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196)

18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자카리는 문득, 제 아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두 녀석이 이렇게 서로를 감쌌던 적이 있었나?’

그렇지 않아도 프란츠가 리안나를 피하는 것 같아 걱정했었는데, 그 걱정은 잠시 접어 두어도 될 것 같다.

새끼 고양이처럼 아르릉거리던 두 꼬마를 생각하던 자카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 * *

두 남매는 자카리의 서재에서 물러 나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프란츠가 제 여동생을 응시했다.

“너, 설마 네가 다 뒤집어쓰려고 한 거야?”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리안나가 문득 프란츠를 마주보았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있었던 일들은 사실 리안나에게도 굉장히 의외였다.

프란츠가 그녀에게 토라져 있는 걸 뻔히 아는데, 프란츠가 제 입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이야. 묘한 얼굴이 된 리안나가 프란츠에게 되물었다.

“오빠야말로 아까 전에 왜, 솔직하게 말했어?”

“뭘 그런 걸 물어봐?”

프란츠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양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팔짱을 낀 채로 리안나에게 말했다.

“그럼 거기서 어떻게 너 혼자 혼나는 모습을 보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거든?”

정말? 당신도 양심이란 게 있는 사람이었어? 그런 의미를 담아 리안나는 프란츠를 빤히 바라봐 주었고, 프란츠는 험상궂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어색함이 내려앉았다. 두 남매는 서로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리안나는 곁눈질로 프란츠의 단정 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프란츠 오빠.’

아버지를 꼭 닮아 조각 같은 얼굴, 긴 속눈썹 그늘 아래에 감춰진 짙은 푸른색 눈동자. 요 근래 언제나 리안나를 외면하던 그 얼굴은, 지금만 큼은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기뻐.’

아까 전, 프란츠가 리안나를 모른 척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빠가 솔직하게 말해 줄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리안나는 지금 사실 조금은 얼떨떨한 상태였다.

“……솔직히, 내가 잘못한 거 맞으니까.”

그때 프란츠가 낮게 속삭였다. 리안나는 제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 번 프란츠에게 질문했다.

"응? 뭐라고?”

“내가 유치했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를 보는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네 말이 맞아, 아버지께서 네게 주신 물건인데.”

“……오빠.”

“나, 너한테 결국 화풀이를 한 거야.”

그렇게 말하는 프란츠의 얼굴은 바 람 없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도 어머니의 물건을 갖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네게만 주신 게 질투가 나서.”

자신의 솔직한 진심을 고백하는 프란츠라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오빠가 자신에게 저런 내밀한 진심을 내보일 거라고는, 리안나는 단 한 번도 기대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냥 내가 어린애처럼 행동한 거 지.”

프란츠가 흘끗 리안나를 돌아보았다. 차분한 푸른색 눈동자가 리안나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화를 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잠깐 머뭇거리던 프란츠가 말을 골랐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숙여 여동생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너보다 세 살이나 많은데, 오빠답지 못하게 행동했어.”

그렇게 말을 잇는 프란츠의 얼굴은 조금은 괴로워 보였으나, 동시에 굉장히 홀가분해 보였다.

“이번 일은 내가 잘못한 게 맞아.”

“……”     

“미안해, 리안나.”

리안나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프란츠의 사과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서 더 그랬다.

"그럼 나 안 미워하는 거야?”

“널 내가 왜 미워해?”

기가 막힌 프란츠가 여동생에게 되물었다.

처음부터 리안나를 미워한다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다.

다만 리안나가 자신보다 좀 더 특별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그게 괜 히 얄미웠을 뿐이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넌 하나 뿐인 내 동생인걸.”

“지, 진짜?”

“진짜로.”

그러자, 리안나의 푸른 눈동자가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사과처럼 발그레한 양 뺨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리자, 프란츠는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내가 뭔가 기분 나쁜 말이라도 한 건가?!

“리, 리안나! 도대체 왜 우는 거야?!”

화들짝 놀란 프란츠가 몸을 굽혀 리안나와 시선을 맞췄다. 프란츠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했어?”

“아냐, 그런 거.”

작게 훌쩍거리던 리안나가 말을 이었다. 젖은 눈동자로 프란츠를 바라 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그냥, 기뻐서……”

그 눈동자를 바라보던 프란츠는 문득 뭉클한 기분을 느꼈다.

단 하나뿐인 여동생, 소중한 아이. 리안나에게 너무 유치하게 굴었다. 손을 뻗었다. 한참 조그마한 여동생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어색한 손길로 리안나의 등을 토닥여 주자, 리안나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런 그녀를 말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츠가 심술궂게 입술을 열었다.

“바보야,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대.”

“그, 그러면 계속 울라고?”

한껏 흐느끼는 와중에도 리안나는 새초롬한 얼굴이 되었다.

프란츠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네 마음대로 해.”

여동생의 어리둥절한 눈동자가 프란츠를 빤히 바라보자, 프란츠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엉덩이에 털이 나면 내가 뽑아주지 뭐.”

"오빠아!”

리안나가 왈칵 언성을 높였고, 소리 내어 웃은 프란츠가 리안나를 다 시 한 번 끌어안았다.

어린 오빠의 품에 고개를 기대던 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프란츠의 등에 제 손을 얹자, 리안나를 끌어안은 프란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리안나는 가쁘게 오르는 숨을 되삼 켰다.

‘따뜻해.’

그에게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따스 하다.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며칠 후. 햇살이 환하게 내리쬐는 오후, 리안나의 방에 방문한 프란츠 가 대뜸 그녀를 불렀다.

“야, 못난이.”

“왜 불러, 이 불평쟁이야?”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여동생을 보며 프란츠가 피식 웃었다.

예전이라면 그런 리안나가 얄미워 서 죽을 것 같았을 텐데, 지금의 리안나는 그냥 귀엽기만 하다. 하긴 고작 일곱 살이지 않나.

“선물이 있어.”

“선물?”

리안나가 그를 향해 어리둥절한 눈 빛을 보냈다.

프란츠가 등 뒤에 숨겼던 손을 쑥 내밀었다.

“쨘!”

“와아!”

리안나의 입술에서 탄성이 터져 나 왔다.

말끔하게 수리된 에메랄드 목걸이가 보석함 안에 얌전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반짝거리는 여동생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프란츠가 당당히 말했다.

“아버지께서 수리해 주셨어.”

마치 자신이 수리한 것처럼 콧대 높은 태도였음에도, 그저 행복한 리안나는 프란츠의 그런 뻔뻔함을 눈치채지 조차 못했다.

목걸이를 집어 든 프란츠가 리안나를 손짓해 제 쪽으로 불렀다.

"자, 내가 걸어 줄게.”

“응, 응!”

리안나가 냉큼 뒤돌아섰다. 고사리 손으로 목걸이의 고리를 채워 준 프란츠가 입술을 열었다.

“뒤돌아봐.”

빙글 뒤돌아서는 리안나의 목에 걸린 에메랄드 목걸이가 햇빛을 머금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뭐, 잘 어울리네.”

“진짜?”

“내가 뭐 하러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냐?”

프란츠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리안나는 쪼르르 거울 앞으로 달려 가 목걸이를 요모조모 보았다.

그때, 프란츠가 마치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해 주는 양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린다.

“아 참, 그건 그렇고.”

“응?”

“내가 엄청난 소식을 들었거든.”

도대체 뭐가 그렇게 엄청나기에 저러지? 제 목에서 찰랑거리는 목걸이를 홀린 양 바라보던 리안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빙그레 웃은 프란츠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오늘 주방에서 라즈베리 파이를 구웠다는데.”

라즈베리 파이라고? 순간 리안나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라즈베리 파이는 리안나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던 것이다.

턱짓으로 방 바깥을 가리키며, 프란츠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같이 먹으러 갈래?”

“갈래!”

리안나가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매는 마치 다람쥐처럼 날 랜 동작으로 주방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카리는, 옅은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 * *

마침내 다사다난했던 일주일이 모두 흐르고,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최고 권력자인 안주인 마님이 공작성 에 귀환하는 날이 되었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모두 안주인 마님을 마중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였다.

맨 앞에는 공작과 두 아이가 서 있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헤센바이츠의 문장을 단 마차가 달려왔다. 자카리는 환한 얼굴로 마차 앞에 서서 이엘리를 에스코트했다.

“수고했어, 이엔.”

“고마워. 다들 별일 없었어?”

이엘리가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카리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엘리가 자리를 비운 일주일 동 안, 두 꼬마는 파이 대 전쟁을 벌였 고 목걸이 하나를 끊어 먹었다.

이 사건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자카리는, 문득 미소 지었다. 어쨌든 모두 잘 끝난 일이지 않나.

“엄마!”

“엄마아!”

그때, 구르듯 달려온 프란츠와 리안나가 곧장 어머니의 품에 파고들었다.

허리를 숙여 두 아이를 끌어안으며 이엘리는 살짝 웃었다.

리안나는 이엘리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칭얼거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보고 싶었어요!”

“저, 저도요!”

평소 점잔을 빼는 프란츠마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녀가 자리를 오래 비우긴 비운 것 같다.

이엘리는 아이들의 손을 한쪽씩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상냥하게 질문을 한다.

“다들 얌전히 있었어? 아빠 속 썩 이지는 않았고?”

그 말에, 아이들은 순간 바짝 얼어 버렸다.

어라? 의아해진 이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로를 마주보던 아이들이 구원요청을 하듯이 아버지를 바라본다.

자카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 이엔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

그 말에 눈치 빠른 이엘리는 약간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자카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엘리는 아이들을 들여 보낸 후, 자카리와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볼 것을 다짐했다.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리안나가 말했다.

“엄마, 이번 제 생일에는 밤으로 만든 크림을 올린 케이크를 먹고 싶어요!”

“마롱 케이크 말이니? 주방장에게 미리 말해 둬야겠구나.”

이엘리가 흔쾌히 대답하자, 리안나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자카리는 환하게 웃는 가족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낙엽들이 화려하게 흩날리는 오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이런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기를. 그는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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