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화
황가와의 모든 일들이 정리되고, 자카리와 함께 참석했던 아샤 축제가 문득 생각났다.
어렸을 때의 약속을 지켰던 그때. 그 순간부터 이엘리의 삶은 무척 충만해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얻었고, 자카리는 더 이상 쓸쓸한 얼굴을 하지 않는다. 그때 자작이 말했다.
“이엔, 요새 무척 행복해 보이는구 나.”
“행복해요.”
이엘리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사실이었으니까. 행복했다. 이 이상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로. 그 대답을 들은 자작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서, 우리도 공작 각하께 무척 감사하고 있단다.”
이엘리는 의아한 얼굴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자작은 다정한 목소리 로 이엘리에게 속삭였다.
"너는 우리보다도, 공작 각하 곁에 있을 때 훨씬 더 환하게 웃거든.”
“……아.”
이엘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작이 이엘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자식이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만큼, 부모가 기쁜 일도 없단다.”
“아빠.”
“잊지 말렴, 이엔. 넌 우리들의 기쁨이고 자랑이야.”
그 속삭임에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리안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엄마! 할아버지!”
“어이구, 우리 강아지 왔니?”
자작은 금세 함박웃음을 지으며 리안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저 뒤로는 자작 부인과 프란츠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엘리는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커튼을 걷은 자카리가 이엘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리안나와 프란츠가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었다.
“아빠, 여기예요! 여기!”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비록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자신을 아끼는 건 모두 알아보았다.
자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엘리도 살며시 손을 흔들 어 주었다.
"할머니, 그러고 보니 저택에 후원 도 있어요?”
잠시 후, 아버지에게서 관심을 거 둔 리안나가 자작 부인에게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후원도 있단다.”
"후원엔 뭐가 있는데요?”
“작은 연못이 있지. 아샤꽃나무도 많이 심어 뒀단다.”
“우와!”
리안나가 두 눈을 반짝였다. 당장 이라도 후원으로 달려가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한번 가 보렴.”
그런 리안나를 자작 부인이 다독였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설명을 덧붙인다.
“아샤꽃나무들은 네 엄마가 태어 날 때 심은 건데, 지금은 꽤 튼튼하게 자랐단다.”
그 상냥한 목소리에는 이엘리를 향한 애정이 가득 차 있어, 이엘리는 조금 부끄러운 한편 가슴이 따스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 *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프란츠와 리안나는 후원으로 향했다.
어제 할머니가 이야기했던, 아샤꽃이 흐드러진 모습이 너무 궁금했 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후원에 도착한 두 아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하게 터졌다. 동 시에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우와.”
어제 할머니가 자랑스럽게 말했던 이유가 있었다.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북부와는 다르게, 봄이 만개한 남부의 정원은 환상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초봄, 봄을 처음으로 알리는 아샤꽃. 연분홍색 꽃잎들이 구름처럼 피어났고, 가지를 살랑이며 꽃잎을 떨 어뜨린다.
“저기 봐, 리안나. 벤치도 있어!”
프란츠가 연못 근처를 가리켰다. 두 꼬마는 쪼르르 달려가서 연못 안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연못 안쪽으로 빨간 비단잉어들이 헤엄친다.
성인 남성의 가슴께에 닿을 높이의 연못은, 어찌나 맑은지 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팔랑팔랑 떨어지는 꽃잎들이 연못 위로 스치며 파장을 이루었다.
연못 주변을 동그란 돌로 예쁘게 감싸 곳곳에 꽃을 심어 두었다.
“리안나, 마음에 들어? 집에 돌아 가면 우리도 이런 정원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할까?”
"응! 진짜 예뻐!”
다정한 오빠의 물음에 리안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매는 연 못을 한 바퀴 돌며 산책했다.
아직 바람은 쌀쌀했지만 그만큼 상 쾌했다. 폐부가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리안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리안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리안나, 돼지도 아니고 맨날 배고 파?”
“오빠, 정말!”
장난스러운 물음에, 리안나가 눈에 힘을 주고 프란츠를 노려보았다. 쿡쿡 웃음을 터뜨린 프란츠가 리안나의 뺨을 살짝 튕겼다.
하긴, 아침도 먹지 않고 뛰어 나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들어가서 아침 먹을래?”
“싫어, 좀 더 있고 싶단 말이야.”
리안나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런 리안나를 바라보던 프란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부엌에 좀 다녀올 테니까.”
"진짜?”
"샌드위치 정도면 되지?”
"그럼! 오빠 사랑해!”
이럴 때만 사랑한다니까.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프란츠는 피식 웃었다.
귀여운 여동생의 머리카락을 쓰다 듬는 척, 엉망으로 헝클어뜨려 놓자 리안나가 잔뜩 신경질을 낸다.
“오빠아!”
"도시락 대신 싸 오는 값이야.”
“치사해, 정말!”
리안나가 뚱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프란츠는 어깨를 으쓱여 보일 따름이다.
"얌전히 있어야 된다?”
한 마디 말을 덧붙이자, 볼을 잔뜩 부풀리면서도 알았어,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싱긋 웃은 프란츠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설마 이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사고가 터지려고, 생각하면서.
* * *
벤치에 오도카니 앉은 리안나는, 눈앞에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아샤 나뭇가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분홍색 꽃잎이 화려하게 흐드러진 아샤꽃가지는, 화병에 꽂아 두면 예쁠 것 같았다.
‘엄마가 아샤꽃을 참 좋아하는데.’
만약 아샤꽃가지를 꺾어다가 엄마에게 갖다 주면, 엄마가 기뻐하며 칭찬을 해 주지 않을까?
‘우리 리안나, 엄마를 위해 이 꽃 가지를 꺾어 온 거니?’
엄마가 행복한 목소리로 저를 칭찬하는 모습을 떠올리던 리안나가 헤실헤실 웃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후의 간식 시간에 타르트 한 조각이라도 더 얻어 낼 수 있을지도!
즐거운 상상에 가득 찬 리안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치에 올라가 발뒤꿈치를 바짝 올리고, 작은 고사리손을 뻗는다. 하지만 리안나의 작은 키를 놀리기라도 하듯, 꽃가지는 닿을 듯 닿지 않았다.
‘조,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될 것 같은데……?’
연못 위에 분홍색 꽃그늘을 만들며 꽃가지가 가볍게 흔들렸다.
오기가 난 리안나가 껑껑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리안나의 몸이 휘청, 흔들린다. 그대로 균형을 잃어버렸다.
“꺄악!”
리안나가 비명을 질렀다.
풍덩! 작은 몸이 연못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떨어지고, 차가운 물이 코와 입으로 밀려들었다.
물 자체는 깊지 않았기에 성인이라면 금방 빠져나올 수 있지만, 문제는 리안나는 아직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리안나가 콜록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사, 살려 주세요!”
콜록, 콜록! 기침을 내뱉자, 차가운 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깜짝 놀란 리안나가 더욱 거세게 몸부림을 쳤다.
무서워, 이러다 죽으면 어떡해?! 리안나가 공포에 질려 가던 때.
"리, 리안나!”
흐린 시선 너머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오빠, 프란츠가 물에 뛰어들었다.
* * *
부엌으로 직접 찾아간 프란츠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리안나는 채소보다는 고기를 좀 더 좋아했기에, 리안나가 좋아하는 살라미 소시지를 특별히 많이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자작가의 하인들은 속을 꽉꽉 채워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직접 착즙한 오렌지주스까지 한 병 넣으니, 자연스레 양손이 묵직해졌다.
“리안나 녀석, 오빠를 부려먹기나 하고.”
그럼에도 리안나를 생각하는 프란츠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시바삐 돌아가서 리안나의 입에 샌드위치를 물려 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바쁘게 발을 움직이고 있던 때.
"리, 리안나!”
연못에 빠진 리안나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프란츠는 들고 왔던 바구니조차 내팽개치고 리안나를 구하 러 달려갔다.
당장 물에 뛰어들자, 발버둥을 치던 리안나가 프란츠를 꽉 끌어안았다.
“푸아!”
어떻게 리안나를 물 밖으로 끌어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두 남매는 간신히 물 밖으로 기어 올라올 수 있었다.
리안나는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 도대체 왜 물에는 들어가 서……!”
여동생을 품 안에 단단히 끌어안은 채, 프란츠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는 빠득 이를 앙다물었다. 아직 물에 들어가기에는 날이 차가 웠기에, 리안나의 몸이 실시간으로 차가워지고 있었다.
당장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 상황이다. 리안나가 바들바들 떨며 속삭였다.
“그, 그게. 엄마가…… 아샤꽃을 좋아하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프란츠는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아샤꽃이니까, 아샤꽃을 선물하면서 엄마에게 점수를 따 볼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 속내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프란츠는 더욱 화가 났다. 바짝 날 이 선 프란츠가 리안나를 안아 들었다.
“바보도 아니고, 나한테 먼저 말해 줬으면 됐을 것…… 아냐, 아니다.”
리안나를 혼자 두고 간 자신의 잘 못이 훨씬 더 컸다.
리안나가 사고뭉치인 것을 알지 못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단둘이 나오지 말 걸 그랬어.
여동생 하나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 하다니, 오빠 실격이야. 뒤늦은 후회와 함께 프란츠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빠.”
“……”
어떡해, 오빠가 화가 많이 났나 봐.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프란츠의 얼굴은 그저 서늘하기만 했다.
추워서 이가 딱딱 부딪치는 와중에도 리안나는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 *
흠뻑 젖은 리안나를,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프란츠가 달랑 들쳐 안은 채 자작저에 돌아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요!?”
"두 분 모두 괜찮으세요!?”
당연히 자작저는 난리가 났다. 뒤집어진 자작저와, 깜짝 놀라 내려온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기 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된 부모님까지.
두 남매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급히 불려온 의사가 두 아이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신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찬물에 들어갔으니 체온이 많이 떨어졌을 거라는 말이 함께했다.
뜨거운 물에 아이들을 씻기고 따뜻한 음식을 먹이라는 처방에, 자작저는 다시 한 번 분주해졌다.
따끈한 물에 몸을 씻긴 후 담요에 둘둘 말려 뜨거운 초콜릿까지 한 잔 들려 준 후에, 이엘리와 자카리는 당장 두 남매 앞에 앉았다.
걱정스러움과 엄격함이 뒤섞인 그 얼굴을 보며 두 아이는 점점 작아졌다.
"두 사람 모두, 크게 다친 곳은 없어서 다행이구나.”
먼저 포문을 연 쪽은 이엘리였다.
하지만 두 남매는 다년간의 경험상, 어머니는 다정한 말을 앞세운 후 온갖 질문을 퍼부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