜻 아냐.”

“셀레나가 가끔 저를 보며 말하더라구요. 무슨 뜻인지 궁금했어요.”

“셀레나가 말이냐?”

“네.”

시온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시에나가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시온이 다시금 물었다.

“확실해?”

“무슨 뜻이세요? 제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르는 바보란 뜻이에요?”

시에나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시온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 오해했다면 미안. 외국어라서 네가 발음을 잘못들은 건 아닌지 고민했던 것뿐이야.”

“제가 아무리 무식해도 들은 걸 착각하진 않아요.”

“시에나.”

시에나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한심한 것 같아서 말이 심하게 나왔어요.”

“한심하다니,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항상 셀레나를 보다 보면 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요. 셀레나는 예쁘고 우아하고… 거기다가 외국어도 잘하고 모르는 게 없잖아요. 반면 저는 무식하고 예법도 몰라서… 전 백작가에 나타나면 안 됐던 것 같아요.”

“아냐, 네가 나타나서 아버지도 나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10년을 하녀로 살았어요.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대로 하녀로 살았으면 이런 생각도 안 들었을 텐데. 이곳에 온 뒤 전 제가 너무 부끄러워졌어요.”

시에나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 아팠다. 시온은 눈물을 글썽이는 시에나를 서툰 손길로 토닥여 주었다.

시에나가 다시 가족을 되찾고 신분이 복원되어 마냥 좋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다가…….

‘셀레나가 정말로… 쓸모없는 년이라는 말을 했다고?’

시에나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아니었다. 시에나가 다른 유사한 발음을 착각해 말한 걸 수도 있다.

눈물을 훔치던 시에나는 시온의 혼란을 읽었다. 그가 단번에 믿지 못하는 건 그녀 또한 예상한 바였다.

“오, 오라버니. 실은 전 이곳이 조금 무서워요.”

“무섭다니?”

시에나는 입술을 달달 떨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시온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교묘하게 시온의 기색을 살피는 중이었다.

“누가 널 괴롭히는 거야? 시에나, 눈치 보지 말고 말해. 나한테는 말해도 돼.”

“저, 저는 무식해서 아는 바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걸요. 거기다가 여기에서 오래 지낸 게 아니라 제 편이랄 것도 없고요.”

“하녀들이 너를 괴롭히니? 너를 무시해?”

“아, 아, 아뇨. 어떻게 그러겠어요.”

“그럼 하인들이니?”

“그게…….”

시에나가 뜸을 들이자 시온이 그녀를 재촉했다. 그는 간신히 찾은 친동생이 힘겹게 자란 것도 모자라서, 가장 행복해야 할 집이 무섭다는 말을 한 것에 적잖게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네 오빠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 되어 줄 테니 나를 믿어.”

“하지만 오라버니는 셀레나의 오라버니이기도 하잖아요.”

시온의 두 눈에 경악이 번졌다.

“셀레나가 너를 괴롭혔던 거야?”

아닐 거야. 설마 셀레나가.

시에나가 한 말을 부정하는 것과 동시에 숱한 의심이 솟아났다.

시온은 그간 셀레나가 시에나를 압박하는 걸 느껴 왔다.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시에나의 머릿결과 푸석한 손, 제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것 같다던 시에나의 고백, 자수나 사과파이를 두고 했다던 교묘한 견제까지.

한 번 씨가 뿌려진 의심은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싹을 틔우고 조금씩 조금씩 확신이 되어갈 것이다.

“대체 나와 아버지가 모르게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니?”

혼란스런 말투에 시에나가 슬그머니 답했다. 그녀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실은… 지난번 계단에서 미끄러진 거요. 셀레나가 저를 민 게 맞아요.”

“뭐…라고?”

“그날 제가 화가 많이 나서 셀레나에게 모진 말을 했잖아요.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뒤로 셀레나가 무서운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충격이 가득한 시온의 얼굴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모든 게 그녀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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