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건 의심이었다. 아버지께선 나를 원망하고 있다. 왜 시에나를 더 신경 써 주지 않았냐는, 그런 원망 말이다.
“죄송해요. 제가 더 신경 쓸게요.”
시에나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녀는 잠시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얘기했다.
“셀레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셀레나는 저한테 옷, 신발, 모자까지 정말 많은 걸 사 줬어요. 아, 이 손톱은… 오전에 하인들을 도와서 정원 일을 하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네가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아버지의 음성이 미어졌다. 아버지의 붉어진 눈시울에 가슴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게 심심해서…….”
“심심하면 셀레나나 우리에게 말하지 그랬느냐.”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바쁘시고 셀레나도 책을 읽거나 집안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이젠 안 그럴게요.”
“죄송하다니…….”
이를 악물어 아버지의 양턱에 힘이 콱 들어간 게 보였다.
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시에나, 미안해요. 제가 더 신경 쓸게요.”
“셀레나. 당신까지 왜 이래요. 충분히 저한테 잘해 주고 있잖아요. 글도 가르쳐 주고, 호칭도 알려 주고… 아무튼 셀레나.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녀에게 사과하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에나와 함께하는 한 난 영원히 가해자일 것이라고.
‘이건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내가 자책을 해야 하는 거지……?’
시에나의 인생을 빼앗은 건 내 잘못이 아닌데… 억울해서 숨이 턱하니 막혔다.
언제까지나 그녀에게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될 테다. 그 삶을 견뎌 낼 수 있을까?
그날 나는, 가슴이 무거워 불면의 밤을 보냈다.
* * *
마음이 괴로울 때면 황태자 전하께서 선물해 주신 스카프를 들여다보았다.
그분께서 주신 스카프에는 제국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성배가 그려져 있었다.
‘성배’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성수가 뿜어져 나오는 항아리로, 그것을 마신 병자는 병에서 해방된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은 사라져서 이 나라에 남은 보배는 ‘에스타리온의 보배’가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그 존재가 구전되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가 보배의 수호자라서 이런 스카프를 선물해 주신 거겠지.’
손끝으로 스카프 표면을 매만졌다. 손을 깨끗이 씻었음에도 혹시나 손때가 묻을까 염려스러웠다.
매끄러운 감촉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카프를 고르는 전하의 모습이 상상되질 않아서다.
‘다른 사내들처럼 별을 따다 줄듯이 행동하지 않으셔서 더 좋아.’
제국의 황태자이자 내 약혼자인 필립소 데 마르티네슨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분의 비밀스런 미소 아래엔 불필요한 언어가 가라앉았고 어른스런 눈빛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나는 그분이 좋았다. 감히 내가 탐할 분이 아니라 이 마음을 접어야 함에도 그분이 너무도 좋았다.
“셀레나?”
“아, 시에나.”
소리 없이 방에 들어온 시에나가 내 스카프를 보며 물었다.
“그건 뭐예요?”
“스카프예요.”
“아뇨. 그냥 스카프라기엔 너무 애틋해 보여서요.”
“아…….”
시에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황태자 전하와 파혼하고 나면 시에나가 다음 약혼녀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 스카프가 전하께서 선물했단 걸 말해도 되는 걸까?
‘아냐. 오히려 말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알게 되면 더 속상할지도 몰라.’
그런 판단에 시에나에게 조심스레 얘기해 주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선물하신 거예요.”
“전하께서요?”
시에나는 황태자라는 단어에 본 적 없던 얼굴을 했다. 그녀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제가 전하의 약혼녀예요.”
시에나가 헙하고 숨을 삼켰다. 입 안이 썼다. 약혼은 조만간 파기될 테다. 굳이 아버지와 의논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항이다.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라니, 세상에.”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시에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붉은 기 섞인 눈이 스카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역시 셀레나. 당신은 대단해요.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라니!”
내가 잘나서 전하의 약혼녀가 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혈통과 정치적인 이유로 약혼녀가 되었기 때문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심스레 스카프를 포장해 다시 서랍에 넣었다. 이 스카프까지만이다. 내가 황태자 전하를 좋아할 수 있는 건.
서랍 문을 닫고 몸을 돌리자 시에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눈이었다.
“시에나?”
진지하게 메마른 눈빛이건만 그 속엔 붉게 일렁이는 불꽃이 존재했다. 짙은 열망과 강력한 욕망 따위가 느껴졌다.
시에나가 낯설었다. 밝게 웃으며 깔깔거리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내 얼굴이 굳어갈 무렵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어딘가 힘이 들어간 미소였지만 이어지는 말만큼은 진심이 가득했다.
“셀레나. 당신이 부러워요. 그리고 원망스러워요.”
잘게 떨리는 손을 치맛자락 사이에 감췄다. 갑작스런 고백이었지만 그녀는 충분히 그런 감정을 가질 만했다.
혀가 얼어붙었다. 입술이 무거웠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그게 위로가 못 될 거란 걸 알아서 함부로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정말로… 기억이 없어요?”
날 선 시선이 나를 꿰뚫을 듯했다. 지독한 눈빛이었다. 특유의 섬세한 눈매가 풍기는 예민한 분위기에 겁이 나는 것도 같았다.
“미안해요. 정말로 기억이 없어요. 저도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원래 어떤 이름이었는지도 몰라서, 제가 셀레나라길래 그런 줄 알고 컸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턱하니 숨이 막혔다. 누군가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당신 스스로가 셀레나가 아니었다는 걸 기억했다면 아버지께서 저를 찾았다고 착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 나도 밖에서 그 고생을 하며 크진 않았겠죠.”
“…미안해요. 시에나, 너무 너무 미안해요.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당신이 기억만 있었다면 나도 당신처럼 아름답고 우아했을 거예요. 아는 것도 많고… 이 나이에 가정교사를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
“어떤 말로도 당신 과거가 보상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아요. 정말로 미안해요.”
울 자격도 없는 게 나였다. 눈물을 꾹 참고 떨림을 견디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시에나의 시선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시에나는 몸을 돌려 내 방을 나갔다.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어서 그녀를 쫓아갔다.
시에나는 계단 난간을 붙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말했다.
“시에나. 얘기 좀 해요.”
“그거 알아요? 당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원래는 내 것이었어야 했어요. 당신 그 예쁜 머리, 잘난 지식, 약혼자까지 다!”
시에나가 어깨를 흔들어 내 손을 쳐냈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시에나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가 서 있는 바닥을 무너트렸다.
“나, 나, 나는… 나는… 미, 미안해요. 시에나,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난 정말로-.”
“그 이름도 내 것이었어요. 내가 셀레나 에스타리온이에요! 당신이 아니라!”
고개가 떨어져 나갔다. 내 존재가 끔찍하게 여겨졌다.
나만 아니었다면, 내가 기억도 제대로 없는 반푼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혼자 있고 싶어요.”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시에나가 내게서 몸을 돌리던 그 순간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리더니 그녀의 형상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꺅! 시에나!”
손을 뻗어 시에나를 붙들려 했지만, 그러기에 내 몸은 무겁고 느렸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모습이 마법을 건 것처럼 느리게만 느껴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시에나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이지만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표정이…….’
그 순간 시에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시에나-!”
“아, 아가씨! 시에나 아가씨!”
내가 계단을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복도를 치우던 하녀들이 몰려왔다. 시에나, 시에나! 그녀를 흔들며 의사를 부르짖는 찰나, 작은 웅성거림이 들렸다.
“셀레나 아가씨가 시에나 아가씨를 민 것 같아.”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이 든 첫 순간이었다.
* * *
시에나가 내게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원망을 쏟아냈다는 게 의심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의심일 뿐 진짜가 되진 못했다.
오라버니도, 아버지도 나를 믿어 주었다. 아니, 최소한 오라버니는 내가 민 게 아님을 확신하였다.
“그 애도 네가 민 게 아니라고 했고 계단이 낡아서 닳은 부분이 있다 보니 미끄럼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어. 사용인들 사이에서 도는 말은 신경 쓰지 마.”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내가 밀었다고 확신하진 않았지만, 홀로 넘어졌다는 시에나의 말을 완전히 믿지도 않았다
절반의 믿음, 절반의 의심. 그리고 그리 중요할 것 없는 진실.
이마에 커다란 멍을 단 시에나가 자리에 누워서 설명했다.
“셀레나가 민 게 아니에요. 제가 미끄러졌어요. 물론 계단에서 구르기 직전에 말싸움을 하긴 했지만요.”
말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분노 표출이었지.
하지만 이런 점을 정정했다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 될 게 뻔했다.
그녀가 왜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친 직후라 정신이 없어서 단어 선택에 실수가 있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셀레나는 오히려 절 잡아 주려고 했어요. 그러니 사용인들의 입단속을 시켜 주세요.”
“그래. 그러마. 몸은 괜찮으냐?”
“그럼요! 마구간에서 먹이를 주다가 말에게 걷어차였을 때보단 덜 아픈걸요!”
고단하게 자란 시에나가 안쓰럽고 가엾었던 아버지는 씩씩하게 웃는 미소에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방을 나왔다. 내가 자리를 비움에도 두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 * *
“셀레나?”
시에나가 계단 아래로 넘어지고 며칠 뒤, 복도에서 만난 오라버니는 내 얼굴을 확인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아?”
“오라버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계단에서 넘어질 때 분명 시에나는…….
‘웃고 있었어.’
분명 웃고 있었다. 떨어질 때, 그녀의 입이 환히 올라가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분명히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니, 아니에요.”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한들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나조차 내가 본 것을 의심했을 정도니까.
그때였다. 문 너머로 가슴을 후벼 파는 대화가 흘러나온 건.
“아버지. 셀레나에게 신경을 써 주세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보였어요.”
“너 때문에 말이냐?”
“네. 아무래도 제가 있어서 집에서 자리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왜 그 순간 오라버니의 눈치를 봤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내가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내 것이 아닌 것을 빼앗았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중요한 건 딱딱하게 굳은 오라버니의 얼굴에 숨이 막혔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