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196)

15화

“요새 도련님께서 훈련에 열과 성을 다하십니다.”

“그래?”

“예. 아침 훈련도 모두 끝내셨는데, 저녁 훈련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셨 습니다.”

고마워, 포프 경! 프란츠가 포프 경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포프 경이 씩 웃어 보였고, 자카리는 잠시 망설였다. 과연 제 아들에 게도, 딸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한 접촉을 해도 멋쩍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엄격함을 반성하고, 아이 들을 좀 더 사랑하고 아껴 주기로 결심하지 않았나.

그와 동시에 자카리의 손이 아들의 머리를 도닥거렸다. 깜짝 놀란 프란츠가 그대로 얼어붙있다.

“고생하는구나, 프란츠.”

“아, 아버지?”

“그러나 훈련을 너무 무리하게 하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평소 엄격하기만 했던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프란츠는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과한 훈련은 독이 될 뿐이야.”

“그, 하지만……”

“몸이 축날지도 모르니,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자꾸나.”

평소의 자카리답지 않은 다정한 말과 행동에, 프란츠는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그런 시선을 바라보며 자카리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더욱 상냥하게 제안했다.

“그보다,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지 않겠느냐?”

“……”     

프란츠는 도무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그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먼저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 하다니.

그의 침묵에, 자카리는 약간 민망 해졌는지 조심스럽게 덧붙여 물었다.

“싫으니?”

“아, 아니요!”

파드득 놀란 프란츠가 고개를 젓 자, 자카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안도의 미소였다.

“그럼 가자꾸나.”

그의 말에 프란츠는 얼떨떨한 낯으로 목검을 정리하러 떠났다. 그 틈을 타, 자카리가 말했다.

“포프 경, 언제나 프란츠를 가르쳐 주느라 수고하네.”

“아닙니다.”

“그…… 프란츠는 요새 어떤가?”

그 물음을 듣자, 포프 경의 눈동자에 희미한 이채가 서렸다. 그 목소리는 아들을 귀애하고 아끼는 아버지의 목소리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리고 포프 경은 프란츠가 얼마나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양심의 가책을 누르고 프란츠를 포장해 주었다.

“훈련에 있어서는 꽤 충실하십니다.”

놀랍게도 이건 사실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자카리의 품에 안긴 리안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프란츠는 소공작인 자신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기에, 모든 훈련에 진지하게 임했으니까.

그 대화를 듣던 리안나는 양심이 찔려 오는 것을 느꼈다.

‘하긴, 오빠가 훈런에 제대로 집중 하지 못할 때는 모두, 나와 연관이 있을 때뿐인가.’

정확히는 리안나와의 말다툼으로 인해, 부모님에 관련하여 마음이 어지러워졌을 때 뿐이었다.

“평소에도 훈련 자체는 훌륭하게 소화하시는 분입니다.”

“그래? 그것참 기쁜 일이군.”

하지만 리안나의 불편한 마음과는 다르게 자카리와 포프 경은 내내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포프 경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아버지의 눈빛이 된 자카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잽싸게 목검을 정리한 프란츠가 부랴부랴 아버지 곁으로 달려왔다.

“그럼 좋은 저녁 되십시오, 공작 각하.”

“그래, 경도.”

포프 경이 자카리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이후 프란츠와 리안나를 바라본다.

“소공작님과 공녀께서도 좋은 저녁 되십시오.”

“고마워, 경.”

“경도 저녁 식사 꼭 챙기세요.”

올망졸망한 꼬마들이 나란히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며, 포프 경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노을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한 손으로는 리안나를 품에 받쳐 안은 채, 반대편 손으로는 프란

츠의 손을 잡은 자카리.

세 가족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포프 경이 생각했다.

‘어권지 공작 각하의 분위기가 좀 변하신 것 같은데.’

예전에는 어딘가 가파른 절벽에 떠 밀려 있는 양 위태로운 분위기가 있었다면, 지금은 훨씬 더 분위기가 유해졌다.

그러고 보니 공작저의 분위기도 예전과는 다르게 좀 더 온화해졌지 않나.

‘역시 가족이 생기셔서 그런 건가……”

포프 경은 슬며시 뺨을 긁적였다. 아름답고 상냥한 공작가의 안주인, 이엘리.

안주인 마님께서 낳으신 두 명의 아이들. 확실히 깨진 얼음 파편처럼 날카롭던 자카리의 모습은 사라졌다.

‘……뭐, 좋으신 일이지. 이제야 사람 사는 온기가 좀 도는 것 같아.’

이번에 벌어졌던 파이 대 전쟁을 떠올리던 포프 경은 피식 웃었다. 커스터드 크림 범벅이 되어 서로에게 씩씩거리던 두 꼬마를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아, 나도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저 가족들을 보니 어쩐지 심장 한 구석이 휑한 게, 이제 그도 참한 아가씨를 만나 가정을 꾸릴 때가 된 것 같다.

포프 경은 기사단원들에게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할 것을 다짐했다.

* * *

저녁 식사 자리에 서도 자카리는 여전히 상냥했다. 비록 평소의 무뚝뚝함을 완전히 떨쳐 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잘못된 점을 알고 고치려 노력하는 그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설마 리안나 때문에 아버지께서 다정해지신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프란츠는 힐끔 리안나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막 소금통을 집기 위해, 리안나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프란츠는 미간을 좁히며 소금 통을 밀어 주었다.

리안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오빠가 웬일? 딱 그렇게 생각하는 게 눈에 보여, 프란츠는 눈을 부라렸다.

‘뭐, 내가 알 게 뭐야.’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깃털로 문지르는 양 간지러워, 프란츠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그 날 이후로도 두 남매의 긴 휴 전 상태는 지속되었다. 두 남매는 서로를 한껏 의식하면서도 애써 의식하지 않는 척을 했다.

오늘만 해도 프란츠는 리안나를 외면하며 휑하니 지나가 버렸다. 소파에 널브러진 채, 프란츠가 훈련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리안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정말, 언제까지 저렇게 화를 내고 있을 건지.”

오늘쯤은 ‘훈런 열심히 하네’ 정도의 말을 걸어 볼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찬바람이 쌩쌩 불면 도무지 말을 붙일 수가 없잖아.

하지만 요새의 아버지는 꽤나 상냥해지셨고, 그 덕에 공작가의 분위기가 예전보다 훨씬 더 평화로워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평화로움에 젖어 들었고, 그녀도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프란츠와도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 히 생각했다.

‘모두 착각이었지만.’

하아, 리안나는 기나긴 한숨을 내 쉬었다.

현재, 그녀 앞에는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리안나는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됐는 지, 그 과정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 * *

평온한 오후였다. 오전 내내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던 자카리는 딸을 조용히 제 방에 불렀다.

“리안나, 잠시 이리와 보겠니?”

“네? 무슨 일이세요?”

리안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카리의 곁에 총총 다가갔다.

자카리는 조그마한 목걸이를 손에 든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안나의 동공이 격하게 진동했다.

‘아니, 잠깐만. 저 물건…… 내가 아는 물건 같은데?’

섬세하게 세공하여 짙은 녹색 에메랄드로 장식한 금목걸이는 리안나가 모를 리 없는 물건이었다.

왜냐하면 저 물건은 이엘리가 평소 소중하게 다루며 사용하던 목걸이였 기 때문이었다.

‘아마 부모님의 세 번째 결혼기념일 때 물건이었지?’

결혼기념일을 맞이한 자카리는 제 아내에게 최고의 선물을 해 주려고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내의 눈동자 색을 닮은 최고급 에메랄드를 구하기 위해, 경매에 참여하는 수고를 들였다.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세공사를 수배해 만든 에메랄드 목걸이는 가격 또한 엄청나다고했다.

'그런데 이 물건이 왜 지금 여기에?’

리안나는 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카리를 마주보았다. 자카리는 리안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네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네게 주려고 한다.”

“……네에?!”

자카리의 여상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기겁한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빠. 제가 받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

“괜찮다, 이제 곧 네 생일이지 않니. 이엔과는 모두 이야기가 끝난 일이야.”

하지만 자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손안에서 에메랄드 목걸이 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네가 평소에 이 목걸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더구나.”

그건 사실이긴 하지만. 리안나는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평소 어머니께서 저 목걸이를 착용하실 때마다, 홀린 것처럼 쳐다보고 있기는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네가 좀 더 크면 물려줄게’라며 달래 주셨는데, 이 물건이 여기서 턱 튀어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다.

“생일 파티는 이엘리가 함께 돌아와서 할 테지만, 선물은 조금 일찍 주고 싶었단다.”

사실은 계속 무뚝뚝하게 굴었던 자신의 행동이 양심에 찔렸기에, 이제 라도 좋은 아빠 노릇을 하고 싶은 자카리의 마음이었다.

자카리의 따스한 손이 리안나의 정 수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예쁘게 걸고 다녔으면 좋겠구나.”

예전에는 그저 아이들을 낳느라 이엘리가 많이 힘겨워했던 것만이 안타까웠다. 프란츠와 리안나, 두 아이 모두 쉽게 낳은 편이었음에도 그의 마음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 딸아이가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것이 신경 쓰였다.

일곱 살. 한창 부모님 품 아래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야 할 나이이지 않나.

깜짝 놀란 딸아이를 바라보며, 자카리는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냈다.

‘이런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다니…… 나도 참 어리석군.’

이래서야 아버지와 내가 다를 바도 없다. 자카리는 한숨을 삼켰다.

조금만 생각을 깊이했다면 알 수 있었을 일인데, 사려 깊지 못했다.

그는 손을 뻗어 딸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자카리는 이엘리의 목걸이를 건 리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걸이는 성인용이었고, 어린 딸은 아직 조그마한 아이였기에 목걸이는 다소 헐거웠다.

자카리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난 네가 이대로 쑥쑥 자라서……”

자카리가 리안나를 바라보는 눈빛 은 따스하기만했다. 그 눈빛에 리안나는 약간 울컥해졌다.

“그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레이디 가 된 모습을 기대하고 있단다.”

“….아빠.”

“이엔도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아마 리안나가 저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레이디로 성장한다면, 가장 기뻐할 사람은 아마 이엘리이지 않을까.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를 생각하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던 자카리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딸을 앞에 둔 채, 혼자서 너무 감상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서 조금 머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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