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한참 쿠키를 아작거리고 있자니, 리안나의 곁을 지나던 프란츠가 시 비를 걸었다.
“너 혼자 맛있는 거 먹고 있냐, 치사하게?”
“먹고 싶으면 오빠도 메리한테 달라고 하지, 웬 시비?”
“난 너와 다르게 바쁘신 몸이라서.”
프란츠가 으쓱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간편한 차림을 보아하니 아무래 도 검술 훈련을 하러 나가는 것 같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쿠키 접시에 손을 뻗자니, 미간을 좁힌 프란츠가 말했다.
“너 혼자 그렇게 먹으면 돼지 된다.”
“내가 돼지가 되건 말건, 도대체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난 하나뿐인 여동생이 돼지가 되는 모습은 보기 싫거든.”
마치 말만 들으면 나를 엄청나게 아껴 주는 사려 깊은 오라버니 같네. 리안나는 질색을 했다.
“그런데 말이지, 리안나.”
“왜.”
“원래 운동이 끝나면 당분이 필요 하댔어.”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의미를 담아 리안나가 프란츠를 흘겨보자, 프란츠가 씩 웃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파이는 레몬 머랭 파이인 거, 알지?”
“……그래서?”
“네가 오빠에 대해 가진 사랑을 증명할 기회야. 훈련 끝날 때 갖다줘, 알았지?”
“싫어, 내가 왜!”
리안나가 자리에서 팔짝 뛰어올랐다. 프란츠는 능글맞은 얼굴로 리안나를 마주보았다.
“네가 예법 교본을 어디에 숨겨 놨는지 아는데도?”
저런 치사한 인간이 다 있나! 리안나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어 올랐다.
삼 일 전, 리안나를 가르치는 안느 부인이 예법 교본을 남겨 주면서 다음 수업을 할 때까지 연습하라고 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너무 나도 귀찮았던 리안나는, 예법 교본을 숨겨 두고 ‘잃어버렸다’라고 발뺌할 생각이었다.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았지?
프란츠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그 교본은 아마도, 응접실에 있는 장식장 세 번째 서랍에……”
“아, 알았어! 챙겨 가면 되잖아!”
리안나가 새침한 얼굴로 프란츠를 쏘아보았다.
쿡쿡 웃음을 터뜨린 프란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고, 분을 참지 못한 리안나는 애꿎은 쿠션을 발로 팡팡 차며 간신히 화를 다스렸다.
* * *
어쨌든 리안나는 얄미운 오빠에게 약점을 잡혔다. 그 말은 즉, 리안나는 결국 프란츠가 해 달라는 대로 해야 하는 처지라는 뜻이다.
리안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주 방에 들러 간식거리를 챙겼다.
느닷없는 공녀님의 등장에, 주방 하녀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미쳤지, 내가 그 얄미운 프란츠 오빠
를 위해 간식까지 챙기다니. 리안나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간식이 좀 필요한데.”
“간식이요? 아까 올려보냈던 쿠키로는 좀 모자랐던가요?”
“아니, 내가 먹을 거 말고. 오빠한테 줄 거야.”
그 말에 주방 하녀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어째서 아가씨가 아닌 도련님의 이야기가 나오지?
“도련님에게요? 하지만 도련님은 지금 훈련 중이실 텐데……”
“알아. 그 망할 놈의 오빠가 훈련 끝나자마자 레몬 머랭 파이를 가져 오라고 했거든.”
리안나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런 공녀님을 보며, 주방 하녀는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개와 고양이처럼 아르릉거리는 두 남매였으니, 이번에도 둘이 기 싸움을 하다가 일이 이 모양이 된 것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방 하녀는 어린 공녀님에게 상냥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직접 도련님을 찾아가시려고요?”
“그러려고. 진짜, 그 인간 내가 언젠가 꼭 복수할 거야……”
리안나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주방 하녀에게는 그런 리안나가 그저 귀엽게 보일 따름이었다.
어린 공녀님이 소공자님을 직접 챙 기겠다는 지금 상황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분기를 꾹꾹 눌러 참는 리안나를 앞에 두고, 주방 하녀는 황급히 주방으로 들어가며 웃어 보였다.
“잠시만 계시겠어요? 얼른 간식을 준비해 드릴게요.”
“응, 고마워.”
리안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주방 하녀는 리안나에게 간식 바구니를 들려 주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응, 응!”
간식 바구니를 들여다보던 리안나는 간신히 웃었다. 간식 바구니 안에는 레몬 머랭 파이와 차갑게 식힌 우유가 들어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밉살스러운 프란츠에게 줄 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호화스러운 간식 같다.
리안나는 애써 속내를 감추며 바구니를 고쳐 들었다.
“그럼 다녀을게.”
“그래요, 꼭 화해하시기를 바랄게요.”
주방 하녀들은 잔뜩 의욕적인 눈빛을 하고, 양손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그녀를 응원했다. 우리 아가씨, 언제 이렇게 어른스러워지셨담! 류의 눈빛이었다.
아니, 응원해 주는 건 좋은데…… 이건 아니잖아? 리안나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서 공작성의 연무 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여러모로 기분 좋은 날씨였다. 한창 가을이 무르익은 10월이었다.
청명한 하늘은 높고, 맑은 바람이 살랑거리면서 리안나의 뺨을 간지럽혔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낙입이 빙글빙글 떨어진다. 리안나는 껑껑거리며 바구니를 날랐다. 주방 하녀들의 정성이 들어간 바구니는 무거웠다.
‘내가 프란츠 오빠를 먹이겠다고 이 무거운 바구니를 옮기고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당장 바구니를 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커다랗게 심호흡을 해 본다.
아니야, 착하게 생각하자. 저 망할 프란츠가 지금 내 약점을 쥐고 있는 거잖아?
“아, 저기 있네.”
리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허리를 곧게 세운 기사가 한 명, 그리고 그 앞에서 곧은 자세 로 검을 휘두르는 프란츠가 있었다. 기사가 프란츠의 자세를 관찰하며 말했다.
“검 끝이 약간 아래로 처졌습니다.”
“알겠는데…… 이건 나에게만 너무 엄격한 거 아냐?”
프란츠가 기사의 말대로 검을 휘두르면서 뚱하니 되물었다.
고개를 쏙 내밀어 상황을 살펴보던 리안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하긴, 프란츠는 차후 헤센바이츠 공작가문을 물려받을 후계자로서 엄청난 교육을 받고 있긴 하다.
그럼에도 기사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술은 귀족 영식의 기본입니다. 나중에 레이디들의 인기를 얻으려면……”
“……그렇게 말하는 경도 레이디들 과 거의 접점도 없는 삶을 살잖아?”
프란츠가 시큰둥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기사는 그만 순식간에 쭈그러들고 말았다.
리안나는 한숨을 삼켰다.
아, 저거 그건가. 사실 적시에의 한 심대한 심적 폭력? 으음, 기사님께 애도를.
사실 프란츠는 지금도 인기가 많았다. 아버지를 닮은 완벽한 외모와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직위까지 합쳐 진 결과였다.
게다가 리안나와 항상하는 티격태격한 싸움은 별개로, 어쨌든 프란츠는 대외적으로는 우아하고 섬세한 귀공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리안나만 해도 프란츠에게 잘 보이려는 레이디들이 보내 온 쿠키와 초콜릿들을 잘 얻어먹고 있긴 하다.
‘어쩐지 기사님, 조금 속상해 보여……”
리안나는 짠한 얼굴이 되어, 연무 장이 잘 보이는 벤치에 주저앉았다.
간식 바구니를 내려놓자, 무게가 사라지며 손이 저릿해졌다.
리안나는 턱을 된 채 다리를 팔랑거리며 오빠가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절도 있는 자세는 그 나이대의 소년들이 갖고 있다고 하기에는 상당한 실력을 증병하고 있었으나, 아쉽 게도 리안나는 이미 아버지로 인해 한껏 눈이 높아진 상태였다.
‘으이구, 저 모지리가 내 오빠라니.’
아빠를 닮았으면 좀 얼굴값 좀 해 라. 그녀의 아버지께서는 능력 있는 행정가였고, 잘생긴 외모와 검술 실 력을 동시에 보유한 훌륭한 기사이 기도했다.
그 반면, 프란츠 오빠는 간신히 반반한 외모만을 물려받은 거 아니야? 그래도 레이디들은 저 인간의 꾸며 낸 다정한 미소 하나에 깜빡 속아 넘어가곤 하니, 죄 많은 인간 같으니. 리안나는 그만 환멸감을 느끼고
말았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멍하니 이것저것 생각에 골몰하고 있던 리안나를, 기사가 반가운 얼굴로 마주보았다.
한창 프란츠를 지도하는 데 열을 올리더니, 이제야 리안나가 눈에 들어왔나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리안나가, 최대한 천진한 얼굴로 활짝 웃이 보였다. 손을 붕붕 흔드는 것은 덤이었다.
“포프 경, 안녕하세요!”
그때 프란츠가 성큼성큼 리안나에게로 다가왔다. 땀을 닦던 프란츠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야, 못난이. 왔냐?”
저 화상, 내가 언젠가 꼭 뒤통수를 치고 말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리안나는 애써 웃었다.
“간식 가져왔어.”
“레몬 머랭 파이, 잘 갖고 왔지?”
“그래, 갖고 왔다 이 인간아.”
리안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내심 이가 갈리는 건 어 쩔 수 없었다.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니! 망할 예법 교본 같으니라고! 리안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오빠 주려고 일부러 주방까지 갔다 왔다고, 어? 알아?”
“그래, 우리 리안나. 역시 내 동생 이야.”
프란츠가 입살스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리안나는 입술에 경련이 날 정도로 웃으며 간식 바구니를 풀었다.
레몬 커스터드를 잔뜩 넣은 머랭 파이와 차갑게 식힌 우유까지, 체크 무늬 테이블보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간식 먹을 준비를 모두 끝낸 리안나가 포프 경을 불러다 앉혔다.
“포프 경도 이리 오세요. 우리 같이 먹어요.”
“아, 저는……”
기사는 눈치 빠르게 이 자리에 서 벗어나려했다. 어쩐지 소공작님을 바라보는 공녀님의 표정이 가시 돋친 양 살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안나는 빙그레 웃으며 기 사를 잡아 두었다.
“얼른요.”
왠지 저 기사라도 끼워 두지 않으면, 이대로 참지 못하고 프란츠에게 한참 퍼부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불길함을 그도 느꼈는지, 한숨을 푹 내쉰 기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겨우 프란츠 오빠의 입에 들어갈 음식인데, 뭘 이렇게 바리바리 챙겨 줬담.’
한창 삐뚤어진 마음이 된 리안나가 뚱하니 생각했다.
주방 하녀들은 흡사 소규모 티파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식기까지 제대로 챙겨 준 것이다.
리안나는 파이를 한 조각씩 접시에 올리고, 포크까지 챙겨 기사와 프란츠에게 건네주었다.
기사와 프란츠는 얌전히 파이를 받았고, 그들은 불편한 침묵 속에서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프란츠는 여동생을 놀려 먹은 것에 대한 만족감에 싱글싱글 웃고 있었고, 리안나는 눈에 불을 켜고 포크를 늘어 파이를 쿡쿡 찔러 대고 있었으며, 포프 경은 두 꼬마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체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우리 리안나, 오빠가 그렇게 좋아?”
“미쳤어, 진짜?”
리안나는 질색했고, 프란츠는 쿡쿡 웃었다.
뾰로통해진 리안나가 프란츠를 홱 흘겨보았다.
“오빠가 나 괴롭혔다고 엄마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