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나, 셀레나 에스타리온.
제국에 단둘뿐인 백작가의 고명딸이자 황태자 필립소 마르티네슨의 약혼녀였다. 오늘 아침까지는.
“이만 나가라. 셀레나.”
뒷짐을 진 오라버니가 인상을 쓴 채 말했다. 말이 권고지 이것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작은 주인이었고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는 충실한 후계자였으니까.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시선에 담긴 것은 지독한 증오였다. 그럴 만했다.
나는 가짜였다. 진짜 셀레나 에스타리온은 어린 시절 유괴당했을 때 바꿔치기되었고, 그 자리에 천한 하녀의 딸이 셀레나 에스타리온이 자리를 차지했다.
어머니가 목숨을 바꿔가며 낳은 진짜 셀레나는 하녀의 딸이 되어 시에나라는 이름으로 자랐다.
제대로 먹지도 배우지도 못한 채 숯검정를 묻히며 비루하게 자라, 제 어미라 믿은 여인과 같은 하녀가 되었다.
이에 반해 바꿔치기된 하녀의 딸은 갖은 호사를 누리며 자랐으니 어떻게 화가 안 날까.
그들이 나를 증오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가 와요.”
툭. 툭. 투두둑.
비록 오라버니에게 나는 못된 하녀의 딸이자 진짜 셀레나 백작 영애 자리를 꿰찬 가짜 동생일지라도 내게 오라버니는 지금도 하나뿐인 형제다.
그렇기에 내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더 이상 가족으로 묶일 수 없는 이 상황이 미어지도록 슬펐다.
“그게 뭐 어떻단 거지? 설마 비가 온단 핑계로 나가지 않으려는 셈이냐?”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잔꾀를 낼 생각이라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남의 인생을 탐한 너를 빗속에 내던지라고 명령을 하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 말이다.”
시선을 내리자 오라버니가 주먹을 꽉 쥔 게 보였다. 오라버니는 시에나, 그 애의 몰골을 떠올리고 있을 테다.
몇 달 전 백작가로 입적된 시에나는 안쓰럽단 말이 절로 나오는 애였다.
못 먹어 뼈가 툭 불거진 몸에 손톱 아래엔 흙먼지가 가득했다.
제대로 읽는 법도 몰랐고 기품이라곤 확인할 수 없었다.
먹고 사는 게 힘들어 당장의 생존에 급급하다 보니 품위니 교양이니 하는 것들을 신경 쓸 수 없을 테다.
그러니 그 성장배경에 얼마나 많은 고초가 있을지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애는 밝고 명랑했다. 그게 내겐 불행인 걸까, 행운인 걸까.
‘안녕하세요. 시에나입니다! 부족함이 많지만 저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게 인생을 도둑질당한 비운의 아가씨가 짓는 미소에 나는 웃음마저 도둑질하진 않았단 안도감을 느꼈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울며 슬퍼했다.
세상 불행을 다 거머쥔 듯 천하디천한 하녀로 살았지만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게 더 안쓰러웠을 테다.
두 사람의 어쩔 줄 모르는 분노는 시에나와 나를 비교하기에 이르렀다.
‘네가 가진 티 없이 깨끗한 손, 품위 있는 말투, 숱한 교육으로 얻은 지식은 모두 그 애의 것이어야 했다!’
그 말을 한 게 아버지였는지 오라버니였는지 제대로 떠오르질 않는다.
미안함과 죄책감에 나 또한 정신이 하나도 없어 기억이 불분명하다.
분명한 건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가족들이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었단 거다.
‘실상 이 모든 일을 꾸민 건 내 친모라는 하녀지만…….’
그녀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그러니 그 딸인 내게 화살이 향한 것일 터.
“죄송해요. 오라버니. 그저 어린 시절 빗속에서 물장난을 치던 게 떠올라서…….”
오라버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건 시에나와 나눴어야 하는 추억이었지.”
“정말로 죄송해요. 화가 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나와 나눈 추억은 가짜에게 애정을 주어 시에나에게 미안한 시간이 되었다.
오라버니와 시에나가 함께한 시간은 그녀가 바꿔치기되기 전인 열 살 이전이 전부다.
“이제 그만 가라. 내 인내가 다 해간다.”
“그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뵐 수 있을까요?”
“아버지?”
오라버니가 이를 갈았다. 녹색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기사단 사람들에게 오라버니가 무서운 분이라고 들을 때마다 그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는 아버지 다음으로 다정한 분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내 앞의 오라버니는… 내가 알던 내 형제가 아니었다.
‘무서워…….’
호랑이를 눈앞에 둔 듯 두려워 어깨가 떨려 왔다. 내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차갑고 매서운 눈빛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내가 얼마나 따뜻한 온실 속에서 커 왔는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그분은 네가 입에 담을 수 없는 분이다. 천한 범죄자의 딸이, 평민 주제에 감히 백작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냐?”
“죄, 죄송해요. 주의하겠습니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셀레나 에스테리온이 아니다. 네 이름 뒤엔 더 이상 에스테리온이란 성이 붙어선 안 될 것이며 네 신분도 귀족이 아니지.”
“명심… 할게요. 마지막으로 배, 백작님을 뵙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냐? 끌어내라!”
오라버니의 명령과 동시에 집안의 하인들이 내 양팔을 붙잡았다.
그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명령을 듣고 시중을 들었다.
“제 발로 가겠습니다.”
“아니. 꾸물대는 것이 네 어미처럼 간악한 술수를 써서 이곳에 머물려는 속셈이겠지.”
“아녀요.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뭣들 하느냐! 어서 끌어내라!”
하인들이 거센 힘으로 나를 밖으로 질질 끌었다. 시중을 들던 하녀들이 나와 그런 내 모습을 지켜봤다.
오라버니는 나를 곱게 내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 분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모멸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내가 믿고 의지하던 형제가 나를 등졌다는 사실이다.
“내 발로 나가마.”
“우아한 척은. 당신이 아직도 이 집의 아가씨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를 끌어내는 하인, 시몬이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기회주의적인 성격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꿀 줄이야.
다른 쪽에서 끌어내는 하인 제롬이 비웃었다.
“같은 평민 주제에! 당신은 우리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다고.”
그렇게 나를 비웃은 하인들에게 끌려 1층 복도를 지나갈 무렵 복도 끝에서 문이 열렸다. 그 방은 아버지의 서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시에나가 나왔다.
“아버지!”
저분이 내 아버지셨다. 스무 살이 되도록 나를 키워 주신,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아버지. 알바로 에스타리온 백작.
아버지의 등장에 하인들의 손길이 멈추었다.
“아버님…….”
내 부름에도 아버지는 대꾸는커녕 미간을 굳히기만 했다. 아버지는 한층 어두워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아니, 아니. 오히려 한숨을 푹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아…….”
그때 아버지의 뒤로 작은 인영이 드러났다. 시에나였다.
내가 입던 드레스를 차려입은 시에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나를 보았다.
‘저건…….’
저 스카프는 분명 가방에 따로 싸 두었는데…….
“시에나. 그 스카프… 제 것이니 벗어 주겠어요?”
시에나가 내 옷을 입어도 좋다. 원래는 그녀의 것이어야 하니까.
하지만 스카프는 다르다. 저 스카프는 약혼자인 황태자 전하께서 선물로 준 거였다.
‘에스테리온’이 아닌 ‘셀레나’라는 여인에게 준 정인의 선물 말이다.
“더 이상 네 것이 아닌 것은 탐하지 말거라. 셀레나.”
뒤따라 내려온 오라버니가 비틀린 어조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차디찬지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들었다. 아버지가 다정히 시에나의 어깨를 감쌌다.
“시에나. 줄 필요 없다. 그게 마음에 든다면 맘껏 하려무나.”
“하지만 달라고 하시는데…….”
“저 애에게 말을 높일 필요도 없다. 너는 에스테리온 백작 영애이고 저 애는 일개 평민이니까.”
“하지만…….”
시에나는 아주 곤란한 듯 눈꼬리를 내리며 나를 힐끔힐끔 보았다.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스스로가 파렴치한이 된 듯했다.
나는 시에나의 삶을 빼앗았는데 저깟 스카프로 눈치를 보게 만들다니… 그런 생각이 들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쉬이 포기되지 않았다. 시에나가 내게 인생을 빼앗긴 것과 별개로 저것만큼은 빼앗길 수 없었다. 그만큼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하지만은 없단다. 시에나. 시온. 뭣 하느냐. 정리해라.”
“예. 아버지.”
아버지의 명령에 오라버니가 하인들에게 턱짓했다. 하인들이 다시금 나를 끌어내기 전 재빨리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제 발로.”
어깨를 꼿꼿이 펴고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려 노력했다. 공손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비록 일개 평민에 불과하지만, 실상 이제까지의 삶이 도둑질로 이뤄진 거였지만, 그간 살아온 습관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게 못 된다.
가진 것 하나 없이 꼿꼿이 굴어봐야 편할 게 없지만 남은 게 자존심밖에 없어 이것이나마 지켜야겠다. 옷가지 몇 점이 내가 가지고 나가는 전부니까.
“시에나. 그건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돈으로 산 게 아니에요. 제가 받은 소중한 선물이니 돌려줄 수 있을까요?”
“아… 미, 미안해요. 돌려줄-.”
시에나의 말을 끊고 아버지께서 노성을 내질렀다.
“아니. 시에나, 너는 저 아이에게 티끌 한 점 빼앗겨선 안 된다. 양보할 필요도, 배려할 이유도 없다. 셀레나. 더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으니 이만 가도록 해라.”
그렇게 선을 그은 아버지는 보기 싫단 듯 배웅조차 하지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
쾅! 거칠게 닫힌 문소리가 심장을 때렸다.
진짜 부녀지간이 아니었더라도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키워 줘 감사하단 인사쯤은 하고 가고 싶었다.
내가 미운 마음은 이해되지만 저 냉정함이 야속해 눈물이 핑 돌았다.
울음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입 안 여린 살을 꼭 깨물고선 슬픔을 꾹꾹 삼켰다. 오라버니가 말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다. 어서 가라.”
“갈게요.”
하녀들이 가져온 짐 가방을 들고는 비 내리는 문 너머로 나갔다.
“아버지께 늘 사랑하고 감사했노라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오라버니는 대답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에겐 더 이상 가족이 아닐지 몰라도 내겐 여전히 사랑하는 아버지, 오라버니라 두 사람의 태도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제 가자.’
그렇게 문 너머, 빗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가파르게 내리는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뺨을 때렸다. 저택의 출입문을 나서 정원 너머 출입문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잠깐만요!”
시에나였다. 그녀가 빗속을 헤치며 내게 달려온 것이다.
“무슨 일이죠?”
“스카프요. 돌려드리려고요.”
“아… 고마워요.”
“뭐, 이깟 스카프야 앞으로도 수십 장은 살 수 있으니까.”
“네?”
귀를 의심하는 사이 시에나가 빙그레 웃으며 스카프를 건네줬다.
하지만 내 손 위에 놓은 게 아니라 교묘히 옆으로 빗겨 던져서, 스카프는 손길을 피해 발치에 떨어졌다.
실크 천에 바닥에 고인 비가 젖어 들었다. 흙탕물에 얼룩이 질까 재빨리 몸을 낮춰 스카프를 주웠다.
그때 그녀의 신발이 스카프를 짓뭉갰다.
“시에나! 이게 뭐 하는 거예요!”
그녀에게서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올려다보자 시에나의 비릿한 미소와 서늘한 눈빛이 들어왔다.
“아, 미안해요. 실수. 실수.”
시에나가 발을 거두었지만 이미 스카프엔 더러운 얼룩이 진 뒤였다.
“빗속에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서 이만 가 볼게요. 그리고 셀레나.”
시에나의 두 눈이 샐쭉하게 접혀들었다. 그녀의 코에서 명백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으흐흥. 실은 말예요. 제가 가짜 맞거든요?”
“대체 무슨 말을-.”
“제가 친딸 아닌 거 맞아요. 그래도 이제부턴 진짜가 될 생각이니 당신은 가짜로 살아요.”
“네? 그게 무슨-.”
“어디 한 번 열심히 살아 봐요. 당신은 하녀 복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기대가 되네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멀찍이 우산을 가지고 자신을 데리러 오는 하인들에게로 쏙 빠져나갔다.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걸까? 내가 진짜인데 가짜가 되라고?
지독한 혼란 속에서 나는, 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