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196)

13화

그리하여 그는 해서는 안 될 말을 외치고 말았다. 잠들기 전에 수없이 이불을 차게 될 그 말.

“나다운게 뭔데 네가 그딴 소리를 해?!”

“……”    

“……”    

리안나는 멍하니 프란츠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친애하는 오라버니에게 '나 다운 게 뭔데!’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무슨 흔해 빠진 양산형 로맨스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말을…….

저런 말, 창피해서라도 안 하지 않아? 리안나가 말을 더듬으면서 되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   

“그런 말 하는 거, 창피하지도 않아?”

“조, 조용히 해!”

그렇게 외친 프란츠가 이번에는 그녀의 입에 파이를 밀어 넣었다. 흰 얼굴이 온통 새빨갛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푸우, 아, 오빠!”

리안나도 발끈해 버렸다. 그리하여 파이가 허공을 가로지르고, 포크를 검으로 삼으며, 접시를 방패로 삼는 남매간의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격화된 전투에 기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사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차라리 마수와 일대일로 싸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저기…… 두 분?”

“왜요!”

“왜 불러!”

파이를 무기로하여 생사를 다투던 두 꼬마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 사를 돌아보았다.

기사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해야 하지 않나 기사가 긴 한숨을 쉬었다.

“당장 가셔서 씻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     

“……”    

그제야 리안나와 프란츠는 자신들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온통 레몬 커스터드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온몸이 끈적거리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옷은 물론이고 머리카락까지 커스터드 크림으로 엉망이었다.

결국 두 꼬마는 잠재적 휴전을 선 언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야했다.

  * * *

리안나는 메리의 손에 이끌려 욕조 로 끌려 들어갔다. 크림 때문에 온몸이 미끈거렸다.

결 고운 머리카락은 크림 때문에 하나의 덩어리로 굳어져 버려서, 세번이나 감고 나서야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메리는 리안나의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행구다가 혀를 쯧쯧 찼다.

“어쩌다가 도련님과 그렇게 싸우셨어요?”

“아니, 오빠가 헛소리를 하잖아!”

리안나는 반사적으로 발끈하고 말았다. 리안나는 욕조에 받아 둔 물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엄마가 나보다 오빠를 더 좋아한 다니, 말이 돼?”

아하하, 메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일원 들은 모두, 안주인 마님을 좋아하게 되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게 아닐 까.

멀게는 선대 공작님부터 현재 가주님께서도 안주인 마님을 사랑하다 못해 안달이 나셨고, 두 남매 또한 엄마 바라기이니 말이다.

“아마 안주인 마님께서는 두 분을 공평하게 사랑하실 거예요.”

“공평하게는 안 돼, 날 더 좋아해 야 한다고!”

리안나는 숫제 주먹까지 휘두르며 외쳤다. 이렇게 흥분한 상태의 공녀님은, 안주인 마님이 오시지 못하면 휘어잡지 못한다.

‘마님,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 * *

메리는 그만 안주인 마님이 사무치 게 그리워지고 말았다.

리안나는 메리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웠다. 보드라운 잠옷으로 갈아 입고, 이불은 목 끝까지 올려 덮은 채였다.

메리는 침대 옆에 주저앉아 리안나의 가슴께를 손으로 토닥여 주었다.

“어쨌거나 이번 일은 제가 주인님께 고할 거예요.”

하지만 그 다정한 목소리와 손짓과는 다르게, 리안나에게 내려지는 선고는 냉정하기만 했다.

“……치사해.”

“포프 경까지 앞에 두고 그 난리를 쳤는데, 주인님 귀에 안 들어가시기를 바라셨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리안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만을 삐죽거렸다.

아,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었는데. 프란츠와 어린아이처럼 파이를 던지며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으실까? 리안나는 막막한 기분이 되어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메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으응……”

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메리가 등불을 꼈다.

탁 소리와 함께 방이 어두워진다. 방문을 열자, 메리의 그림자가 방 안으로 길게 늘어졌다.

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메리.”

“네?”

“오늘 내가…… 너무 어린애처럼 군 건 아닐까?”

그 말에 메리가 문득 리안나를 돌아보았다. 상냥한 유모의 낯에 장난스러운 눈빛이 스쳤다.

“어머나,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처럼 구는 게 어때서요?”

“……하지만.”

리안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리안나가 잠시 후, 결심한 것처럼 물어보았다.

“오빠도 엄청 화난 것 같고, 무엇 보다도 아버지 말야.”

이상하게 아버지는 ‘아빠’보다 ‘아버지’로 부르게 된다. 리안나는 입술을 깨물다 말을 이었다.

“……오늘 일을 들으시고 실망하시면 어떡해?”

“실컷 싸우실 때는 언제고, 이제 슬슬 걱정은 되시나 보네요?”

“그건……”

메리의 장난스러운 대답을 들으며, 리안나가 미간을 좁혔다. 아니, 솔직히 걱정이 안 될 리 없잖아!

그런데 그때, 메리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다정한 어조로 그녀를 안심시켜 준다.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정말?”

“그럼요.”

힘을 주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던 메리가, 다시 돌아와 리안나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고 주무세요, 알았죠?”

“응.”

메리의 확답을 받으니 어쩐지 안심이 됐다. 조그맣게 웃은 리안나가 작게 꼼지락거렸다.

폭신한 베개에 파묻히듯 기대자 잠이 밀려왔다.

잠시 후, 리안나는 꿈도 없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 * *

자카리는 금일 조금 늦게 귀가했다. 기사단 일도 있었고, 행정관과도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으레 하듯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보고를 들었는데, 오늘은 특별한 사안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 소공작님과 공녀님 사이에 그런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정말입니다.”

단정한 표정의 메리를 앞에 두고, 자카리는 황당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리안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언제나 완벽한 소공작으로서 단정한 얼굴을 하던 프란츠가 레몬 파이를 던지면 서까지 싸웠다니.

물론, 프란츠가 여동생 리안나에게 유독 장난기가 넘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예법, 공부, 글, 검술 등에서는 완벽한 아이가 레몬파이를 던지며 싸웠다니.

‘왜 유독 리안나에게만 달라지는 걸까?’

게다가 두 꼬마는 소리까지 꽥꽥 질러 댔다고 했다. 크림 범벅으로 엉망이 되는 바람에 씻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는 대목을 들으면서, 자카리는 제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메리가 이야기하는 프란츠와, 내 아들 프란츠가 동일 인물인 건 맞는 건가?’

이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자카리는 황망한 표정으로 메리를 물렸다.

“그래, 물러가게.”

메리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자카리는 아주 오랜만에 자식들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프란츠와 리안나. 그 두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 아이 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면 바칠 수 있을 정도로.

다만 아버지의 온기를 받아 본 적 없던 자카리였기에, 아버지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역시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무뚝뚝해질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사랑하면 서도 약간은 어려워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이들에게 평소, 너무 무뚝뚝했나.”

아이들에게 자신이 잘못 행동하고 있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두 남매에게 다가가야 할지, 자카리는 방법을 잘 몰랐다.

이마를 짚은 자카리가 긴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에 대한 고민에 빠진 자카리는, 밤이 깊어가는 것조차 알 지 못했다.

* * *

어제의 다툼 이후, 리안나와 프란츠는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먼저 사과할 생각은 없었기에, 휴전 상태는 아마 길게 이어질 것 같다. 리안나는 콧 방귀를 뀌었다.

'뭐, 그러라지.’

프란츠 오빠가 화를 내든 말든 내 가 알게 뭐람?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조금 불편하긴 했다.

장난기가 많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정했던 오빠가 그렇게 정색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래도 먼저 사과하기는 싫은데. 리안나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서 정원으로 향했다.

“코스모스네. 진짜 가을 같다.”

화단 앞에 쪼그려 앉은 리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분홍색과 눈처럼 하얀 색깔이 한 데 어우러져 살랑거렸다. 온화한 가을날이었다.

리안나는 턱을 된 채 흔들리는 꽃송이를 눈에 담았다.

“오빠랑은 어떻게 화해한담.”

리안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사 과하기는 싫은데, 그래도 화해는 하고 싶다.

이럴 때 엄마가 옆에 계셨더라면 좋은 생각을 말씀해 주셨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리안나는 하릴없이 똑똑 꽃송이를 따 모았다.

분홍색 꽃잎이 엄마랑 닮았네,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던 때.

“어라, 아버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리안나가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멀리, 아버지가 복잡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어머니가 메번 리안나에게 해 주던 말이 떠올랐다.

‘살가운 인사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뀌는 법이란다.’

리안나는 어머니의 말만큼은 잘 듣는 착한 어린이였다. 그녀는 냉큼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그렇게 말한 리안나가 자카리의 허리를 답삭 끌어안았다. 아직 키가 작은 일곱 살짜리 딸아이였기에, 그 정도 포옹이 최선이었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리안나가 배시시 웃어 보이자, 두 눈을 휘 둥그렇게 뜬 자카리가 손을 뻗어 조 심스럽게 리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 있었니?”

“네, 보고 싶었어요!”

발랄한 딸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카리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온갖 애정표현을 다 해 주고 싶은데, 역시 아이를 대하는 건 어렵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 쉬었다.

‘사실은 일이 잔뜩 밀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늘 자카리가 일찍 귀가 한 이유는, 어제 리안나와 프란츠가 파이를 던지며 싸웠던 일 때문이었다.

너무 강렬했기에, 오늘은 아이들의 얼굴이라도 볼까 하는 마음에서 였다.

그런데 그때,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어린 딸아이가 허리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이건 선물이예요!”

그렇게 말한 땀아이가 불쑥 제 왼손을 내밀었다. 조그만 손안에는 분 홍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코스모스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에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선물?”

“네!”

리안나는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천진한 척,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눈매를 곱게 휘며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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