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화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리안나의 연주와 낭송을 기대하는 쪽으로 뒤집어졌다.
부모님은 그렇다 치고, 기대에 가 득 찬 가신들은 도대체 어쩔 거야.
어, 어쩌지? 리안나는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다들 엄청 기대하고 있는데.
그녀가 우물쭈물하던 때.
“어휴, 내가 못 살아.”
한숨 섞인 다정한 목소리가 리안나의 귀를 스쳤다.
반짝 고개를 들어 올리자, 친애하는 오빠가 미간을 살짝 좁힌채 서 있었다.
리안나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프란츠가 말했다.
“이리 와, 리안나. 피아노는 내가 대신 칠게.”
“지, 진짜?”
리안나는 감동에 가득 찬 눈동자로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아르릉거리며 이를 드러내는 사이였지만, 지금 이때만큼은 오빠가 리안나를 구원해 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 보내 준 천사 같았다.
여동생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프란츠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너 편지도 대충 마무리 지었잖아. 그 편지, 가신들 앞에서 다 읽을 거야?”
그, 그건 안 돼! 리안나가 파드득 놀라 고개를 내젓자, 프란츠가 한숨 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피아노 칠 동안, 가서 편지 마무리 지어. 알았지?”
“으, 응!”
리안나가 반쯤 울먹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생의 볼을 꾹 잡아당겨 꼬집은 프란츠가 앞으로 나섰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선 소공작에 게,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쏟아 진다.
“리안나가 너무 긴장하고 있으니, 피아노는 제가 대신 연주하겠습니다.”
소공작님께서? 가신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프란츠에게 쏠렸다. 약간은 의외라는 표정이다.
평소 애교 많고 친화력도 강한 공녀님과는 다르게, 소공작께서는 차기 공작가를 물려받을 후계로서 외부에 함부로 나서는 것을 삼가고는 했으니까.
프란츠는 단정하게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빠, 사랑해!’
리안나는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오빠를 존경하기로 결심했다.
어렸을 적부터 검술을 배웠기에, 피아노 건반을 덮는 프란츠의 손은 어린아이의 손답지는 않았다.
아이 특유의 보드라움보다는 기사에 가까운 단단한 손이 피아노 건반을 누빈다.
자카리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손을 맞잡은 채 프란츠의 연주를 듣던 이엘리의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 가 걸렸다.
“……엘펜느의 왈츠네. 꽤 박자가 빠른 곡인데, 프란츠가 열심히 연습 했나봐.”
아내의 목소리에 자카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따 연주가 끝나면 칭찬해 줘, 알았지?”
“이엔, 네가 해 줘도……”
“어머나, 어머니가 하는 칭찬과 아버지가 하는 칭찬은 다른 거야.”
우아하게 울려 퍼지는 연주를 들으며, 이엘리는 그것도 모르냐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프란츠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래?”
“아니, 그건……”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 말에 자카리는 문득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테론 헤센바이츠.
오랫동안 증오와 원망으로 자카리를 대했고, 끝내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한 아버지.
멋대로 삶을 끝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완벽하게 미워하지도 사랑 하지도 못했던 자신.
이엘리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도, 당연한 거고.”
그래, 맞는 말이다. 자카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 자카리도 그랬었다. 괴물 취급을 받으면서도, 야만족들과 마수 들을 어떻게든 처단하려 발버둥을 쳤던 그 이유.
아버지가 자신에게 웃어 주기를 바 탔다. 수고했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웃어 주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
‘그렇다면, 프란츠도 똑같은 마음일까.’
연주는 어느새 막바지로 치달아 있었다. 매끄러운 연주를 귀담아 들으며 자카리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잠시 후, 연주가 끝났다. 와아아,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소공작께서 피아노 연주에도 일가 견을 이루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프란츠를 향해 가신들이 하나둘씩 칭찬을 건넸다.
프란츠는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면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프란츠의 실력은 객관적으로 뛰어 났으므로, 저런 칭찬들이 들어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안나가 짝짝 박수를 쳤다.
“오빠, 이번엔 좀 멋졌다?”
“리안나, 가신들 앞에서는 좀 얌전하게 굴면 안 되겠니?”
여동생을 타박하면서도 프란츠는 내내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그때 자카리가 프란츠를 가만히 응시했다.
희미한 온기가 서려 있는 눈동자를 보며, 프란츠가 약간 기대에 찬 표정을 했다.
“……아버지?”
프란츠가 자카리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자신을 쏙 빼닮은 이목구비는 그러나, 자신과는 다르게 순수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카리를 마주보는 아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자카리는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엘리는 살짝 손등을 어루만졌다.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건 당연해.’
이엘리의 말이 귀에 선했다. 잠시 망설이던 자카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척 훌륭한 연주였다, 프란츠.”
“……”
“열심히 정진하였구나. 무척 기쁘다.”
어휴, 자카리. 좀 더 상냥하게 말 해 주지, 그렇게 밖에 말하지 못해?
이엘리는 제 남편에게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자카리는 약간 머쓱해졌고, 리안나는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그런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던 프란츠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그, 감사합니다.”
프란츠가 약간 더듬거렸다.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프란츠가 결연하게 말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앉아 있던 이엘리가 자카리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댔다.
“프란츠 좀 안아 줘, 얼른.”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런 뜻을 담아 이엘리를 돌아보자, 이엘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마 그러면 프란츠가 엄청나게 기뻐할걸.”
“……”
그리고 제 아내가 하는 말이라면 비가 땅에서 하늘로 솟는대도 믿을 자카리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벌렸다.
머뭇거리던 프란츠가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자카리의 커다란 손이 프란츠의 등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어쩐지 울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프란츠는 입술을 꾹 앙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리안나와 이엘리는 흐뭇하게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리안나, 편지 낭송은 언제 하니?”
장난스러운 어머니의 물음에 리안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이엘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 * *
처음에는 짧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 던 깜짝 파티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리안나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었고, 깜짝 파티는 이제 재롱잔치 분위기로 변해 버렸다.
기분이 좋아진 자카리는 통 크게 공작성의 사용인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라고 했고, 그렇게 사용인들도 다 함께 행복해졌다.
그런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던 이엘리는 제 아들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프란츠, 아버지가 하는 것 봤지? 고용주의 호의는 돈으로 표현해야 한단다.”
“그, 그런 건가요?”
“그럼. 좋은 고용주란 그런 거야.”
프란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엘리는 말을 이었다.
“월급을 밀리지 않고, 사용인들에게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요?”
“사용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해. 그들이나 우리나 다 같은 사람 이니까.”
프란츠는 어머니의 말을 단단히 새겨들었다. 그런 아들을 사랑스럽게 보며 이엘리가 말했다.
“앞으로 넌 헤센바이츠의 공작이 될 몸이니, 저런 모습은 잘 봐 두렴. 알았지?”
“네, 어머니.”
그때 리안나가 꼬물꼬물 어머니에게 달라붙었다. 입술을 뾰족하게 내 밀고는 투덜거린다.
“다들 절 놀리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 리안나.”
이엘리는 리안나를 무릎에 앉히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리안나의 뺨을 통, 튕기며 말을 잇는다.
“우리 리안나가 사랑스러운 아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널 귀여워하는 거란다.”
"진짜요?”
“그럼.”
이엘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리안나는 그제야 헤헤 웃으며 어머니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그런 딸아이를 어루만지며, 이엘리는 제 곁에 바짝 붙어 앉는 아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 진다. 이엘리는 살짝 눈을 들어 올렸다. 자카리와 이엘리의 시선이 마 주쳤다.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고, 자카리는 약간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는 문득, 자카리와 프란츠의 수줍은 얼굴이 꼭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 * *
파티는 밤이 이슥해진 때에 끝났다. 아직 어린 프란츠와 리안나는 어느새 서로에게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엘리는 작게 웃으며 그런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리안나는 그렇다 치고, 언제나 어른스러운 척하던 프란츠도 이렇게 볼 때면 무척 앳되었다.
프란츠와 리안나를 각자 방에 올려 보낸 이엘리와 자카리는, 그제야 단 둘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건, 도대체……”
하지만 방에 돌아간 두 사람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가득 찼다. 그들의 침실은 이미, 붉은 장미들로 화려하
게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랴, 화려한 촛대 위로는 예쁜 초들이 꽂혀, 머리 위로 촛불을 매단 채 일렁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조그만 케이크와 치즈, 초콜릿, 와인까지.
“이건 참……”
주변을 둘러보던 이엘리는 어색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아무리 보아도, 오붓한 두 사람의 시간을 응원하기 위한 준비이지 않나 가끔 그들의 아이들은 지나치게
조숙한 구석이 있었다.
“옛날 생각난다, 그치?”
“그러게.”
이엘리는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제 아내와 시선을 맞추던 자카리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서렸다.
그러고 보면, 그들의 첫날밤이 이랬었다. 거의 남매처럼 살아왔던 두 사람이기에, 부부로서 한 발자국 더 내딛는 게 무척 어색했었는데.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를 덥석 안아 들었다.
"자카리?”
자카리의 품에 안긴 채,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갓 피어오른 새싹 같은 연녹색 눈동자가 그를 제 안에 담는다. 긴 속 눈썹 그늘 아래, 짙푸른 눈동자가 이엘리를 잡아먹을 것처럼 응시한다. 숨소리가 들릴 것처럼 가까운 거리.
잠시 후, 자카리가 씩 눈웃음을 지었다.
“리안나의 동생이라도 낳아 달라는 뜻인가.”
“뭐, 뭐라고?”
순간 이엘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자카리는 대답 대신, 이엘리의 몸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진다.
말캉한 혀가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더듬고, 두드리며, 어루만진다. 입술 사이로 건네지는 숨이 다디달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