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196)

27 화

이엘리가 하아, 긴 한숨을 쉬었다.

"저, 정말. 자카리, 이건……”

하지만 자카리의 손은 이미 그녀의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이엘리는 기분 좋은 소름이 온 몸을 스치는 걸 느꼈다.

그녀의 귓속에 쏟아지는 그의 목소리가 달짝지근하다.

"하지만, 이엔.”

“으응……”

“이미.”

자카리의 목소리가 좀 더 낮아졌다. 조도를 낮춘 방 안, 푸른 눈동자는 이제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자카리는 나른한 어조로 소곤거렸다.

“날 밀어내기는 너무 늦었어.”

그 말이 끝이었다. 이엘리의 몸이 털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꽃잎처럼 흐트러지고, 그 위에 짐승처럼 도사린 자카리가 눈을 빛냈다.

그대로 이엘리의 이성이 끊어졌다.

* * *

길고 긴 쾌락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시간은 새벽에 가까워졌다.

몇 번이고 쾌락의 끝까지 짓쳐 올라간 후, 기절하듯 잠들었던 이엘리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몸을 감싼 온기가 느껴졌다.

익숙한 심장 소리,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받치고 있는 단단한 팔.

자카리는 이엘리를 꼭 끌어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희미하게 들이치는 달빛이 자카리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엘리는 남편의 그늘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카리.”

조그맣게 속삭여 남편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규칙적인 숨소리만을 돌려줄 뿐이다.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뺨을 스치고 이마를 지나 오뚝한 콧날을 따라 내려간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자카리는 짧게 잠투정을하며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

어쩐지 그런 그가 안쓰러워서, 이엘리는 손을 뻗어 그런 자카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잠든 와중에서조차 자카리는 이엘리에게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온기를 놓칠세라, 어쩔 줄 모르고 그녀를 붙들고 있는 단단한 팔.

이엘리는 자카리의 등을 작게 토닥여 주었다.

‘이건.’

그러던 중, 연녹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얇은 자리옷 너머에는 긴 상흔이 그어져 있을 것이다.

등 전체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 터, 자카리의 어머니인 아델라이데 가 직접 만든 상처.

“……”

입술을 꾹 다문 이엘리가 자카리의 등을 어루만졌다.

세월이 오래 지났고, 부모님에 대한 미움도 많이 희석된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카리의 등에 남은 상흔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렸을 적 자카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었는지 알기에, 더더욱.

“……이엔?”

그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자카리는 졸음이 가득한 눈동자를 이엘리에게로 고정시켰다.

머쓱하게 미소 지은 그녀가 그의 등에서 손을 떼어 냈다.

“아, 깼어? 미안해, 깨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엘리가 손을 거둬 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자카리는 잠에 취한 채, 제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손을 뻗어 자카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자.”

“……아니.”

고개를 가볍게 내저은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쪽,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바닥 안에 키스를 남긴다. 살짝 볼을 붉히는 이엘리를 향해, 자카리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깼어. 괜찮아.”

“아직 새벽인걸.”

“그래도 잠을 자는 것보다는, 이엔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으니까.”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그대로 이엘리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가느다란 허리가 품에 양팔에 쏙 들어오고, 그녀 특유의 달콤한 체향이 밀려든다.

그녀의 날씬한 배에 고개를 묻자, 이엘리는 간지럽다며 작게 키득거렸다. 그녀의 품에 고개를 묻은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엔은 바쁜데……”

아이들 앞에서는 엄격한 아버지의 얼굴을 한 자카리는, 이엘리 앞에서 만큼은 가끔씩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린다.

고개를 묻은 자카리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새어 나왔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요샌 몸이 열 개여도 모자라잖아.”

아쉬움이 가득한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이엘리는 대답 대신 자카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결 고운 은발이 손가락 사이를 사락사락 스치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잠시 후, 이엘리의 손가락이 자카리의 옷자락 아래를 파고들었다. 자카리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엔?”

옷자락이 걷혔다. 조밀하게 근육이 잡힌 등, 그 위를 가로지르는 검의 상흔.

이엘리는 손을 들어 그 위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나이 열세 살, 자카리를 처음으로 만났었다.

겨울에 홀로 갇힌 것처럼 서러운 눈동자를 했던 자카리, 그리고 그의 상처를 보듬으며 처음으로 보았던 흉터.

“흉터, 이제 많이 옅어졌네.”

그녀의 손가락이 흉터 자국을 따라 느리게 미끄러졌다. 작은 속삭임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렇지…… 넌?”

넌? 짧은 물음이었지만, 수많은 질문이 압축되어 있은 물음이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리고 예 전보다는 상처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괜찮다’라는 말을 함 부로 붙이기에는, 자카리가 겪어 왔던 시간은 너무 길고 아팠으니까. 자카리는 잠시 침묵했다.

‘자카리는 과거에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었어.’

이엘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랬었다. 증오와 미움, 원망도 모두 받아들이고 인정하겠다고 했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다면 지금의 자카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예전보다는 좀 나아진 걸까, 새로 생긴 가족이 그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희석시켰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입 안을 뱅뱅 돌았으나, 어느 것도 쉬이 꺼내 놓을 수 없었다.

“괜찮아.”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자카리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엘리는 말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네가, 그리고……”

그의 목소리 끝이 느려졌다. 약간 망설이는 것 같던 자카리가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곁에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엘리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직 자카리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채 거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제, 부모님을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다. ‘괜찮다’는 저 말을 꺼내기까지, 자카리가 얼마 나 많은 고뇌와 고통을 견뎌 내야 했을지. 이엘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런 자카리가 더욱 더 사랑스러웠다.

“……오랜만에 아버님과 어머님을 찾아가 볼까?”

이엘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아가신 선대 공작과 공작 부인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짧게 침묵하던 자카리는 잠시 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그러자.”

동시에 자카리가 이엘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이엘리는 그의 이마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따스한 입술의 감촉이 마치 자카리를 구원하는 것 같다. 그는 그대로 이엘리의 품을 파고들었다.

* * *

그리고 다음날, 이엘리와 자카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작가의 가묘로 향했다.

대리석으로 깎아 낸 화려한 묘비 위로 이름과 생몰년이 적혀 있었다.

테론 헤센바이츠.

이엘리는 그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선대 공작의 무덤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지금은 편안하신가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엘리는 작게 물어보았다.

공작의 무뚝뚝한 미소가 눈앞에 선했다.

그때 리안나가 종종종 이엘리 곁에 다가왔다.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묻는다.

“엄마, 할머니가 계신 무덤은 어디 있어요?”

“할머니께서는 멀리 바람을 타고 떠나셔서, 여기에 안 계셔.”

“왜요?”

아이의 천진한 물음에 이엘리는 그저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테론은 제 아내가 이 공작성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지 알았고, 그랬기에 죽은 아내를 공작가의 가 묘에 묻지 않았다.

아델라이데의 시체는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주었다고 했다. 테론에게 남은 것은 아델라이데의 잘라 낸 머리채 한 움큼 뿐.

테론은 아델라이데의 머리채를 소중히 품고 무덤에 묻혔다.

“나중에 리안나가 조금 더 크면 알려 줄게. 알았지?”

"힝, 지금 알고 싶은데……”

“리안나,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잖아.”

프란츠가 어른스럽게 동생을 다독였다. 두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엘리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렴, 리안나. 프란츠도.”

아이들의 손을 양손에 갈라 쥔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다가갔다.

자카리는 가만히 아버지의 묘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 없는 옆얼굴이 가슴이 아파, 이엘리는 한숨을 되삼켰다.

"자카리.”

그녀가 조심스럽게 남편을 불렀다. 그러자 자카리가 슬쩍 시선을 기울 여 그녀를 바라본다.

"걱정하지 마, 이엔.”

하지만 자카리의 목소리는 이엘리가 걱정하던 것보다는 훨씬 더 평온했다.

“이렇게 아버지를 다시 뵙고 나서야,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게 된 것 같아.”

햇빛을 머금은 자카리의 눈동자는, 비 갠 뒤의 하늘처럼 맑고 푸르렀다.

"긴 시간이었지, 솔직히 괴롭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어. 하지만……”

잠시 말을 고르던 자카리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너를 만난 그때부터, 난 언제나 행복했어.”

“자카리.”

이엘리는 목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자카리는 손을 뻗어 프란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황한 와중에도 프란츠는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망설임 없이 제게 다가오는 아이를 보며, 자카리의 눈동자가 크게 얼렁 거렸다.

“그리고……”

프란츠를 안아 올린 자카리가 아이의 발그레한 뺨에 입을 맞췄다. 아버지의 드문 애정 표현에 프란츠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지만, 자카리는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런 나에게도 이제…… 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래, 이제 그는 괜찮았다. 자카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더 이상 얼음과 눈으로 짜 올린 세계에 홀로 갇힌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영원한 봄이 곁에 있었고, 그 봄과 함께 이루어 낸 새로운 가족이 있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이엘리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쪼르르 달려간 리안나가 아버지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지금의 아버지를 꼭 안아 주고 싶었다. 이엘리 또한, 울먹이며 그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시시각각 그를 감싸는 가족들의 온 기가 지나치게 다사로워서, 자카리는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고맙고…… 사랑해.”

나직한 울림은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자카리는 양팔을 들어 가족들을 모조리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오랜 겨울이 끝나고 도래한 봄을, 자카리는 기쁘게 맞아들였다.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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