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196)

21 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그게.”

리안나는 우물쭈물했다. 엄마는 그렇다 치고, 아빠는 지금 일로 바쁠 텐데. 모든 일을 놓아두고 날 보러 오신 건가.

민망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리안나는 손끝만 꼼질거렸다. 프란츠 또 한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던 프란츠는, 부모님과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때,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자작이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당장 그 연못을 메워 버려야겠어!”

극단적인 외할아버지의 말에 프란츠와 리안나는 동시에 화들짝 놀라 버렸다.

“아, 아니예요! 엄청 예뻤어요!”

“맞아요, 다 같이 모여서 한 번 더 가고 싶었는걸요!”

두 남매가 입을 모아 외쳤고, 그 말에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두 남매는 간신히 연못의 안전을 지킨 것에 안도했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어른들과 동행하지 않으면 연못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이미 말했을 텐데.”

그랬었다. 어제 두 남매가 연못에 호기심을 보이자, 어른들은 위험하다며 아이들끼리는 후원에 가지 말 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근데 두 사람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먼저 가 버린 것이다.

두 아이는 어른들의 눈치만을 살폈 다. 자카리는 가라앉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모처럼 외가에 내려왔는데, 이런 식으로 어른들 걱정을 시키다니. 실망이구나.”

“……죄송해요.”

두 아이는 그만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특히 프란츠는 기가 죽었다. 언제나 최고의 공작으로서 완벽해 보이는 아버지에게 ‘실망했다’라는 말을 들은 것 자체가 서글펐기 때문이었다.

“너무 그러지 말고, 아이들도 잘못했다고 하니까.”

보다 못한 자작 부부가 끼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고, 아이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특히 프란츠의 얼굴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왜 하필이면 지금 이런 소리가 나는지!’

아버지에게 혼나는 와중에, 위장까지 눈치 없게 군다. 사실 아침은 굶은 상태였고, 하루 종일 먹은 게 뜨거운 초콜릿 한 잔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다들 배고프지? 얼른 식사를 준비 시킬 테니, 표정 좀 풀거라.”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자작 부부는 호들갑스럽게 하녀를 불렀다.

잠시 후, 보드라운 흰 빵과 고기와 감자를 크게 썰어 넣은 뜨거운 크림 스튜가 올라왔다.

자작 부부는 아이들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울한 얼굴로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며 음식을 깨작거릴 따름이었다.

보다 못한 자작 부부가 이엘리와 자카리를 방 밖으로 몰아냈다.

“아이들은 우리가 달랠 테니, 이엔 너는 좀 나가 있어.”

“하지만, 엄마.”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네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으니 애들이 기를 못 펴잖아.”

음, 그런가. 이엘리는 머쓱한 얼굴로뺨을 매만졌다. 그 곁에서 블랑쳇 자작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공작님께서도 잠깐 나가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예.”

자작 부부의 등쌀에 못 이겨, 이엘리와 자카리는 방 밖으로 밀려 나갔다.

탁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히고, 두 부부는 약간 민망한 표정이 되어 서 로를 마주보았다. 자카리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너무 엄격하게 굴었을까?”

아까 ‘실망했다’라는 말에 순식간에 기가 죽던 프란츠와 리안나가 떠올랐다.

처음부터 저렇게 기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자카리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버지와 다르게 아이들을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하지만 이엘리는 단호했다.

“그렇지 않아.”

“……이엔.”

“난, 아이들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해 주는 사람은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잘못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라게 될 테니까.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했고, 자카리는 복잡한 눈동자를했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등을 작게 토닥거렸다.

“이제 혼날 만큼 혼났으니까, 아이 들도 뭔가 깨닫는 게 있겠지.”

"그럴까?”

"그래,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아이들 편이 되어 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있잖아.”

이엘리가 씩 눈웃음을 쳤고, 자카리는 그제야 약간 안도한 얼굴이 됐 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달래는 건 내 부모님께 맡기도록 하자. 알았지?”

"그래도 될까, 역시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어머, 자카리.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해?”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자카리의 목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체온, 다정한 목소리, 당연하게 자신에게 기대 오는 무게까지.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된 자카리가 제 아내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며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우리는 가족이잖아.”

가족. 그 단어는 언제나 자카리의 가슴을 따스하게 물들인다.

새싹 같은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이엘리는 코끝을 찡그리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내 부모님께서도, 아이들에게 점수를 딸 기회를 마다할 생각은 없으실 걸.”

그 말에, 자카리가 이엘리를 따라 조그맣게 웃었다. 그녀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

이엘리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제 아내에게서 흘러나오는 달큼한 아샤 향기를 느끼며, 자카리는 문득 생각했다.

아이들도, 블랑쳇 자작 부부도 모두 소중하다. 그에게 새로 생긴 가족을 위해서라면 자카리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엔, 네가 없으면 난 역시 안 돼.’

이엘리. 자카리에게 새로이 생긴 가족을 잇는 단 하나뿐인 연결고리.

그의 생명이자 삶의 이유, 유일하게 주어진 빛, 온기. 자카리를 살게 하고, 또한 죽게 하는 존재. 그는 숨을 삼켰다.

‘내 아버지도 아마 이런 기분이었겠지.’

가끔씩 이런 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될 때마다, 자카리는 기묘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자신의 등을 토닥거리는 이엘리의 손길을 느끼던 자카리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한편, 제 딸과 사위를 밖으로 밀어 낸 블랑쳇 자작과 자작 부인은 아이 들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어깨가 축 처진 채, 숟가락으로 스튜를 휘휘 젓고 있을 뿐이었다.

식욕이라고는 한 톨도 없어 보이는 모양새에, 자작 부인이 양손을 허리에 얹고 아이들을 응시했다.

“얘들아, 기죽을 것 없단다.”

당당한 목소리에 프란츠와 리안나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작이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할머니의 말이 맞단다. 아이들은 가끔 사고도 치고, 그러면서 자라는 법이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네 엄마도 얼마나 사고를 쳤는지 아니?”

그 말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과거를 떠올리던 자작은 그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지금은 엄격한 척하지만, 예전에 그 애도 얼마나 제멋대로였다고.”

“정말요? 엄마가 제멋대로였어요?”

프란츠는 놀란 얼굴이 되어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이엘리는 완벽한 자태를 가진 공작 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아한 행동거지와 아랫사람들을 잘 살피는 사려깊음까지, 남매의 어머니는 최고의 귀부인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예전에는 제멋대로였다고?

"그래, 그 애가 쳤던 제일 큰 사고는 열세 살 때였는데……”

헤센바이츠 소공작과의 혼인을 강요하는 황제의 대리인 앞에서, 큰소리를 쳐 대던 이엘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고작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이후의 일은 모두 잘 풀렸고, 두 부부는 제국 최고의 잉꼬 부부로 소문이 나게 되었지…….

생각을 하던 자작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대충 말을 얼버무린다.

“……뭐, 그런 일이 있었다.”

호기심에 두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은 대번 실망한 낯을 했다.

하지만 자작은 더 말하지는 않았다.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사실 너희 어머니와 아버지는 황제가 억지로 결혼을 시켜서 이루어진 인연이 란다’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은 가.

다행히도 자작 부인이 주제를 전환 시켰다.

“그건 그렇고 얘들아, 어째서 물에 빠진 거니?”

상황 파악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꺼낸 질문이었다. 두 아이는 힐끔 서 로 눈을 맞추었다.

누가 설명할 것인지 두 남매는 격렬한 눈치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패배한 쪽은 리안나였다. 바짝 긴장한 리안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작게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아샤꽃을 좋아하시니까요.”

"……이엔 말이냐?”

“네. 그래서 아샤꽃을 꺾어다가 화병에 장식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 대답에 자작과 자작 부인은 서 로를 마주보았다. 리안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말을 듣지 않은 건 사실이니, 두 분이 화내시는 것도 당연해요.”

"그럼 프란츠는?”

"물에 빠진 저를 구해 주느라……”

리안나는 우물쭈물했다. 리안나도 희미한 자각은 있었다.

언제나 사고를 치는 것은 자신이었고, 오빠는 제가 저지르는 사고에 휘말린다.

자작 부인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부모님께서 많이 화나셨으면 어쩌죠?”

프란츠가 끼어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화가 나셨겠지만, 조금이라도 화를 풀어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부드럽게 웃은 자작이 손을 들어 프란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잘 말할 테니, 너희는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래도……”

“누구나 다 실수할 때도 있고, 사고를 칠 때도 있는 법이야.”

그 말에 아이들은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우리 엄마랑 아빠는 완벽한 사람들인데, 그런 생각이 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쿡쿡 웃음을 터뜨린 자작 부인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너희도 잘 알겠지만, 네 엄마와 아빠는 너희를 무척 사랑한 단다.”

그 말에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 아 이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작 부인이 말을 덧붙인다.

"고작이런 걸로 너희들을 미워하 거나 하지 않아, 알지?”

“네에.”

“그러니까 마저 식사하고, 오늘은 놀랐을 테니 푹 쉬거라.”

그 말에 아이들의 숟가락질이 드디어 빨라졌다. 설겅설겅 모래 씹는 맛만 나던 음식들이 이제야 맛있게 느껴진다.

블랑쳇 자작 부부는 아이들의 그러 한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 * *

이엘리와 자카리는 자작 부부에게 사건의 전말에 대하여 모두 듣게 되었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 준 자작 부부는, 이엘리에게 ‘너도 옛날에 사고 많이 쳤으니 아이들을 너무 잡지는 마렴’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엘리는 그만 약간 억울해지고 말았다. 난 아이들에게 상냥한 엄마인데!?

“……나를 위해서였구나.”

그러나 아이들이 자신을 생각하여 그렇게 행동했다는 건 역시 감동이었다.

그리하여 이엘리와 자카리는, 자작가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을 위해 작은 이벤트를 기획했다.

그날 오후, 리안나와 프란츠는 두 부모님에게 깜짝 선물을 받게 되었다.

“이것 받으렴, 리안나. 선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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