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196)

19 화

외전 4

헤센바이츠 공작성이 오랜만에 시끌벅적 해졌다.

헤센바이츠 공작 일가가 모두 여행을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안주인 마님의 부모님인 블랑쳇 자작 부부가 사는 제국 남부였다.

폐제와 날을 세웠을 무렵에는 블랑쳇 자작 부부를 북부에 모셨었지만, 황가와의 관계가 개선된 지금은 블랑쳇 자작 부부는 고향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오랜만에 뵙게 되는 거네.”

여행 준비를 위해 공작성의 사용인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공작은 간 만에 뵙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생

각하며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이엘리는 그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자카리,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자카리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내가 괜찮다는 데.”

이엘리는 당당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보고서 같은 거 안 써도 돼, 알았지?”

자카리는 그 말에 그만 찔끔하고 말았다.

블랑쳇 자작 부부에게 건넬 2차 보고서들은 이미 모조리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표정을 기민하게 살펴보던 이엘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이번에도 다 써 놓은거야?”

“으응……”   

이엘리는 그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게 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렴.

그 부분에 대한 설득은 그만둔 이엘리는,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애들이 어려서 긴 여행이 괜찮을 라나 몰라.”

저번 전시회 때도 아이들의 건강이 걱정스러워서 떼어놓고 갔는데.

이엘리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겨울도 모두 지나고 이젠 초봄이긴 했지만, 북부의 날씨는 여전히 칼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그런 이엘리를 보다 못한 자카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엔.”

“하지만.”

“저번에는 네가 일할 때 방해가 될 까 봐, 내가 데리고 있었던 거지만.”

그럼에도 이엘리는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카리는 이엘리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엔은 아이들을 지나치게 어리게 보는 것 같아.”

그 말에 이엘리는 한숨을 삼키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비록 쑥쑥 자라고 있었지 만, 그럼에도 이엘리에게는 아직 한참 어린 아이들 같았다.

그런 이엘리를 응시하던 자카리는, 제 아내를 가만히 끌어당겨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푸른 눈동자가 아이들을 제 안에 담아낸다.

“저만하면 마차 여행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러고 보면 그랬었지. 이엘리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자카리가 프란츠 나이였을 때쯤, 그는 이미 전투에 수없이 차출되지 않았었나. 그런 제 남편이 왠지 안 쓰립게 느껴져서, 이엘리는 그의 팔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자카리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게다가 제국 남부는 여기보다 날 씨가 훨씬 포근할 테니까, 아이들에게도 좋겠지.”

"그건 그렇지.”

이엘리는 마지못해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제국 남부는 북부와 다르게, 지금 쯤이면 봄이 무르익어있을 것이다. 자카리가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소곤거렸다.

“그리고 고향, 가 보고 싶잖아. 그렇지?”

“……”     

“꽤 오랫동안 방문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뵌 지도 오래되었고.”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서,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오랜만에 휴가를 간다고 생각하 자. 알았지?”

“고마워, 자카리.”

이엘리는 살짝 눈웃음을 쳤다. 그 들은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 * *

이엘리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이 들은 처음 해 보는 마차 여행에 아주 잘 적응했다.

멀미 하나조차 하지 않고 저들끼리 깍깍거리며 노는 통에, 이엘리가 아이들을 조용히 시켜야 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도착한 블랑쳇 영지는 이엘리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무척 평화로웠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저희 왔어요!”

미리 나와 있던 블랑쳇 자작 부부를 향해, 쪼르르 달려간 아이들이 와락 안겼다.

자작 부부는 아이들을 보듬으며 머 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블랑쳇 자작이 리안나를 덥석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들. 잘 있었어?”

“네에! 할아버지는요?”

"잘 있었지, 그래도 우리 리안나가 보고 싶어서 힘들었단다.”

그 대답에 리안나가 꺄꺄 소리를 내며 웃었다. 프란츠는 소공작인 제 입장을 생각했는지, 괜히 점잔을 빼 며 서 있었다.

그럼에도 블랑쳇 자작 부인이 프란츠의 손을 꼭 잡자, 수줍은 얼굴로 헤헤 웃어 보인다.

한참 손주들을 어르고 달래던 자작 부부가 공작 부부를 응시했다.

“공작님, 어서 오세요.”

다정한 인사는 블랑쳇 자작 부인의 목소리다. 그 뒤를 시큰둥한 자작의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이엔, 요 녀석아. 아빠에게 자주자 주 편지하지 않고.”

“엄마, 오랜만이예요.”

자작 부인에게 인사를 건넨 이엘리 가볍지 않게 블랑쳇 자작을 흘겨보았다.

“아빠도 참, 그 정도 편지를 보냈으면 됐지. 뭘 더 보내요?”

“우리 딸, 이 아빠에게 너무 매정 하다는 생각 안드니?”

“일주일에 한 번이면 차고도 넘치 죠!”

두 부녀가 아웅다웅 말다툼을 했다.

어이구, 누가 부녀 아니랄까 봐 저 런 걸로 싸우고 있네. 그 부녀를 한 심하게 바라보던 자작 부인이 잠시 후, 자카리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편히 쉬다 가세요, 공작님.”

“감사합니다, 장모님.”

살짝 뺨을 붉힌 자카리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자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눈웃음을 쳤 다.

자카리는 약간 새삼스러워졌다. 과거에는 저 따스한 가족 사이에 자신이 들어가도 되는지 궁금했었다.

그는 저주받은 존재고, 겨울의 마법을 사역하는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괜찮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인간이 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곁에 있었으니까.

자카리는 한숨처럼 미소 지었다. 아이들은 외조부와 외조모에게 바짝 안겨 들었고, 이엘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카리의 곁에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러나 기적 같은 평온함이었다.

* * *

그날 저녁, 자작가의 식탁에는 온갖 음식들이 바리바리 올라왔다.

딸아이와 사위, 그리고 손자 손녀에게 어떻게든 맛있는 것들을 먹이 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것도 드셔보세요, 공작님.”

자작 부인이 자카리 앞에, 달콤하게 졸인 과일소스를 위에 끼얹고, 배 속은 온갖 견과류로 채운 닭 요리를 밀어 주었다.

흐뭇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 앞에 서, 자카리는 차마 ‘너무 배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카리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자카리는 전투적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이엘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엄마, 자카리의 위장은 한정적 이라고요. 그걸 어떻게 다 먹어요?”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한참 성장기 잖니.”

“성장기라니, 엄마. 자카리는 이미 두 아이의 아빠예요.”

그런가. 자작 부인은 약간 머쓱한 얼굴을 했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다. 자카리와 이엘리는 결혼 생활을 오래 한 부부고, 심지어는 아이 까지 두 명이나 둔 사이라는 것까지 도.

하지만 부모 된 입장에서 자카리와 이엘리, 두 사람 모두 한없이 어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앗, 내 푸딩! 치사하게 오빠만 다 먹어!?”

“늦게 먹는 네 잘못이지.”

그 옆에서 아이들은 캐러멜 푸딩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도끼눈을 뜨던 이엘리는 간신히 잔소리를 밀어 넣었다.

평소라면 엄격하게 식탁 예절을 가르칠 이엘리였지만, 가끔은 편하게 식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리안나는 외할아버지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할아버지, 오빠가 푸딩을 다 먹었어요!”

"원래 이런 건 일찍 먹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거거든?”

씩씩거리는 리안나 앞에서, 프란츠 가 여유롭게 마지막 남은 푸딩 한 조각을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사실 이번 싸움의 승패는 무승부였다.

비록 리안나는 푸딩을 모조리 빼앗기긴 했지만, 그 전에 프란츠 몫의 생크림 케이크 위를 장식한 딸기를 슬쩍했기 때문이었다.

“더 있으니 싸우지 말려무나.”

성난 새끼 고양이처럼 서로에게 아르릉거리는 두 꼬마를 자작이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리안나 몫으로 푸딩을 더 갖다 달라고 하마. 프란츠도 케이크를 더 먹겠니?”

리안나가 환호를 내질렀고, 프란츠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는 점차 난장판이 되어 가는 식탁을 피곤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온기 어린 눈으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엘리는 그만 픽 웃어 버렸다.

‘그래, 너만 행복하면 됐지 뭐.’

언제나 주변을 겉돌고 있던 자카리가 드디어, 이 풍경의 일부가 되어 녹아든 느낌이었다.

* * *

자작가의 식탁이 너무 풍성했기에, 과식을 하게 된 가족들을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결심했다.

자카리 또한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만만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한텐 휴가라고 하더니, 너는 일이 산더미네.”

이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가에서부터 싸들고 온 서류들을 확인하던 그가 빙긋 웃었다.

“난 네가 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괜찮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쉬려면 같이 쉬어야지.”

이엘리는 자카리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서류들을 넘겨보는 그 모습이 익숙했다.

"도와줄까?”

“아냐, 괜찮아.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프란츠랑 리안나를 맡기기엔 죄송스러우니까.”

하긴, 애들이 좀 망아지 같기는 하지.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카리가 다정하게 말했다.

“가서 아이들과 함께 한 바퀴 돌고 와. 난 신경 쓰지 말고.”

“……일은 적당히 해, 몸 상하지 않게. 알았지?”

이엘리는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몸을 일으켰다.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 똑똑 노 크 소리가 들리더니, 두 아이가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자카리는 의아한 낯이 됐다.

“아빠, 나중에는 저희랑 꼭 같이 산책해 주셔야 해요. 알았죠?”

리안나가 또랑또랑하게 말했고, 프란츠가 뒷말을 덧붙였다.

“너무 무리하시지는 말고요.”

“……그래.”

행복이란 게 이런 걸까. 아이들을 데려가는 이엘리의 뒷모습을 보며, 자카리는 문득 생각했다.

* * *

잘 정돈된 정원은 그녀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이엘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문득 과거가 떠올랐다. 과거 자카리와 이별했을 때, 붉은 장미가 가득 피어있은 정원에서 어머니의 품에 울며 안겼던 기억.

그 모든 순간은 아주 먼 과거 같았다. 나쁜 악몽,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여기는 벌써 아샤꽃이 다 폈네 요.”

이엘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북부에서는 아샤꽃이 피지 않았지만, 남부에서는 꽃이 만 발해 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꽃잎들이 새하얗게 흩날렸다. 그 아래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논다. 그 모습을 지 켜보던 이엘리의 미소가 조금 더 짙 어졌다.

'올해도 아샤 죽제를 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