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화
“그, 아빠 서재의 꽃병에 꽂아 놓으면 예쁠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카리는 과거의 편린을 떠올렸다.
아직 선대 공작이 살아 있던 시절, 이엘리는 언제나 정원의 꽃을 손수 꺾어 선대 공작과 자카리의 방을 장 식해 주곤했다.
자카리를 돌아보며 화사하게 미소 짓는 아내와, 무표정한 눈동자에 희 미한 온기가 스치던 아버지.
“지금까지 계속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니?”
“네, 그랬어요!”
아버지의 물음에 리안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아버지를 기다린 건 아니었고, 프란츠와의 일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느라 그런 거였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지 않나.
“앞으로는 그러지 말거라.”
그 말에 리안나는 약간 기가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건가?
그런데 그때, 자카리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제 가을이고, 계속 날씨가 차가워질 테니까.”
“…..네?”
“그리고 오늘처럼 일찍 귀가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말이다.”
아버지가 흘끗 리안나를 내려다보았다.
리안나를 응시하는 아버지의 눈빛 은 드물게 따스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어, 네, 네?”
“몸이 상하면 안 되니, 앞으로는 나와 있지 말거라.”
지금 내 귀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가? 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다정 하게 말씀하신다고?
실례란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선 리안나가 멍 하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그렇다면.’
이제는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을 바꾸어도 되지 않을까. ‘아빠’라고 부르게 된다면, 아버지께서 많이 불편 해하시려나?
리안나는 힐끔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평생 ‘아빠’라고 부를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두 눈을 꼭 감은 리안나가, 모기만 한 소리로 자카리를 불렀다.
“아, 아빠.”
“……”
순간 자카리는 물결처럼 밀려오는 감동을 느꼈다.
처음으로 들어 본 ‘아빠’라는 호칭이었다. 수줍어하면서도 또박또박 ‘아빠’라고 부르는 조그만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딸을 두고 자신은 어떻게 행동했었는지를 떠올리자, 자카리는 희미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전에도 딸아이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휑하니 식당을 빠져나갔을 뿐이지 않나.
“리안나.”
두어 걸음 앞서 걷던 자카리는 걸 음을 늦추었다. 그대로 리안나를 슬쩍 돌아본다.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인 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자카리를 쳐다보았다. 자카리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이리 오렴,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네!”
자카리는 어린 딸을 향해 손짓을 해 보였다. 활짝 웃은 리안나가 아버지를 향해 힘껏 달려갔다.
* * *
프란츠는 저택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 주저앉은 채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짙푸른 눈동자는 막 들어온 아버지와 리안나, 두 사람에게 꽂힌 채였다. 프란츠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리안나랑 화해하기는 해야 할 텐데.”
하지만 프란츠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모든 잘못을 프란츠에게 뒤집어 씌우려한 건, 아무리 어리다 해 도 잘못하긴 한 것 아닌가.
프란츠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파이를 희생시킨 장렬한 전투 이후, 두 남매는 서로 말조차 제대로 섞지 않고 있었다.
프란츠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됐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프란츠가 몸을 일으켰다. 홱 뒤돌아서는 소년의 뒷모습에서 냉기가 흘렀다.
* * *
리안나와 자카리의 관계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자카리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훨씬 부드러워졌고, 리안나는 그런 아버지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리안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더욱 자주 웃어 주었고, 공작저의 분위기는 점차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그 분위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소년은 바로 프란츠였다.
리안나와 다르게, 프란츠는 상대적으로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가문을 물려받을 부담감 때문일지도 몰랐
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 까?’
생각에 골몰한 채, 프란츠는 목검을 휭휭 휘둘렀다. 자세를 봐주던 포프 경이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 자세가 무너지셨습니다.”
“아, 미안.”
프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숫제 자세까지 풀어 버리자, 포프 경이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작은 아가씨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 아니거든!”
“……맞으시군요.”
프란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포프 경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 봐야, 프란츠는 고작 열 살짜리 꼬마였다. 성인이 포프 경이 속내를 들여다보 기에 그리 어려운 대상이 아니다.
잠시 후, 힐끔 도련님의 눈치를 살 피던 포프 경이 씩 웃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검 휘두르기 50번 더 남았습니다.”
“그래, 알고 있어.”
할 테니까 걱정 마. 입 안으로 작게 투덜거린 프란츠가 목검을 고쳐 들었다.
근래 두 남매는 말조차 섞지 않고 있었다.
사실 사용인들에게도 이번 다툼은 다소 놀라운 일이긴 했다.
두 남매는 항상 다투었지만, 보통은 프란츠가 숙이고 들어갔기에 길어 봤자 하루를 넘기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벌써 두 사람이 싸운 지도 삼 일이 훌쩍 넘은 상황이었다.
“뭐, 도련님 마음도 이해를 못해드릴 건 아니지요.”
“그, 그렇지?”
포프 경의 은근한 목소리에 프란츠가 반짝 고개를 들어을렸다.
포프 경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냥 사과하시는 게 어떻 겠습니까?”
“그건 싫어.”
프란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에휴, 어린아이들의 치기란.
포프 경은 딱 그런 표정을 지었고, 프란츠는 포프 경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포프 경은 제 어깨만을 으쓱거려 보일 뿐이었다.
결국 프란츠가 다시 한 번 목검을 쥐고 자세를 취하는데, 그런데 그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막 자세를 잡던 프란츠가 고개를 홱 돌렸다. 리안나였다.
저 멀리, 기울어 가는 햇빛을 한껏 머금어 반짝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막 퇴궁한 자카리가 리안나의 손을 맞잡았다.
“다녀왔다, 리안나.”
“어서 오세요!”
쪼르르 달려온 리안나가 자카리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안기고 싶은 데, 안겨도 되느냐를 고민하는 눈빛으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자카리가 빙긋 웃으며 양팔을 활짝 벌린다.
“이리 와라.”
“네!”
환하게 웃은 리안나가 자카리의 품에 답삭 안겼다.
자카리는 리안나를 반짝 들어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았다.
프란츠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그래, 아버지께서 리안나를 예뻐 하시면 좋은 일이지.’
하지만. 목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 갔다.
그는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저렇게 먼저 다가가 본 적 없는데, 리안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게 불편했다.
아니, 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자 면.
‘……질투인가.’
프란츠는 세 살 어린 여동생에게 이따위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환멸감을 느끼고 말았다.
* * *
자카리의 품에 안긴 채, 리안나는 힐끔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붉은 노을을 등진 채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프란츠.
그의 얼굴은 정말로 상처받은 것만 같아서, 리안나는 내심 아차 싶었다.
“아빠, 오빠가 훈련하고 있어요.”
그리하여 리안나는 자카리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자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간에? 벌써 끝났어야 하지 않느냐.”
“아…… 그게.”
리안나는 난처한 얼굴이 되어 눈동자만을 굴렸다. 아버지의 관심을 프란츠에게 약간이나마 돌릴 생각이었는데, 이쩐지 쓸데없는 의심만을 사 게 된 것 같다.
리안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안 돼, 이리다간 아버지께서 프란츠가 왜 지금 훈련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실 것 같아!
‘왜냐하면 오빠는 훈련을 하루 종일 미루다가 지금 시작한 거란 말이야!’
리안나는 잘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사실 리안나 못지않게 프란츠도 마음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포프 경에게 양해를 구하고 훈련을 뒤로 미룬 상태였던 것이다.
한편,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프란츠의 훈련 시간은 오전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실 줄 몰랐네……”
리안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약간 감동하고 말았다. 아, 안 돼. 지금 딴생각할 때가 아닌데!
“오빠가 요새 훈련에 관심이 많아 져서요.”
에라, 모르겠다. 리안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거짓을 듬뿍 부어 프란츠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녁에도 훈련을 하고 있나 봐요.”
“아, 그래?”
자카리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보며, 리안나는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이제 프란츠는 리안나를 무시무시 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리안나가 말했다.
“아빠.”
“응?”
“저, 무겁지 않으세요?”
리안나가 방긋방긋 웃으며 묻자, 자카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 딸아이가 안쓰러워서였다.
‘내가 평소에 얼마나 엄격하게 굴었으면……’
고작 아버지가 딸아이를 안아 드는 것에도 이런 식으로 눈치를 보는 건 가. 그러고 보면 자카리는 리안나를 이렇게 안아 준 적 없었을뿐더러, 딸아이도 그에게 어리광을 부린 적
이 없었다.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내려 주셔도 돼요.”
리안나가 얌전하게 말했다. 그러자 자카리는 리안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웃어 보였다.
“괜찮아.”
“네?”
“내가 널 안고 걷고 싶은 거란다.”
리안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밀어 올린 채,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등에 꽂히는 프란츠의 시선이 화살 같다.
아니, 아빠. 다정한 건 좋은데요, 지금 오빠가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 이예요!
“프란츠.”
하지만 이럽 때만큼은 눈치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자카리는, 리안나를 안아 올린 채 프란츠에게로 다가섰다.
리안나는 그냥 프란츠를 마주보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녀는 슬그머니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은 채 몸을 돌렸다. 한참 리안나를 노려보던 프란츠가 자카리를 응시했다.
“예, 아버지.”
자카리는 흐뭇하게 웃었고, 프란츠는 그런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언제나 엄격했던 아버지가 저런 식으로 먼저 환하게 미소를 지어 준 건.
아버지는 다정하게 말했다.
“리안나가 말하기를, 요새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예? 예……”
그 말에 프란츠와 포프경은 동시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차마 오늘도 훈련을 저녁때로 미룬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었기에, 프란츠는 입술만을 꾹 다물었다.
다행스럽게도 포프경도 이번에는 눈치를 발휘하여, 프란츠가 훈련을 미루고 있었다는 것을 감추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