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화
그 말을 들은 리안나가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웃었다.
하녀들은 리안나의 뺨을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을 꾹꾹 억눌렀다.
잠시 후, 하녀 중 한 명이 리안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희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원래 파티를 할 때는 음식을 준비 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아하, 그럼 우선 케이크가 필요하 겠네요.”
“난 마롱 케이크!”
케이크를 선정한 이유는 공작 부부의 취향이 아니라, 철저히 리안나의 취향이었다.
하지만 하녀들은 그저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다정한 눈으로 리안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난 달콤한 소스를 끼얹은 닭고기 요리가 좋아. 초코칩 쿠키랑, 그리고……”
“드시고 싶은 음식들을 모두 말씀 해 주시면, 저희가 준비해 드릴게요.”
뭐, 사실 가주님과 안주인 마님께 서는 음식의 종류에는 크게 신경 쓰시지 않을 테니까.
하녀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던 중, 하녀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음식은 저희가 준비해 드리면 되는데, 연회장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 그거?”
갸웃 고개를 기울이던 리안나가 하녀들을 향해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그건 오빠가 알아서 하기로 했어.”
“아, 그렇군요.”
뭐, 소공작께서 준비하시는 거라면 큰 문제없이 진행되겠지. 하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고 그 시각. 프란츠는 집사의 방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잠시 후, 가벼운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십시오.”
방에 들어서자, 반듯한 차림으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집사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소공작님?”
“아침 일찍부터 찾아오게 되어 미안합니다.”
프란츠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남의 방에 방문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집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비록 그들의 가주인 자카리는 휘하의 사용인들을 가차 없이 굴렸지만, 아직 어린 소공작은 아버지인 가주 보다는 훨씬 더 유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최소한 이른 시간에 들어왔을 때에 사과를 건넬 정도는 됐다. 집사가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가주님에 비하자면 소공작님이 훨씬 더 나으시죠.”
“예?”
“이리 와서 앉으십시오.”
어라, 방금 뭔가 대단한 발언이 지나간 것 같은데. 프란츠는 어리등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우선 집사가 자리를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집사가 프란츠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게, 이제 조금 있으면 제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지 않습니까.”
프란츠는 어렵게 말문을 됐고, 그 말을 듣자마자 집사는 프란츠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기념하여 무언가를 준비해 주고 싶은 것이리라.
“그래서 부모님 몰래 작은 파티를 준비해 드리고 싶은데……”
“소연회장이 있습니다.”
“예?”
갑자기 뛰어넘는 대화의 흐름에 프란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아직 파티를 준비하고 싶다는 말밖에 안 했는데?
하지만 집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곳을 정돈하고 꾸며 드리겠습니다.”
“예?”
“몇십 명 정도는 받을 수 있는 규모이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겁니다.”
어라, 규모가 좀 커지는데? 프란츠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실 프란츠가 생각한 건, 응접실을 정리하고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는 정도였다.
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커튼을 새로 달고, 새로 테이블보 도 마련하겠습니다. 또 어떤 것을 도와드릴까요?”
“그, 집사가 적당히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프란츠가 힐끔 집사의 눈치를 살폈 다. 분명히 표정은 딱딱하기만 한데, 이상하게도 눈앞의 집사는 프란츠보 다도 더욱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뭐 도와준다니까, 고마운 일이다.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프란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집사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바쁘시지 않겠습니까?”
프란츠는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헤센바이츠 공작성의 사용인들을 총괄하여 관리하는 집사였다. 당연히 이런 사소한 일 말고도 챙길 일은 무척 많을 텐데.
“괜찮습니다.”
그러나 집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프란츠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럼, 저와 리안나가 할 일은 뭔가 없을까요?”
연회장은 집사가 맡아서 해 주고, 요리는 부엌의 하녀들이 도맡기로 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프란츠와 리안나는 하는 일이 없지 않나. 고민 에 빠진 프란츠를 바라보던 집사가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초대장을 만드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초대장이 요?”
“예. 직접 서명까지 해서 드리면, 가주님과 안주인 마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 말에 프란츠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프란츠가 살짝 목례를 해 보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집사.”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 경험해 봐 서 그런 것뿐이니까요.”
예전에 경험해 봤다고? 프란츠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더 캐묻기 보다는 빨리 나가서 어떤 초대장을
만들지 고민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남긴 프란츠가 방을 빠져나가고, 집사는 책상의 서랍을 살짝 열어 보았다. 그 안에서 종이를 끄집어낸다.
“……”
약간 색이 바랬지만, 아직도 빳빳한 하얀 종이 위로는 금박으로 문양 이 박혀 있었다.
서명된 이름은 '이엘리 헤센바이츠’. 예전 선대 공작이 살아 계실적, 안주인 마님이 공작성의 사용인들을 모두 초대하여 열었던 티파티의 초대장이었다.
집사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래, 그랬었지.”
작게 중얼거린 집사가 다시 초대장을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그 동작이 굉장히 경쾌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일을 해 볼까.”
그렇게 속삭이며, 길게 기지개를 켜는 집사의 얼굴은 무척이나 상쾌해 보였다.
* * *
프란츠와 리안나는 머리를 맞댄 채, 거실의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리안나, 그래서 초대장을 만들려 고 하는데.”
“응, 응.”
“어떤 모양으로 만드는 편이 좋을 까?”
“난 초대장에 향기가 났으면 좋겠어. 그 편이 더 기분이 좋잖아. 그리고 꽃무늬!”
……어쩐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축하 파티가 아니라, 리안나의 취향을 맞추는 파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프란츠는 뚱한 얼굴로, 활기차게 목소리를 높이는 여동생을 보았다. 바로 그때.
“너희 여기서 뭐 하니?”
“어, 엄마?!”
불쑥 뒤에서 튀어나온 이엘리가 두 아이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화들짝 놀란 두 아이는 황급히, 초대장의 모양새를 끼적이던 종이와 연필 따위를 치워 버렸다.
‘아무래도 이 사고뭉치들이 뭔가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의심을 가득 담아, 이엘리는 팔짱을 낀 채 아이들을 응시했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뭔가 사고를 친 게 있다면, 지금 말하는 게 좋아.”
“없어요!”
“진짜로?”
“진짜로요!”
아이들은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흐음. 연한 녹색 눈동자가 아이들을 관찰하듯 뜯어보며 가늘어졌다.
하지만 리안나뿐 아니라 프란츠까지 억울해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정말로 사고를 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미래에까지 사고를 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래, 얘들아. 너희를 믿을게.”
그녀의 화사한 미소에 아이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적으로 엄격하신 아버지에 비하자면, 두 남매의 어머니는 언제나 온화한 분이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다정함에도 불 구하고, 공작성의 최고 권력자로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화가 나면 제일 두려워지는 분이라는 거지.’
프란츠는 흘끔 어머니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화가 날 때도 절대로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다만 싸늘한 목소리로 아이들의 잘못을 조곤조곤 짚어 말하는데, 그때 마다 어찌나 두려운지 심장이 차가워 질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마음만 먹으면 두 남매가 숨기려 하는 모든 일을 알아내곤 했다.
프란츠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엄마, 저 동화책 읽어 주시면 안 돼요?”
그때 리안나가 이엘리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며 입을 열었다.
이엘리는 가볍게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별말 없이 리안나를 안아 들었다.
딸아이를 품에서 추스르던 그녀가 아들을 응시했다.
“그래, 그러자. 프란츠도 함께 가겠니?”
“네!”
어머니를 뒤따르던 프란츠는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리안나의 눈치 없음이 그들 남매를 구원할 때도 있었다.
이번 일,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지. 프란츠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 * *
프란츠와 리안나는 마침내 부모님께 드릴 초대장을 완성했다.
상대적으로 단정한 글씨체를 가진 프란츠의 초대장과는 다르게, 리안나의 초대장은 아직 글자가 삐뚤빼 뚤했다.
그나마도 제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리안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글씨 연습 좀 미리 해 둘 걸.”
“내가 글씨 연습하라고 했지?”
프란츠가 얄밉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리안나는 그만 잔뜩 약이 올랐지 만, 글씨 연습을 하지 않은 건 자신이었기에 뭐라 더 할 말도 없었다.
프란츠는 그런 여동생에게 씩 웃어 보였다.
“엄마에게는 내가 전해 드릴게. 아빠한테는 네가 전해 드려.”
“응, 그럴게.”
아이들은 시선을 맞추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완벽했다. 하녀들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었고, 집사에게는 소연회장을 모두 정리해 두 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젠 부모님을 축하해 드리기만 하면 돼.’
특히 오늘 밤, 부모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기 위해 준비해 둔 것도 있고.
리안나와 프란츠는 각자 부모님에 게로 향했다. 먼저 움직인 쪽은 프란츠였다.
똑똑, 노크 소리를 들은 이엘리는, 살펴보던 예산안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시간에 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들어와요.”
그 대답에, 드물게 자신만만한 눈 빛을 한 프란츠가 방에 발걸음을 들였다.
“어머, 프란츠?”
얘가 웬일로 이 시간에 내 방에 찾아왔지?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이엘리가 아들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니, 이 시간에 엄마를 다 찾아오고.”
“그게……”
잠시 우물쭈물하던 프란츠가 조심스럽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엘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니?”
"초대장이예요.”
“초대장?”
그 말에 프란츠가 코끝을 찡그리며 씩 웃었다.
어린 아들의 미소는 무척이나 수줍었다.
“네. 오늘 엄마와 아빠, 결혼기념일 이시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 아이들을 재운 이후에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었다.
이엘리는 약간 놀란 눈으로 초대장을 열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