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화
외전 5
헤센바이츠 공작성에서 리안나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바로 부엌이었다.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간식을 얻어먹기 위해 자주 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리안나는 이미 부엌의 하녀들과 수 없이 눈도장을 찍은 상태였고, 하녀 들은 어린 공녀님이 들락날락 거리며 간식을 요청하는 모습을 귀여워했다.
“오빠도 푸딩 먹고 싶지?”
프란츠는 당당한 얼굴로 푸딩을 떠 먹는 여동생을 질린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오늘도 부엌에서 열정적인 애교를 펼친 리안나는, 그 대가로 푸딩을 얻어낸 상태였다.
프란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먹고 싶은데.”
“아닐걸? 오빠도 푸딩이 먹고 싶을 걸?”
기세 좋게 말한 리안나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프란츠를 올려다보았다. 그대로 말을 잇는다.
“오늘 저녁에 나올 크렘브튈레를 양보한다면, 오빠한테도 푸딩을 좀 나눠 줄 수도 있는데.”
“나 푸딩 안 먹고 싶다니까?”
“거짓말, 오빠는 푸딩이 먹고 싶을거야!”
“……리안나, 그냥 내 몫의 크렘브될레까지 네가 먹고 싶다고 해.”
프란츠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여동생을 흘겨보았다.
리안나는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 줄 거야?”
"아니.”
단호하게 대답하자, 리안나는 양 뺨을 부풀렸다. 한숨을 내쉰 프란츠가 리안나에게 말했다.
"저기, 리안나. 내가 오늘 널 찾아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아, 아빠다!”
그러나 프란츠의 목소리는 활기찬 리안나의 외침에 묻혀 버렸다.
때마침, 리안나가 정원에서 가신들 과 함께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 고, 프란츠는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 그리고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쪼르르 달려가 버리는 여동생을 따라서, 프란츠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의 태도가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부드러워 졌기에, 아직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프란츠와는 달리 리안나는 꽤나 아버지를 잘 따랐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지금 상황에서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리안나?”
아, 망했다. 프란츠는 두 눈을 질 끈 감았다. 리안나를 바라보던 자카리가 프란츠에게로 시선을 옮기고
만 것이다.
잠시 후, 자카리는 약간 의아한 얼굴이 되어 프란츠에게 물었다.
"프란츠까지, 여긴 어쩐 일이냐?”
“그게, 부엌에서 푸딩을 먹으려고 했는데, 아빠가 보여서……”
리안나는 자신이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했 고, 자카리는 그런 딸아이를 온기 서린 눈동자로 내려다보았다.
프란츠는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적어도 아버지께서 이번 일로 화가 나시지는 않은 것 같다.
그때, 가신들이 두 남매에게 인사를 건넸다.
“공녀님, 잘 계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공작 각하.”
가신들의 정중한 인사에, 방긋 미소 지은 리안나는 발랄한 목소리로 마주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리안나는 가신들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란츠는 꽤나 의젓한 얼굴로, 가신들의 이름을 일일이 이야기하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달튼 백작. 마린 자작 도요.”
소공작의 단정한 대답에, 가신들은 감탄 섞인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프란츠가 물었다.
“담소를 나누는 중이셨습니까?”
“예, 이번 안건에 대한 논의를 끝내고 잠시 쉬는 중이었습니다.”
달튼 백작이 웃으며 대답했다. 정원을 응시하던 마린 자작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헤센바이츠 공작성의 정원은 언제 봐도 아름답군요.”
아샤꽃잎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 모습을 사람들은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공작가의 정원에는 가문의 상징인 아샤꽃나무를 많이 심어 두었었는데, 최근 정원을 다시 단장하면서 아샤꽃나무는 더욱 늘어났다. 공작 부인이 아샤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공녀님, 과자 하나 드시겠습니까?”
“네!”
테이블에 놓여 있던 과자 접시를 밀어 주자, 신이 난 리안나가 다람쥐처럼 양볼이 볼록하도록 과자를 밀어 넣었다.
귀여운 공녀님의 모습에 가신들은 그만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말았다.
‘귀여워!’
‘나도 저런 딸이 한 명만 있었으면……!’
가신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주전 부리와 음료수를 내밀었다.
리안나는 거절하지 않고 남남 과자를 먹었다. 우유를 꿀꺽꿀꺽 마신 리안나가, 입에 우유 자국을 남긴 채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오빠는 안 와?”
“리안나 너, 입에 우유 자국이 묻었잖아.”
프란츠는 불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때 자카리가 자연스럽게 리안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 손수건을 꺼내 딸아이의 입술을 닦아 준다. 그 모습에 가신들은 그만 화들짝 놀라 고 말았다.
‘그 냉정한 공작 각하께서 공녀님을 무릎에 앉힌다고?!’
가신들은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긴, 안주인 마님을 그렇게나 사랑하시니까. 자식들에게는 유하실 수도 있겠다.
리안나의 손에 쿠키 하나를 쥐여 준 자카리가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프란츠도 이리 오거라.”
“아, 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프란츠가 얌전히 자카리 곁에 주저앉았다.
자카리는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아 직 앳된 티가 나는 아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때, 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아빠, 아.”
과자 조각을 자카리의 입 앞에 들 이댄 리안나가 생글 웃었다.
자카리는 ‘좋은 아빠’와 ‘공작의 위엄’ 사이에서 고뇌하는 눈빛을 했으나, 결국 '좋은 아빠’를 택했다.
머쓱한 얼굴로 자카리가 과자를 입으로 받아먹자, 가엾은 가신들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우리에게는 험악한 표정으로 협박 까지 하시더니!’
하지만 그런 가신들의 속내 따위 전혀 모르는 리안나는, 이젠 오빠에게 과자를 내밀었다.
“오빠도 아 해.”
사실 간식 욕심이 많은 리안나로서는 최대의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프란츠 또한 자카리와 마찬가지로, ‘좋은 오빠’와 ‘점잖은 소공작’ 사이에서 고뇌하는 과정을 거쳐야했다.
결국 ‘좋은 오빠’가 승리했기에, 프란츠는 입으로 과자를 받아먹었다. 가신들은 귀신에 홀린 낯을 했다.
‘……사이좋은 가족이시군.’
그렇게 가신들은 간신히 현실을 받아들이었다. 그 와중, 공작 일가만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 * *
아버지와 가신들 사이에 끼어서 알차게 간식을 뜯어낸 리안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어른들과 헤어졌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는지 프란츠를 올려다보았다.
“오빠, 그래서 나한테 할 말이 뭐 였는데?”
"……그걸 이제야 물어보니?”
프란츠는 그만 피곤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리안나는 어깨만을 으쓱여 보일 따름이었다.
"그게, 오빠가 하는 말은 항상 별 거 아니더라고.”
“뭐라고?”
“매번 잔소리만 하잖아. 얌전히 걸어라, 부엌에서 간식 달라고 떼쓰지 마라……”
리안나를 위해 했던 수많은 조언들이 그저 ‘잔소리’로 치부되는 순간이었다.
프란츠는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제 오빠를 빤히 올려다보던 리안나가 빙그레 눈웃음을 쳤다.
"그래서 그 얘기가 뭔데?”
“너,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알아?”
아, 이건 중요한 얘기 맞네. 리안나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프란츠는 곧장 말을 이었다.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결혼기념일 때 무엇을 해 드릴지 생각해 봤어?”
“어, 음, 글쎄……”
“……안 해 봤구나?”
찔끔한 리안나가 애써 프란츠의 시선을 피했다. 프란츠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근데, 난 결혼기념일 때 무엇을 해 드릴지 이미 결정했거든.”
"뭐, 뭔데?”
"깜짝 파티.”
헉, 대단해. 내 오빠가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리안나는 제 오빠와 함께 남매로서 살아왔던 시간들 중,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프란츠는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리안나도 나를 도와줘야 해, 알았지?”
“으, 응. 알았어.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너, 부엌 하녀들과 친하지? 매번 간식을 달라고 조르느라 찾아가잖아.”
“그렇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의미를 담아 리안나는 제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파티의 기본은 뭐겠어?”
“그야 당연히 음식…… 아, 그렇구나!”
리안나가 자리에서 팔짝 뛰어올랐다.
고개를 끄덕인 프란츠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너도 아예 눈치가 없지는 않구나.”
“뭐라고?!”
리안나가 발끈했다. 흠흠, 헛기침을 한 프란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무튼, 하녀들에게 음식을 준비 해 달라고 해야 해.”
“좋아, 그건 내게 맡겨!”
리안나가 양 주먹을 앙증맞게 움켜 쥐었다. 그래, 네가 있으니 음식 문제라도 해결되어서 다행이다.
아련한 눈빛으로 리안나를 바라보던 프란츠는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 * *
다음날, 리안나는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세상에, 공녀님.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쩌죠? 아직은 식사 준비에 바빠 서, 공녀님께 챙겨 드릴 간식이 없는데.”
한창 아침 식사 준비를하고 있던 하녀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안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간식 먹으러 온 거 아냐.”
“그럼요?
고개를 가로저은 리안나가 위풍당 당하게 부엌의 하녀들을 돌아본 후, 씩 웃었다.
“그게, 부탁할 게 있어서!”
분명 프란츠가 곁에 있었더라면, ‘부탁하는 사람은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라고 핀잔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 공녀님을 귀엽게 여기는 부엌 하녀들 뿐이었다.
그랬기에 리안나는 여전히 당당한 얼굴로 부엌 하녀들에게 말을 이었다.
“있잖아, 근데 이건 비밀이거든.”
"비밀이요?”
“응. 다들 비밀 지켜 줄 거지?”
비밀 지켜 줄 수 있어? 도 아니고 비밀 지켜 줄 거지? 라니.
항상 리안나의 몸가짐을 살펴보던 프란츠가 보면, 제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서글퍼 할 언사였다.
하지만 부엌 하녀들은, 안주인 마 님을 쏙 빼닮은 공녀님을 보며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럼요, 누구 말씀인데요.”
"당연히 비밀은 지켜 드려야죠.”
그 말에 리안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 확인 절차를 거친 후에야, 리안나는 하녀들에게 바짝 다가왔다.
하녀들은 공녀님을 위해 기꺼이 몸을 숙여 주었다.
“사실은 이제 조금 있으면 엄마 아빠가 처음 만난 날이 되는데, 축하 해 주고 싶어서.”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하녀들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미소가 번졌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그런 탄성을 간신히 삼키며, 하녀 들이 리안나를 마주보았다.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기특한 생각을 하셨네요.”
“진짜? 엄마 아빠가 기뻐하실까?”
"그럼요. 공녀님은 가주님과 안주인 마님의 자랑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