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많은 스트레스를 받자 결국 몸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웩!”
“아가씨. 진통 포션을 가져올게요. 제발 드시고 푹 쉬셔요. 네?”
“아냐. 진통 포션은 위급한 상황에나 써야 하는걸. 그러니… 우욱!”
내 몸은 건강한 편이 못 됐다. 어려서부터 쉽게 아프고 작은 일에도 두통을 느꼈다.
두통이 지속되면 속이 견디지 못해 이렇게 토하기 마련이었다.
“아가씨. 안색이 안 좋아요.”
로지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자리를 뛰쳐나갔다. 그녀는 결국 진통 포션 하나를 가져와 억지로 내밀었다.
“안 드시면 아가씨께서 또 구역질을 하고 계신다고 백작님께 말씀드릴 거예요.”
“로지.”
“아가씨, 제발요. 약이 있는데 왜 굳이 참으려고 하세요.”
“진통 포션은 아주 귀한-.”
“아가씨는 진통 포션보다 더 귀한 사람이세요!”
꽥 소리를 내지른 로지가 포션의 뚜껑을 땄다. 뻥하고 뚜껑이 열리며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드셔요. 아가씨.”
로지의 단호한 말에 한숨을 삼켰다. 이미 뚜껑을 연 진통 포션을 다시 넣어 두기도 뭣해서 포션을 받아다 쭉 삼켰다.
신관이 신성력을 이용해 만든 진통 포션은 한 병에 평민들의 1년 치 생활비가 들어가는 아주 귀한 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도 아닌 두통에 쓰기엔 너무 과한 처사였다.
‘고통을 마비시키는 약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약을 개발하면 좋으련만, 의약품의 개발은 신성력과 신의 권능에 반발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많은 이들이 꺼려 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약학 분야의 개발은 문명에 뒤떨어져서, 신관을 만날 돈이 없는 평범한 이들은 대개 민간요법과 돌팔이 의사에게 의존하는 중이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으응. 한결 나아.”
“그러니 그냥 진통 포션을 드시라니까요! 안색도 훨씬 좋아지셨어요.”
로지가 싹 비워진 진통 포션 병을 거두어가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확실히 두통이 잦아들자 한결 살 것 같았다. 늘 느끼지만 진통 포션의 효과는 기적적이기까지 했다.
“한 시간만이라도 더 누워 계세요. 그동안 제가 먹을 걸 챙겨서 올라올게요.”
“그래. 다녀오렴.”
침대에 피로한 몸을 뉘었지만 마냥 누워 있는 게 편한 건 아니었다. 자꾸 시에나가 한 말이 떠올라서다.
‘아무래도 제가 있어서 집에서 자리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기어코 감추려 하던 내 속내를 까발린 것 같았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았고.
‘나 정말 못됐어. 시에나의 자리를 차지해 놓고 그녀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니.’
한숨을 내쉬고선 일어나 책장을 들추었다. 그곳엔 어려서부터 써 온 일기장이 빼곡히 자리했다.
오랫동안 쌓여 온 일기장 중 가장 첫 번째를 꺼내 확인했다. 납치를 당했다가 돌아온 무렵 쓰기 시작한 일기였다.
[내 이름은 셀레나 에스타리온이라고 한다.]
첫 일기의 시작치고는 아리송한 문장으로 시작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기억이 온전치 않은걸.’
나는 백작가에 오기 전의 기억이 없다. 이제까진 납치를 당한 충격으로 모든 기억을 잃은 줄로만 알았는데 애초에 진짜 셀레나가 아니었다.
‘대체 난 누구인 걸까.’
누구길래 시에나와 저토록 닮았으며 왜 기억이 없는 걸까.
찾을 길 없는 기억에 가슴이 갑갑해져 올 무렵,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로지.”
노크를 한 이는 로지가 아니었다. 갑작스런 손님은 시에나였다. 얼른 일기장을 꽂아 넣고 시에나를 맞았다.
“시에나. 몸은 좀 괜찮아요?”
“아, 네에…….”
시에나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을 때 그녀가 내게 보였던 분노 때문인 듯했다.
“멍이 많이 빠졌네요. 다행이에요.”
“그보다 셀레나. 그게…….”
“괜찮아요. 전.”
그녀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아 먼저 얘기를 꺼냈다. 시에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어요. 그런 일로 화내지 않아요. 그러니 사과하지 마요.”
어째서인지 그녀의 기색이 불편해 보였다. 사과를 하지 않아서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라 꼭…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말실수를 한 걸까? 마음 상할 일이 있었던 걸까? 속이 시끄러워질 무렵 시에나가 표정을 지운 채 물었다.
“자수 놓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바느질은 배웠어도 자수는 배워 본 적이 없어요.”
“물론이죠. 언제가 좋아요?”
“언제든 괜찮아요.”
시에나가 샐쭉하게 눈을 접었다. 그녀의 눈에 붉은빛이 번져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존재에 위협감을 느낀다는 건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불안한 예감을 무시했다.
하지만 본능을 무시한 대가일까. 오래 지나지 않아 일이 터졌다.
“와, 시에나. 재능이 대단해요. 정말 맛있어요!”
어느 오후 시에나가 사과파이를 만들어서 가져왔다. 시에나의 요리 실력은 대단하다고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주방 하녀인 엠마가 오기 전에 남부 출신의 요리사가 요리를 했었어요. 그분이 사과파이를 정말 잘 만들었는데, 시에나가 만든 건 그보다 더 맛있어요.”
시에나가 이빨을 내보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부스스했다. 손톱은 정리가 되었지만 희미하게 남은 손톱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참. 자수 말이에요. 라벤더를 새기는 게 너무 어려워요.”
“라벤더가 어렵긴 해요. 라벤더 말고 다른 것부터 새기고 마지막에 하는 건 어때요?”
“그것도 괜찮죠.”
우린 사소한 얘기를 하며 사과파이를 나눠 먹었다. 언제쯤 밀러 부인이 와서 시에나의 교육을 도와줄 것인지부터, 무도회 준비 전까지 끝낼 것들 등등.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 가족들이 모두 모인 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아버지! 제가 새긴 자수 한번 보실래요?”
시에나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얘기를 꺼냈다.
“자수?”
“요즘 셀레나에게 자수를 배우고 있거든요.”
“어디 보자꾸나.”
오라버니가 눈썹을 치켜떴다. 자수는 또 언제 가르쳤냐는 의미였다.
“시에나가 손재주가 좋아요. 사과파이도 정말 잘 만들어요.”
“사과파이?”
“얼마 전 사과파이를 만들어서 저와 같이 나눠 먹었어요.”
자세한 설명을 하려는 찰나, 내 전담 하녀 로지가 나를 불렀다.
“아가씨. 한스 씨가 지난번 올린 서류가 문제가 있는 것 같대요.”
“그래?”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양해를 구한 뒤 한스를 만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한스와 예산 서류에 대해 얘기를 나눈 뒤 돌아와 거실 문을 열려던 때였다.
“하하하!”
아버지의 웃음소리였다. 감정 표현이 인색하고 아버지께서 소리 내어 웃는 걸 본 적이 없다.
확실히 밝고 명랑한 시에나의 존재는 집안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 냈다.
“이건 뭐냐. 꽃이야, 애벌레야.”
“아이참! 오라버니, 이건 라벤더 꽃이라구요!”
아버지는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고, 나와 예의를 차리던 오라버니는 시에나와는 장난을 치며 여느 남매들처럼 어울렸다.
거실 문 너머 들리는 화기애애함에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가짜였으니까.
가짜는 진짜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니 시에나가 오기 전 우리 집의 분위기가 침잠해 있었겠지.
‘아…….’
숨이 막혔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존재가 혐오스러웠다.
시에나를 질투하는 스스로가 치졸하게 여겨져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라벤더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해 보고 싶어서 어떻게 저떻게 해 봤어요.”
“그런 거면 셀레나에게 물어보지 그랬어.”
오라버니의 말에 시에나가 대답했다.
“셀레나가 라벤더는 제 수준으로는 많이 어려울 거라 다음에 하래요.”
화들짝 놀라서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시에나는 진실을 말했는데 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존재했다.
시에나의 표현으로는 내가 그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전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서 해명을 하자 하니, 시에나가 있는 앞에서 해명해 봐야 그건 그녀를 향한 또 다른 압박처럼 비춰질뿐더러 변명이 될 것 같았다.
“셀레나가? 셀레나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이냐?”
아버지의 격양된 음성이 들렸다. 심장이 방망이질했다. 손이 떨렸다. 시에나가 왜 그러는 걸까. 아니, 애초에 내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던 걸까?
나는 내 기억을 못 믿는다. 어려서 기억도 없을뿐더러 제법 나이가 들어서도 기억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시에나에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했을 수도 있다.
설사 그런 적 없다고 한들, 내가 기억력에 문제가 있음을 아는 가족들이 내 말을 믿을 리가 없다.
“막 그렇게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어요. 그냥 아직은 제 수준이 많이 낮으니 지금은 넘어가고 후에 실력을 키워서 하는 게 어떻겠냐는 뜻이었는걸요.”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이번엔 오라버니가 한 마디 던졌다. 오라버니가 어떤 얼굴을 했을지 상상이 가서 가슴이 더 두근거렸다.
“셀레나가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
“어… 오라버니, 묻지 마세요.”
“이 아비에게 말해 봐라. 괜찮다.”
“그게…….”
“시에나. 우린 이제 가족이야. 넌 내 동생이고.”
“실은, 제가 얼마 전에 사과파이를 나눠 먹었다고 했잖아요.”
“그래. 그랬지.”
“셀레나가 맛있다고 해 줬는데…… 주방장들의 실력과 비교당했어요.”
숨을 삼켰다. 그녀는 내가 한 말을 교묘하게 곡해해서 상황을 왜곡하고 있다.
당장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내 뜻은 그게 아니라고 해명해야 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죄송해요…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우연히 듣고 시에나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아서요.”
세 사람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시에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아버지의 시선이 세심하게 시에나의 기색을 살폈다. 그다음은 나였다. 턱하니 숨이 막혔다. 왜냐면…….
“셀레나.”
아버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노기와 실망이 교차된 표정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 맞아요! 나쁜 뉘앙스는 아니었어요. 그러니 오, 오해하지 말아요.”
시에나가 얼른 나를 감쌌다. 오라버니의 턱에 힘이 콱 들어갔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 사람의 어두워진 안색을 보니,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변명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