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화
단정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쓰여 있는 내용은, 이엘리와 자카리를 위해 깜짝 축하 파티를 연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엄마와 아빠를 위해 파티를 준비했다고?”
“네. 물론 엄마가 주최하시는 것에는 모자라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 했으니까……”
프란츠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아들의 뺨에는 이제 희미한 홍조가 떠 있었다.
이엘리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아들을 품에 꼭 끌어안으며 소곤거렸다.
"고맙구나, 프란츠.”
“……아니예요. 오히려 저희가 엄마와 아빠에게 감사해야죠.”
의젓한 대답에 이엘리는 눈매를 곱게 접어 내렸다.
아들의 이마에 키스해 준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니?”
"소연회장으로 가시면 돼요. 거기에 다 준비해 뒀으니까요.”
생각보다 본격적이네? 이엘리는 두 눈을 깜빡였다. 해봤자 응접실이나 거실에 준비해 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둘이서 준비할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이엘리는 빙그레 웃었다.
"혼자 준비한 거니?”
“아니요, 집사와 부엌 하녀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프란츠는 순순히 대답했다. 이엘리는 아들의 머리를 작게 토닥이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래, 고맙구나. 집사와 부엌 하녀 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겠어.”
다정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프란츠는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이엘리는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갈까?”
“네!”
그렇게, 프란츠와 이엘리는 곧장 소연회장으로 향했다.
프란츠는 내심, 오늘 파티가 성공 적이리라 예상했다.
사고뭉치인 리안나가 새로운 사고를 치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채로.
* * *
리안나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닌데, 우리의 계획은 파티에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랑 오빠만 참석하는 거였는데!?
하지만 그녀의 등 뒤로는 다섯 명의 가신이 뒤따르고 있었다.
'힝, 오빠가 엄청나게 잔소리하겠다……’
리안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프란츠 오빠의 잔소리가 귀에 쟁쟁 울리는 것 같다.
일은 대충 이러했다. 오늘 자카리는 가신들과 만나서 산적해 있는 현안을 논의하기로했다.
리안나는 아버지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초대장을 보여 줄 요량으로, 문 앞에서 앉아 있던 중이었다.
‘아빠!’
방문이 열리자마자 리안나는 발딱 일어나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예전의 무뚝뚝함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리안나를 보자마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시선이 리안나에 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니, 리안나?’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예전이라면 딱딱한 목소리로 ‘아빠가 회의를 하고 있을 때, 문 앞에 앉아 있는 건 실례되는 행동이다’라고 했을 테니까.
리안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버지에게로 양손을 불쑥 내밀었다. 조그만 고사리손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초대장이예요!’
초대장이라고?’
‘네, 오늘은 엄마랑 아빠의 결혼기념일 이잖아요!’
그 말이 가신들이 약간 술렁거렸다. 살짝 뺨을 붉힌 아버지에게, 리안나는 활기차게 말했다.
‘그러니까 엄마랑 아빠를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했어요!’
‘그, 그러니?’
‘네! 이런 날은 당연히 축하도 받고, 케이크도 먹어야 하는 거예요!’
리안나의 발랄한 대답에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 버렸다.
어린 딸아이의 진짜 속셈은, 부모님의 축하라기보다는 오히려 케이크 쪽에 가까워 보였으니까.
그럼에도 딸아이가 귀여운 것은 사실이었기에, 자카리는 딸아이의 머리를 작게 쓰다듬었다.
그때 가신이 말했다.
‘그, 그러고 보니 오늘 공작 각하의 결혼기념일이셨죠.’
‘……그렇긴 하네만.’
내 결혼기념일이 가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런 의미를 담아 자카리는 가신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가신들은 이미, 리안나의 사랑스러움에 푹 빠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마땅히 저희도 축하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가신들이 왜 축하해 줘? 당황한 자카리가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가신 하나가 말을 덧붙였다.
‘저희도 두 분이 결혼식을 올린 날을 축하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네만.’
‘아닙니다. 꼭 축하해 드리고 싶습니다.’
맞아요, 맞아. 가신들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한 명이 작게 속삭였다.
‘저희도 공녀님께서 직접 만드신 초대장이 받고 싶은데……’
아차, 속내가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가신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리안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이지, 공녀님께서 직접 만드신 초대장이라고! 저런 딸, 우리한테도 한 명만 줘!
저 무뚝뚝한 공작각하에게서 어떻게 저렇게 사랑스러운 공녀님이 태어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안주인 마님의 피가 지나 치게 열심히 일을 하신 것 같다.
‘어, 초대장은 없지만 그래도 오시겠어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황해 버린 리안나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입을 열었다.
가신들의 얼굴이 활짝 펴졌고, 자카리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졌다. 자카리는 시큰둥하게 말을 뱉었다.
‘내 딸이 나와 내 아내만 초대한다고 했는데, 왜 가신들이 참석하는 거지?’
그리고 리안나는 그만 위기감을 느끼고 말았다.
앗, 나 때문에 아빠와 가신들이 싸우시면 안 되는데?
그리하여 리안나는 어머니가 평소 하시던 말씀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겼다.
‘그, 기쁨이 나뉘면 더 커진다고 하잖아요……?’
‘맞습니다! 역시 공녀님이세요!’
‘아직 어리신데도 이렇게나 현명하시다니, 북부의 미래가 밝습니다!’
가신들이 제각기 맞장구를 쳤고, 자카리의 얼굴은 더더욱 뚱해졌다.
짧게 한숨을 내쉰 자카리가 리안나를 덥석 안아 들었고, 가신들은 그런 공작님과 공녀님을 졸졸 따르기 시작했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어린 아이들의 행렬을 보는 기분이라, 리안나는 그만 묘해졌다.
‘그래서 파티는 어디에서 하기로 한 거지?’
‘아, 소연회장이요!’
그리고 자카리 또한 이엘리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해봤자 응접실이나 거실에서 간소하게 할 줄 알았는 데, 생각보다 거창한 파티가 될 것 같다고.
리안나는 그저 난처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 * *
그리고 현재. 프란츠와 이엘리는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니?”
"저도 모르겠는데요……?”
당황한 이엘리의 물음에 프란츠가 황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와 리안나만 와야 하는데, 어째서 가신들까지 다들 따라온 거지?
그때, 자카리의 품에서 폴짝 뛰어 내린 리안나가 어머니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이엘리는 얼떨결에 제게 달려드는 딸아이를 받아 안았다.
“리안나, 이게 무슨 일이니?”
“아, 그게.”
어머니의 품에 폭 안긴 채, 리안나는 어색한 얼굴로 헤헤 웃었다.
옆얼굴이 따끔거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프란츠 오빠가 있는 힘껏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절대로 프란츠 쪽은 돌아보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리안나는 우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엄마, 아빠! 리안나는 엄마랑 아빠가 케이크 자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요오.”
평소에는 어린애 말투라며 질색하던 말투까지 사용하며, 리안나는 이엘리와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프란츠는 그만 토하고 싶은 얼굴이 되었고, 부모님은 ‘얘가 무슨 속셈이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가신들은 달랐다.
가신들은 어린 공녀님의 귀여움에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공녀님, 너무 귀여우셔……”
“나도 저런 딸이 한 명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리고 분위기에 휩쓸린 이엘리와 자카리는 얼떨결에 같이 칼을 쥐고 케이크를 잘랐다.
리안나가 가장 좋아하는 밤 크림이 올라간 마롱 케이크였다.
공작 부부의 행동을 바라보던 가신들 사이에서, 와아 하는 환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케이크 받아 가세요!”
리안나가 활기차게 외쳤고, 프란츠는 세상일은 모를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케이크는 가신들과 공작가족들까지, 모자라지 않게 딱 떨어졌다. 리안나가 욕심을 부려 크게 구워 달라 고 한 케이크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다.
그때 리안나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오빠.”
“왜?”
“자, 이건 오빠 거.”
리안나가 케이크 접시를 내밀었다. 별생각 없이 접시를 받아든 프란츠는 좀 의아해졌다.
“왜 밤 조림이 두 개나 있는데?”
“아, 그거.”
커다랗게 잘린 케이크 조각 위에는 달콤하게 졸인 밤이 앙증맞게 두 조각 놓여 있었다.
보통은 한 조각에 하나가 돌아간다. 리안나는 밤 조림이 빠진 케이크를 보여 주며 씩 웃었다.
“솔직히 오빠가 맨날 잔소리하는 건 좀 별로이긴 한데.”
이 녀석이? 프란츠가 도끼눈을 뜨고 리안나를 흘겨보았다.
리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오빠가 고생 많이 했으니까.”
얘가 오늘 뭘 잘못 먹었나. 프란츠는 그만 당황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밤 조림 양보했어.”
“리안나.”
“내가 오늘 크게 인심 썼다, 알았지?”
리안나가 어깨를 우쭐거리며 프란츠를 마주보았다.
그런 동생이 귀엽기도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프란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밤 조림을 리안나의 입에 넣어 주었다.
“됐어, 네가 먹어.”
"진짜 내가 먹어도 돼?”
“물론이지, 난 너처럼 간식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거든.”
치.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리안나는 프란츠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는 여동생은 솔직히 얄미운 만큼 귀여웠기에, 프란츠는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웃었다.
“그런데, 리안나.”
초대장을 꼼꼼히 읽어 보던 이엘리가 문득 장난스러운 얼굴로 제 딸아 이를 바라보았다.
"초대장에 적혀 있는 식순에는, 편지 낭송과 피아노 연주도 있는데?”
"네? 아, 어, 그, 그게 말이에요……”
순간 리안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랬다. 이번 파티를 기획하던 리안나는 패기가 넘쳤고, 부모님께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초대장에 '편지 낭송’과 ‘피아노 연주’도 끼워 넣었는데…….
문제는 리안나의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한들, 직접 쓴 편지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읽을 용기는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리안나가 가진 피아노 실력은……
‘나, 피아노 엄청 못 치는데.’
그랬다. 리안나가 지금 칠 수 있는 곡은, 아주 간단한 멜로디를 가진 생일 축하 노래 정도였다.
당연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만한 곡이 못 된다. 리안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공녀님께서 피아노 연주와 편지 낭송도 하신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