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1/196)

22 화

이엘리는 어린 딸에게, 활짝 핀 아샤 꽃이 가득 매달린 꽃가지를 내밀며 웃었다.

리안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 하게 커졌다. 이엘리가 딸아이를 답삭 안아들자, 리안나가 놀란 음성을 냈

다.

“어, 엄마?”

“엄마를 위해 꽃을 꺾느라 물에 빠진 거라며?”

그 말에 리안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구나, 할머니랑 할아버지께서 얘기해 주신 거구나. 아이는 푹 고개를 숙였다.

엄마가 안겨 준 꽃가지에서 달큼한 향기가 올라왔다.

“엄마가 그것도 모르고, 우리 리안나를 혼내기만 했네.”

“……아니예요, 제가 잘못한 건 맞 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리안나가 흘끔 제 오빠를 바라보았다. 제 오빠는 얼떨떨한 얼굴로 아빠의 품에 안겨 있었다.

평소 그리 살갑지는 않은 아버지의 애정표현에, 프란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쁨과 당황스러움이 반반으로 뒤 섞인 얼굴이 존경하는 아버지를 조심스레 올려다본다.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 들다니, 대단하구나. 내 아들.”

자카리는 약간 어색하지만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내 아들. 그 단어에 프란츠는 울컥하고 말았다.

프란츠를 무릎에 앉힌 채, 자카리는 아이의 곧은 등을 쓸어내렸다.

“고생했다, 프란츠.”

"……아버지.”

프란츠의 울먹거리는 시선이 자카리를 향했다.

그때, 이엘리가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자아, 그래서.”

아이들의 시선이 이엘리에게로 쏠렸다. 이엘리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모두 모시고, 후원에서 다 같이 티타임을 가질까 하는데.”

“……진짜요?”

두 남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티타임은 어른들의 행사였기에, 아이들은 참여할 수 없는 행사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두 남매는 단 한 번도 정식 티타임에 초대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당연히 티타임에 대한 환상도 컸다.

빙긋 눈웃음을 친 이엘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여 주었다.

“그럼. 엄마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는 것 봤니?”

“와아!”

먼저 탄성을 내지른 쪽은 리안나였다. 잔뜩 흥분한 리안나가 이엘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 가는 거예요?”

“당연하지.”

“와아아!”

다시 한 번 환성을 내지른 리안나가 이엘리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꽃가지가 상하지 않도록 소중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아이가, 도도도 달려 화병을 움켜쥐었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리안나가 어쩌는지 지켜보았다.

리안나는 야무진 손길로 화병에 찬 물을 가득 채웠다. 꽃가지를 화병에 꽂은 리안나가, 당당한 얼굴로 제 부모님을 돌아보았다.

"준비 다 됐어요! 얼른 가요!”

“그래, 그러자.”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린 이엘리는 어린 딸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안나는 엄마의 손을 꼭 맞잡았다.

프란츠의 어깨를 도닥여 준 자카리가 몸을 일으켰다. 네 가족은 곧 후원으로 향했다.

* * *

활짝 만개한 아샤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하얗게 칠한 조그만 나무 테이블과 의자들이, 우아한 후원의 풍경과 어우러졌다.

장난감 세트처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위로는 티타임을 위한 다과 세트가 완벽하게 차려져 있었다.

오늘의 다과는 잘 구워진 스콘과 갖가지 잼, 그리고 클로티드 크림이었다.

프란츠는 괜히 점잔을 빼느라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리안나는 스콘 위에 클로티드 크림과 라즈베리 잼을 범벅으로 발라서 입에 넣었다.

“그래, 티타임에 처음으로 참석해 본 기분은 어떠니?”

“……그냥 간식 먹는 시간이랑 똑 같은 것 같아요.”

이엘리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눈동자를 굴리던 리안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어른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카리는 아들의 앞에 스콘 접시를 밀어 주었고, 프란츠는 귀 뒤를 빨갛게 붉히며 스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엘리는 손수건을 들어, 잼과 크림을 잔뜩 묻힌 리안나의 입을 닦아 준다.

자연스러운 가족의 모습을 자작 부부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오늘은 엄마 아빠 주변에서 멀리 떨어지면 안 돼.”

바로 오늘 아침에 물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으니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이엘리는 두 남매에게 단단히 일렀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안나는 엄마의 말을 편할 대로 해석했다.

'물에만 가까이 가지 않으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한 리안나가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시야를 어지럽힌 탓이다.

나비를 잡기 위해 움직이다 보니, 리안나가 발을 재게 놀리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리안나, 그렇게 뛰면 안 돼! 넘어지잖니!”

팔랑팔랑 뛰어가는 리안나를 바라보던 이엘리는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프란츠는 곧장 여동생을 잡으러 달려갔다. 프란츠가 리안나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본 후에야 이엘리는 약간 안도했다.

그리고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꽃다발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자, 이엔.”

"고마워. 근데 이건 왜 주는 거야?”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꽃다 발을 응시했다.

활짝 핀 아샤꽃가지를 중심으로 갖가지 봄꽃들을 모아 만들었다.

갓 꺾인 풀 특유의 싱그러운 냄새와 달콤한 꽃향기가 섞여,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자카리는 이엘리의 품에 꽃다발을 안겨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이들만 꽃을 챙겨 줬지, 넌 아무것도 안 받았잖아.”

“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 두 눈을 깜빡 이는 이엘리에게 자카리가 두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나머지 꽃은, 글쎄…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

결혼을 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는 데, 아직도 제 남편은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준다.

꽃다발의 보드라운 꽃잎을 어루만지던 이엘리는 양 뺨을 붉혔다.

"솔직히, 저 아이들 말이예요.”

그리고 두 사람의 달콤한 분위기를 바라보던 자작은, 불만스럽게 제 아내를 돌아보았다.

"결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신혼부부 행세예요?”

"그러게 말이예요. 다른 사람들까지 낯간지러울 정도인데, 우리 눈도 좀 생각해 주지.”

자작 부인도 작게 투덜거렸다. 두 부부가 사이좋은 건 좋은데, 그 달콤한 분위기를 지켜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민망해지고 마는 것이다.

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던 자작 부부를 구원한 것은, 어느새 양손에 토끼풀꽃을 가득 따 온 프란츠와 리안나 남매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쪼르르 달려온 아이를이 자직과 자작 부인의 양손을 붙들었다.

토끼풀을 엮은 아이들이, 능숙하게 넷째 손가락에 반지를 만들어 준다. 어리둥절해진 조부모님을 향해, 아 이들이 헤헤 웃음을 지었다.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리안나가,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부부니까 결혼반지 예요!”

“그런 거니?”

“네! 엄마랑 아빠한테도 만들어 주 려고요!”

어느새 프란츠는 자카리와 이엘리에게 가 있었다.

리안나만큼 손끝이 야무지지 못한 프란츠가 쩔쩔매고 있자, 리안나가 ‘오빠는 그것도 못 해?’라며 핀잔을 준다. 프란츠는 약간 억울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의 손에도 반지를 만들어 준 리안나가 제 오빠의 손목에 토끼풀꽃을 엮어 주었다.

동그란 꽃이 앙증맞게 팔찌 모양을 이루자, 리안나가 씩 웃었다.

“오빠랑 나는 남매니까 팔찌야.”

도대체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안나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프란츠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묘하게 뿌듯한 얼굴이 된 리안나가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똑같은 액세서리를 나눠 끼는 거야.”

그 말에 자카리가 멈칫했다. 가족 이니까. 그 단어가 그의 심장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자카리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던 이엘리가 그의 팔짱을 끼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안나의 말, 들었지?”

“……응.”

고개를 끄덕이는 자카리의 목 뒷덜미가 붉었다. 배도 불렀겠다, 토끼풀 꽃 액세서리를 하나씩 나눠 낀 여섯 가족은 연못을 따라 산책을 했다.

프란츠와 리안나는 어른들을 앞서 달려갔다. 오빠가 매의 눈으로 살펴 봐서인지, 리안나는 아까 전보다는 덜 까불거렸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느릿한 걸음으로 아이들을 따라 걸었고, 그 뒤를 자작 부부가 따라왔다.

“오빠, 저쪽에 그네 있는 거 봤어?”

“아까 보긴 했는데, 왜? 타고 싶어?”

“응, 나 밀어 줘!”

리안나와 프란츠의 대화를 듣던 이엘리는 문득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흘끗 뒤를 돌아보자, 자작이 어깨를 으쓱이며 제 딸과 시선을 맞췄다.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설마, 제가 어렸을 때 타던 그 그네…… 버리지 않은 거예요?”

"그걸 버리긴 왜 버리니?”

자작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자작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적, 네가 그 그네를 얼마 나 좋아했는데.”

“네 아빠가 얼마나 주책인지 아니, 이엔?”

그때 자작 부인이 대화에 톡 끼어 들었다. 자작 부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예전에, 네가 결혼해서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말이야.”

열세 살 무렵을 말씀하시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엘리에게 자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혼자 밖에 나가서 그 그네를 흔들고 있지 뭐니.”

“부인도 참, 무슨 그런 얘기를 해 요?”

“뭐 어때요, 제가 없는 말이라도 했나요? 얘기할 수도 있지.”

자작 부부는 서로 조그만 목소리로 아옹다옹했다. 이엘리는 잠시 침묵했다.

언제나 그녀를 사랑해 주는 부모님의 애정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물결처럼 밀려드는 그 애정이 다사 로웠다.

잠시 후, 두 부모님은 빙그레 눈웃음을 치며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손주들이 온다기에, 일 부러 그 그네를 꺼내 두었단다.”

“이엔, 너는 이제 그네를 탈 나이는 지났지만.”

그 다정함에 이엘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부모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하다.

“손주들의 그네를 밀어 줄 정도의 힘은 남아 있으니까.”

“……엄마, 아빠.”

“어머나, 우리가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거니?”

느닷없이 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자, 자작 부부는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삼 스럽게 실감이 들었다.

자신은 프란츠와 리안나의 어머니 였지만,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 이라는 것을.

자작 부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딸에게 다가섰다.

“이엔, 왜 울고 그래. 응?”

“아니요, 그냥……”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잠시 후, 그녀가 부모님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모두에게 너무 고마워서요.”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러니.”

자작 부부가 이엘리를 다독여 주는 모습을 자카리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 두 아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 아빠!”

이엘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막 그 네에 매달린 두 아이가 커다랗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 곧 갈게!”

목소리를 높여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이엘리는 눈물 고인 눈으로 다시 한 번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삶은 이토록 다사롭다. 행복해.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