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3화 (4/134)

<03>

“시에나. 오늘은 할 게 정말 많아요.”

시에나가 나타나고 한 달간,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시에나의 신분을 정리하기 위한 서류는 둘째치고, 본래 그녀가 누렸어야 할 것들을 되돌려주는 것들을 꼽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할 게 많다고요?”

시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들어오고 처음 보름간은 일종의 적응 기간이었다.

저택의 하녀들에게 그녀를 소개했고, 기강을 잡고, 풍성한 먹거리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도왔다.

무엇보다 가족들과 시에나가 서로에게 경계를 풀고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서로 일상을 공유하고 상대의 존재에 익숙해져가는 시간 말이다.

“옷, 구두, 모자, 리본… 시간이 나면 헤어살롱도 가야 해요.”

“어…….”

시에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져갔다. 그녀가 얼떨떨하니 대답했다.

“하지만 셀레나가 준 것도 많은걸요. 굳이 살 필요가 있을까요?”

“시에나도 시에나만의 물건이 있어야죠. 제가 준 것보다 더 좋은 새것으로요.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질 거예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한 시에나를 끌어당겼다. 그녀를 데리고 마차로 갔다. 그러자 시에나가 갑자기 고개를 내저었다.

“전 괜찮아요. 저 때문에 그렇게 큰돈을 쓸 필요는 없어요.”

“시에나. 큰돈도 아닐뿐더러, 설사 큰돈이라 해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기꺼이 쓸 수 있어요.”

“셀레나…….”

시에나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셀레나는 원래 시에나의 이름이었다.

가짜가 진짜의 이름을 갖게 되고 진짜가 엉뚱한 이름을 쓰게 된 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 모른다.

거기다가 내 옷, 내 구두, 내 가족… 모두 그녀가 누렸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얼른 시에나에게 내 것이라 착각했던 것들을 돌려주고 싶었다.

가족을 나누는 건 조금 겁이 났지만 감히 거기에 불만을 가질 수는 없다. 오라버니도, 아버지도 본래는 시에나의 가족이었으니까.

“가요. 얼른.”

시에나와 나를 태운 마차는 빠르게 번화가로 이동했다. 마차 안에서 그녀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좋아하는 색, 선호하는 디자인, 잘 어울리는 스타일부터 적응은 잘되고 있는지, 혹여 그녀를 무시하는 하녀는 없는지, 가족들과의 사이는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등등.

“따로 갖고 싶은 건 없어요?”

“어… 실은 하나 있긴 해요.”

시에나가 힐끔 내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눈치를 보자 마음이 불편했다.

“뭔가요?”

“나중에요. 나중에 발견하게 되면 말할게요.”

당장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라 굳이 캐묻지 않았다. 곧 마차가 멈췄다.

번화가에 도착한 우리는 한 곳 한 곳, 상점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샀다.

시에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실크로 만들어진 슈미즈를 볼 땐 손을 덜덜 떨기까지 했다.

“이런 걸 제가 정말로 입어도 된다고요?”

“시에나. 이건 원래 당신이 누렸어야 하는 것들이에요.”

오라버니와 아버지는 무심한 성격에다가 같은 여자가 아니라서 세심하게 챙겨 주는 데에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시에나에게 다른 것도 아닌, 입다 만 슈미즈를 줄 수는 없다.

그녀의 남루한 슈미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던 터라 실크 소재의 슈미즈만 다섯 벌은 샀다.

“셀레나. 그건 너무 많아요.”

“괜찮아요. 다 쓰이게 될 거예요.”

“하나 같이 너무 비싼데다가, 다 하면 가격이 얼마예요.”

“아버지께서 시에나에게 사 주라며 돈을 아주 많이 주셨어요.”

셀레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따로 예산을 받아 왔다. 비단옷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가구를 교체해도 좋고 바라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사서 안겨 줄 생각이었다.

시에나는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듯 안절부절못한 채 제안했다.

“셀레나, 당신 옷은요?”

“전 괜찮아요. 필요한 건 다 있어요.”

“제 것만 사는 건 싫어요. 셀레나 것도 사요.”

시에나는 특유의 똑 부러진 말투로 제 마음을 표현했다. 하녀들의 손에 들린 봉투를 확인했다.

보석함, 구두 여섯 켤레, 전신 거울, 깃털이 꽂힌 모자 여덟 개, 배달 올 드레스가 스물한 벌… 이외에도 산 게 아주 많았다.

“혼자 이 많은 걸 사는 건 미안해서 안 돼요.”

뒤늦게 시에나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해 주고 싶단 마음만 앞서서 정작 그녀의 마음을 신경 쓰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음… 마침 머리를 묶을 때 쓰는 리본이 다 떨어지긴 했어요. 그러니 리본을 사러 가요.”

사실 리본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시에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옷이나 구두는 충분한걸.’

제일 부담 없이 사기엔 리본이 좋았다.

“리본이요?”

“자매끼리 서로 리본을 묶어 주는 것도 재밌을 거예요.”

자매란 단어에 시에나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엉뚱한 여자애가 제 자리를 차지한데다 자매까지 된 게 그녀의 입장에선 기분 상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상했다면-.”

사과하려는 찰나 시에나가 내 말을 잘랐다.

“제가 골라 줘도 될까요?”

그 말이 위안인지 안도인지 모를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에게 고마웠다.

시에나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함께 잡화점으로 갔다.

“셀레나. 셀레나는 어떤 색을 좋아해요?”

시에나가 내 얼굴 옆에 흰 리본을 대어 보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다른 리본들을 훑었다.

“흰색이요. 흰색을 좋아해요.”

“셀레나에게 잘 어울리는 색이에요.”

“시에나는요?”

“난… 오, 이거 괜찮은데요?”

시에나가 자신만만하게 리본 하나를 내밀었다. 섬세한 레이스가 덧대어진데다 리본 끝이 붉은 꽃자수로 장식되어 있었다.

“셀레나. 이걸로 해요. 이게 딱이에요!”

“네. 좋아요.”

시에나는 신이 나서 고급 레이스가 박힌 리본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그사이 시에나에게 선물할 것들을 고르자 그녀가 말했다.

“전 필요 없어요.”

“머리가 이렇게 긴데요?”

시에나의 머리카락은 가슴께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머리가 너무 부스스해서 이렇게 좋은 건 안 어울릴 거예요. 다음에 살래요.”

시에나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제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부끄러운 듯 손가락으로 후닥닥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그녀가 나를 데리고 계산대로 이끌었다. 시에나가 골라 준 리본은 포장이 끝나 있었다. 계산을 치르는데 잡화점 주인이 물었다.

“두 분, 쌍둥이인가요?”

잡화점 주인의 물음에 저절로 시에나에게 시선이 갔다.

자세히 뜯어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분위기나 인상이 다르단 것만 빼면 우린 친자매처럼 닮았다.

‘자매라고 하면 불쾌해할까?’

그런 생각에 대답을 고르던 사이 시에나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자매예요.”

“그랬구먼요.”

그 말에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코끝이 시려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고 볼 안 여린 살을 꼭 깨물어 안간힘을 썼다.

빙그레 웃는 시에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와 똑같은 색을 한 눈이 보였다.

‘신기해. 피 섞이지 않은 남인데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 있는 걸까.’

우리가 정말 친자매이면 좋을 텐데. 막연히 드는 바람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셀레나. 머리는 다음에 해요.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그럼 들어가서 쉬도록 해요. 제가 너무 많이 데리고 다녔죠?”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특히 옷가게는 환상적이었어요.”

“다음엔 보석을 사러 와요.”

“보석… 이요?”

창문을 통해 들어온 노을빛에 시에나의 황금빛 눈이 일렁였다. 조금 붉게 번진 것도 같은 눈이 나를 향했다.

“다가오는 봄 끝자락에 황실 무도회가 있을 예정이거든요. 그때 쓸 보석이 있어야죠. 실은 저도 무도회 때문에 보석을 사야 하는 상황이에요.”

황실 무도회는 오래전부터 기대 중이던 이벤트였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와의 약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파혼하게 되겠지.’

결혼이라도 한 뒤 내가 에스타리온 백작의 친자가 아님이 드러나면 가문은 황실능멸죄를 몰아 큰 죗값을 물게 될 것이다.

‘애초에 출신 모를 여자애가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가 된 것만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일인걸.’

그분과 한때나마 행복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할 테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나는 그분을 좋아했다. 아니, 어쩌면 사랑하고 있다.

그분도 나도 말수가 적었고 조용한 시간을 즐겼다. 여러모로 성격이 비슷해, 황태자 전하는 함께한 긴 시간만큼 내 안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애초에 좋아한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셀레나? 얼굴이 안 좋아요.”

“저도 피곤한가 봐요.”

내가 파혼한 뒤엔 시에나가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게 될 테니까. 볼을 콱 깨물었다.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퍼져갔다.

본래라면 황족은 같은 황족이나 다른 왕실의 구성원과 결혼해야 한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 신전의 영향력이 커진 바람에 그들을 견제할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존재로 우리 에스타리온 백작가가 선택되었다.

황태자 전하와 나이가 비슷한 여식이 있는 귀족가가 드물다는 이유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뭐가 됐건… 마음을 정리해야 해.’

본래 내가 탐할 분도 아니었다. 거기에 미래엔 시에나의 약혼자가, 더 나아가선 남편이 될 테니 이제 그만해야만 했다.

눈을 감고 소파 깊이 몸을 뉘였다. 복잡한 감정을 몰아내려 애쓰며 머리를 비우는 사이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시에나가 나를 붙잡고 부탁했다.

“셀레나. 식사 때 리본을 하고 올 수 있어요? 제 안목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럼요. 꼭 하고 갈게요.”

안목을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제 방으로 올라가는 시에나의 뒷모습을 보며, 조만간 살롱에 들러 에스타리온이란 이름에 어울리도록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 주어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 * *

우리 가족은 아침 식사는 각자 해도 저녁만큼은 모두 함께하곤 했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내려가자 식당 문밖으로 시에나와 아버지, 오라버니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단 게 먹고 싶을 땐 사루비아 꽃잎을 따서 뒤를 빨곤 했어요. 아버지도 그래 보신 적 있으세요? 요즘 사람들은 잘 안 그러는데 예전엔 많이들 했다고 들었거든요.”

시에나는 쾌활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고 매사 조심스러운 나와는 달랐다. 그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아버지, 오라버니와 빠르게 친해져갔다.

‘다행이야. 시에나가 잘 적응하지 못했으면 나도 정말 힘들었을 거야.’

그녀가 이 가정에서 겉돈다면 죄책감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에나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셀레나! 어서 와요. 리본을 해 주고 와서 고마워요!”

“리본?”

오라버니의 질문에 시에나가 말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본이 셀레나와 잘 어울리지 않나요? 오늘 나가서 종일 돌아다니다가 산 거예요. 아버지가 셀레나에게 주신 돈으로 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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