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196)

12화

그 말에, 내내 미소를 짓고 있던 프란츠는 정색하고 말았다.

“어차피 엄마는 날 제일 좋아하니까, 내 편을 들어주실걸?”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사람. 이 단어는 헤센바이츠 공작가에서 금기나 다름없는 단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란츠와 리안나 남매뿐 아니라 아버지인 자카리마저도 모두 이엘리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안의 중심이자 최고의 권력자이며 모든 애정의 주인. 이엘리가 이 집안 안에서 가진 위치였다.

“어머니를 귀찮게 굴면 안 돼, 리안나.”

프란츠는 시큰둥하게 말을 뱉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리안나보다 3 살 많은 오빠임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른스럽게 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문제라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리안나가 어머니를 걸고 넘어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프란츠는 어머니의 애정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프란츠, 동생이 생길 거란다.’

‘……왜요?’

이느 날, 어린 프란츠를 앉혀 두고 어머니가 선언했을 때의 그 막막함 은 어떠했던가. 마치 세상이 뒤집어 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왜요? 라고 되물을 때의 어머니의 난처한 웃음이 눈앞에 선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남매는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 그리고 오빠는 여동생을 아껴 줘야 돼’라고 가르쳤고, 프란츠는 그 가르침을 잘 따랐다.

막상 태어난 여동생은 뭐, 솔직히 꽤 귀엽기도 했고.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자신보다 리안나를 더 아낀다는 그 말만큼은 받아들 일 수 없었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예법 교본도 숨겨 놓은 너보다는, 훈련과 공부에 매진하는 날 더 사랑하실 걸?”

얄입게 입을 열자, 리안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프란츠를 바라보았다.

“아니거든? 오빠가 몰라서 그래, 저번에도 엄마가 날 가장 사랑한다고 하셨었어!”

“그건 네가 하도 징징거리니까 그런 거지, 그런 말씀은 나에게도 해 주셨거든!?”

이제 두 남매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고 있었다.

포프 경은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두 꼬마의 싸움에 어찌할 바 몰랐다.

“오빠, 바보 멍청이!”

“유치하게 너 자꾸 이럴 거야!?”

두 꼬마는 쉽사리 언쟁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잔뜩 흥분한 리안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격하게 움직이던 와중 벌어졌다.

리안나의 치맛자락이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리게 되고 만 것이다.

“……”   

“……”   

털썩! 파이 접시가 뒤집어진 채 아래로 떨어졌다.

레몬 커스터드가 탐스럽던 파이는 순식간에 먼지투성이가 되어 짓뭉개졌다.

차가운 침묵이 홀렸다. 세 사람은 모두 얼어붙었다.

잠시 후, 리안나가 더듬대며 프란츠에게 쏘아붙였다.

“이, 이건 모두 오빠 잘못이야!”

“뭐라고?”

기가 막힌 프란츠가 리안나를 노려 보았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리안나는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그러니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 기는 기분이 들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움직이 다가 치마에 걸려서 떨어진 걸, 왜 내 탓으로 돌려?”

“오빠가 날 놀려먹지 않았으면 이렇게 안 됐어!”

리안나가 바락바락 언성을 높였다. 프란츠는 이를 악물었다. 미운 일곱 살이라더니, 왜 저렇게 얄밉게 구는 지 모를 일이다.

‘프란츠, 침착해. 넌 리안나보다 세 살이나 많은 오빠야.’

프란츠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적어도 난 리안나보다 세 살이나 많 으니까, 좀 더 어른답고 침착하게 굴도록 하자, 리안나는 아직 애니까 .......

그렇게 생각하던 프란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니, 어른답고 침착한 게 뭔데? 같이 잘못한 건데, 왜 내가 오빠라 고 다 뒤집어써야만 하는 건데? 애초에 리안나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부모님의 애정도 나눠 갖지 않고……!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순간 프란츠는 심장이 싸늘하게 굳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어머니의 애정 하나를 나눠 갖기 싫다면서 어린 여동생을 두고 못 할 생각을 했다.

프란츠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프란츠는 리안나에게 사과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리안나, 너와 내가 같이 저지른 잘못을 오로지 내 잘못으로 돌리는 건 잘못됐어.”

프란츠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제 입에서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사실 처음 알았다.

리안나는 처음 정색하는 오빠를 보며 두 눈이 휘둥그레 해진 상태였다.

‘오빠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처음 봐.’

다소 짓궂은 면은 있었지만, 기본 적으로 다정하고 상냥한 프란츠였다. 그런 오빠가 날 노려본다고?

“그, 그래도 오빠가 처음부터 날 괴롭히지 않았으면……!”

그럼에도 역시 지고 싶지 않았던 리안나는 프란츠를 향해서 괜히 억 지를 썼다.

프란츠는 싸늘한 낯으로 리안나를 마주보았다. 너무 화가 나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리안나, 지금 네 태도가 정말 잘 못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겠어?”

“오빠가 내 부모님도 아닌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리안나. 계속 날 실망시키지는 말아 줬으면 해.”

리안나는 내심 놀랐다. 보통 프란츠는, 이런 상황일 때면 리안나와 부딪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다 독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프란츠는 달랐다.

리안나는 다정했던 오빠가 이렇게 싸늘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리안나는 지금 억지를 쓰고 있는 것뿐이잖아.”

“프란츠 오빠!”

“이런 억지만큼 유치한 짓이 어디 있어?”

……아, 큰일 났다. 속마음이 주르륵 빠져나와 버렸다.

프란츠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튀어나온 말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착한 척은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프란츠는 냉랭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널 사랑하지만, 이런 문제는 별개야.”

“지금 뭐라고 했어?”

“네게 짓궂게 장난을 쳤던 건 내 잘못이야. 인정해. 하지만 너도 네 잘못을 인정했으면 좋겠어.”

“……오빠,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리안나는 충격을 받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리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가 그러셨어, 오빠는 여동생에게 다정하게 굴어야 한다고!”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지, 여동생 은 오빠를 대할 때 존중의 자세로 대해야 한다고!”

기사는 혼이 나간 얼굴을 했다. 두 꼬마는 이제 서로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도 너처럼 속 편하게 살고 싶다, 정말!”

“오빠가 뭘 그리 힘들다고! 맨날 차기 소공작이라며 거들먹거리기나 하고! 겨우 목검 좀 휘두르고, 책 좀 더 읽을 뿐이잖아!”

“지금 너 말 다 했어!?”

그렇게 고함을 지르며, 프란츠는 자꾸만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차기 소공작으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는 것 자체는 불만 없었다. 하지만 리안나가 ‘겨우 그깟 것 가지고

유세하지 마!’라는 모습을 보이니, 더욱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두 꼬마의 분위기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자, 기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저기. 두 분, 조금만 진정하시 고……”

“포프 경은 끼어들지 말아요!”

“이번 일은 우리 두 사람의 일이야!”

하지만 두 꼬마가 눈에 불을 견 채 기사에게 쏘아붙였다. 그 살벌한 기세에 기가 질렸는지 기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아, 어쩌지. 나 이런 거 잘 못 말리는데. 그런 기색이 역력한 낯이다. 두 꼬마를 번갈아 바라보던 기사는 어떻게든 현 상황을 정리하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역시 두 분,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만……”

모기 같은 음성은 두 꼬마가 내지 르는 고함소리에 반쯤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한참을 꽥꽥거리며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던 두 꼬마는, 잠시 후 쌔근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만하자, 리안나. 이래 봤자 서로 감정싸움밖에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한 프란츠가 벌떡 일어났다. 엄연히 자리를 피하려는 모습에, 리안나가 빈정거렸다.

“지금 나한테 말로 밀리니까 도망 치는 거야?”

지금 내가 도망친다고? 프란츠는 발끈하고 말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여동생을 쏘아보았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외치던 프란츠가 순간 휘청거렸다. 바닥에 떨어진 파이를 힘껏 밟고 미끄러진 것이다.

“으아악!”

콰당! 프란츠가 성대하게 자리에  엎어졌다. 리안나는 멍하니 프란츠를 내려다보았다.

흙먼지와 레몬 커스터드가 잔뜩 묻은 꼴이 온통 엉망이다. 스산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로 내려앉았다.

“……”    

“……”    

리안나는 그만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오빠, 설마 내 탓을 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자기가 먼지 넘어져 놓고, 내게 시비 걸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조심 좀 하지!

온통 커스터드 얼룩이 묻은 옷자락을 내려다보던 프란츠는 잠시 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 진짜……”

리안나는 흠칫했다. 지금껏 오빠에 게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프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지겨워.”

프란츠가 낮게 중얼거렸고, 리안나는 찔끔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넌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거야?”

“응?”

“난 이것저것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말에 리안나도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그건 오빠가 가문을 물려받을 소공작이니까 그렇지, 지금 나한 테 그런 걸로 화를 내는 거야?

리안나는 저도 모르게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오빠가 후계자니까 그렇지!”

“그래, 아는데.”

프란츠는 뭔가 굉장히 지치고 지겨운 얼굴이 되어 리안나를 마주보았다. 아는 것과 받아들여야 하는 건

다르잖아. 프란츠는 그렇게 항변하고 싶었다.

그리고 리안나는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안 돼, 이대로라면 프란츠의 말에 말리고 만다.

말괄량이 리안나는 날래게 파이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진지한 얼굴하고 있지 말고, 차라리 파이나 먹지 그래?”

“풉!”

리안나는 프란츠의 입에 파이를 쑤셔넣었다. 흡사 전광석화 같은 동작에, 기사까지 입을 쩍 벌렸다.

프란츠는 순식간에 입 안에 들어오는 파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입뿐 아니라 콧구멍까지 레몬 커스 터드 크림이 가득 채운다.

프란츠가 양팔을 버둥대며 여동생을 밀어냈다.

“푸우! 이, 이게 무슨 짓……!”

“차라리 까칠하게 빈정거리라고, 오빠답지 않게 그런 얼굴하고 있지 말고.”

리안나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프란츠를 보았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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