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196)

9 화

공작 각하께서 얼마나 초조해 하시는지, 사람들은 내심 산모의 건강만 큼 공작의 건강까지 함께 걱정할 정 도였다.

자카리는 차마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이엘리의 출산 소식을 기다렸다.

입술은 온통 짓씹어서 옅은 핏물이 배어났고, 새파란 눈동자는 초조한 빛을 숨기지 못한 채였다. 그가 기 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엔.”

자카리는 낮게 중얼거렸다. 지금 이엘리는 차양막이 드리워진 방 안에서, 홀로 산고의 고통을 치르고 있었다.

아이를 낳는 곳에는 산파와 시중을 들 하녀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기에, 자카리는 거실에서 이엘리의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쥐고 꽉 비트는 기분이었다.

긴장감이 지나치다 못해 이대로 죽을 것 같았다. 자카리는 두 눈을 꽉 내리감았다.

“제발, 이엔.”

이엘리가 있는 곳이 여기서 멀지도 않은데, 평생 손이 닿지 않을 것만 같은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건강해 야 하는데.

지금 이 순간, 자카리는 오로지 이엘리의 건강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이의 안전은, 솔직히 말하자면 예상 밖이었다. 자카리의 입술에 쓴 웃음이 걸렸다.

‘이런 곳에서 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줄은 몰랐군.’

선대 공작은 아델라이데를 무척 사랑했고, 그랬기에 자카리에게 베풀 애정까지 모조리 제 아내에게 퍼부 어 버렸다.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아델라이데는 단 한 명뿐이라던, 그 냉정한 목소리.

하지만 자카리의 현재 심정은 선대 공작과 꼭 같았다. 자카리는 한숨을 삼켰다.

‘이엔은 한 명뿐이지만, 아이는 여 럿 낳을 수 있어.’

이엔만 건강하면 된다. 이엘리가 들으면 잔뜩 화를 낼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하며, 자카리는 입술을 다시 한 번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런데 그때, 하녀 한 명이 종종걸 음으로 다가왔다.

“공작 각하.”

“이엘리는?!”

번쩍 눈을 뜬 자카리가 다급하게 하녀를 뒤돌아보았다.

아이를 무사히 낳았느냐, 이엘리는 건강한 것이냐. 그 모든 질문이 그 말 한 마디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하녀 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온통 살벌 한 얼굴을 한 공작에게, 하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건강하십니다.”

후우, 그제야 안도의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자카리에게 하녀가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서, 자카리는 드디어 이엘리가 지난한 산고의 고통을 무사히 빠져나왔음을 깨달았다.

“그럼 들어가 봐도 되나?”

그 조급한 물음에 하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안주인 마님께서 공작 각하를 모셔 오라

고 하셨다. 아마 제 남편이 느끼는 초조함을 미리 꿰뚫어 보시고 그러신게 아니었을까.

공작은 더 대답을 듣지도 않고 휙 몸을 돌렸고, 하녀는 난처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기님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으시나?’

보통은 아이를 낳게 되면, 안주인 보다는 아이에 대해 더 관심을 갖는 편이 일반적이었다.

가문을 이을 후계자여서 그런 것이 기도 했고, 특히 공작가처럼 손이 귀한 가문은 후계자가 무척 중요하니까.

하지만 공작은 태어난 아이에 대해 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뭐, 안주인 마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하실 테지만.’

다른 건 몰라도, 공작 각하를 다루 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안주인 마님이 시다.

그러니 내가 하는 걱정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지 않으려나.

어깨를 으쓱인 하녀는 종종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갓 아이를 낳은 안주인 마님을 모 시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살펴봐야 할 일이 많았다.

* * *

이엘리는 푹신한 침대 위에 반쯤 파묻히듯 누워 있었다. 온몸이 부서 질 것처럼 아프긴 했지만, 어쨌든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

건강한 사내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우렁찬 울음을 터뜨렸다.

“건강한 아드님이세요, 정말 축하 드려요.”

산파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친 와중에서도 자신이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는 사실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자카리와 이엘리의 아이였다. 그들의 사랑의 결실이었고, 그들이 열렬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아이였다.

옆에 선 하녀가 이엘리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혀 주었다. 양팔을 뻗은 이엘리가 온통 부르튼 입술을 달싹 거렸다.

“아이를 보고 싶어.”

“잠시만요, 금방 데려다드릴게요.”

아이를 따스한 물에 씻기고, 보드라운 천으로 돌돌 감싸 준 산파가 그대로 이엘리의 품에 아이를 안겨 주었다.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천을 헤치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갓 태어난 아이가 품 안에서 꼬물거렸다. 눈은 꼭 감고 있었고, 그녀에게서 물려받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졌다.

“……”

이엘리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아이를 낳았어. 이 아이가 우리의 아이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이를 제 품 안에 그러안았다. 온몸을 적시는 행복함이 감격스럽다.

“이엔!” 

그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자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엘리는 온통 젖은 눈동자로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감격스럽다 못해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왜 울어. 응?”

혼란스러운 표정이 된 자카리가 황 급히 이엘리에게 다가섰다. 갓 아이를 낳은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손을 뻗은 자카리가 이엘리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너 괜찮은 거야?”

혹시 그녀가 아이를 낳다 너무 지친 것은 아닐까.

어디 잘못되기라도 한 건 아닐까. 자카리는 황급히 이엘리를 위아래로 살펴봤지만, 그녀는 멀쩡해 보였다. 그녀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제 품에 안긴 아이를 살짝 보여주었다. 자카리는 순간 얼어붙었다.

“……우리의 아이야?”

“맞아.”

그녀의 대답에, 자카리의 푸른 눈동자가 갓 태어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꼭 감은 눈, 이엘리에게서 물려받은 분홍색 머리카락, 앙증맞은 손발 과 조그마한 얼굴.

너무 연약해서 손가락 하나도 대면 안 될 것 같았다. 자카리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때.

“안아 볼래?”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아이를 안겨 주었다.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하게 아이를 받아 안았다.

바로 그 순간, 아이가 두 눈을 반짝 떴다.

봄날의 다사로운 하늘을 한 조각 떼어 넣은 것 같은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자카리는 숨

을 삼켰다.

“우앵……”

조그맣게 칭얼거리던 아이가 조막만 한 손을 뻗었다.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이 무언가를 잡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자카리가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잠시 후, 아이는 자카리의 검지를 꼭 움켜쥐고는 환하게 웃었다. 티끌 한 점 없는, 그저 순수하기만 한 찬 연한 미소였다.

“꺄아!”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자카리의 목 깊은 곳에서부터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기어올랐다.

“……윽.”

빙해 같던 눈동자가 삽시간에 젖어 들었다.

툭, 눈물이 떨어진다. 아이에게 눈물이 닿을까, 자카리는 황급히 소매 로 눈가를 닦아 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이 아이를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자식을 사랑 할 수 있을지 조차 자신이 없었는데.

하지만 아이를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이 조그만 아이가 없으면 그는 이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애는 내가 낳았는데 왜 네가 나보다 더 울어?”

이엘리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엘리의 눈가에는 온통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자카리는 시선을 돌렸다. 이엘리의 다정한 물음이 그의 귓가를 두드린다.

"아직도 아이가 미워질 것 같아?”

“그럴 리가 없잖아……”

자카리가 작게 흐느끼며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엘리는 눈물 고인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러면 됐어.”

이엘리의 상냥한 목소리는 마치, 자카리를 구원하는 것 같았다. 품에 안긴 아이의 온기를 느끼며, 그는

깨달았다. 드디어 오래된 겨울에서 온전히 빠져나와 두 발로 설 수 있다는 것을.

* * *

헤센바이츠 공작 부부는 두 남매를 낳았다.

공작가문 자체가 손이 귀한 집안 이었기에, 두 아이가 태어난 것 자 체가 마치 기적처럼 받아들여졌다.

첫째는 아들, 둘째는 딸아이였다.

두 아이 모두 어머니에게서는 분홍 색 머리카락을, 아버지에게서는 짙푸른 눈동자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외양은 달랐다. 첫째 아이는 아버지를 닮는다는 속설 때문인지, 소공자 프란츠는 자카리를 쏙 빼닮은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둘째 리안나 공녀는 이엘리를 빼다 박았다.

“프란츠 오빠, 미워!”

"나라고 네가 좋은 줄 알아?”

두 남매는 딱 세 살 터울이 났다.

앙숙처럼 아르릉거리기에는 아주 좋은 나이였고, 두 꼬마는 제 나이다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두 꼬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다는 뜻이었다.

"다들 그만하렴, 언제쯤이면 철이 들래?”

이엘리는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쯧쯧 혀를 찼다. 프란츠 열 살, 리안나 일곱 살. 한창 사고를 치고 다 닐 나이이기는 했다.

불퉁하게 입을 내민 꼬마들을 앞에 둔 채, 이엘리는 ‘내가 열세 살 때는 말이지〜’로 시작하려던 말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오늘부터 엄마는 일주일간 집을 비워야 하는데, 엄마 없을 때도 이렇게 싸우고 있을 거야?”

“엄마, 꼭 가야 해요?”

“맞아요, 그럼 저도 같이 갈래요!”

프란츠와 리안나가 이엘리의 치마를 붙들고 매달린다. 동시에 프란츠가 리안나를 흘겨보았다.

"네가 왜 엄마랑 같이 가?”

“그러는 오빠야말로 왜 엄마랑 같이 가는데?”

두 남매는 다시 눈에 날을 세워 서로에게 이를 드러냈다. 이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엔, 정말로 혼자 가도 돼?”

“물론이지. 자카리는 너무 걱정이 많아.”

이젠 아이들에 이어 남편까지 내 걱정을 하네. 이엘리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오늘부터 이엘리는 일주일간 공작성을 비울 예정이었다.

이엘리가 직접 후원해 줬던 전시회가 개최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거리가 좀 먼 도시에서 개최되기에, 아이들과 함께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이엘리만 혼자 가기로 했다.

아이들 곁에는 자카리가 남아 있기로 했는데…….

‘아무리 자카리가 제 부모님에 대한 그늘을 벗어던졌다고 해도, 좀 무뚝뚝하니까.’

이엘리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혀 끝을 깨물어 삼켰다.

공작성의 온화한 분위기는 평소 이엘리가 담당하는 영역이었다. 그 말은 즉, 자카리는 아이들을 대하는 데 서투르다는 뜻이었다.

“엄마 없을 때 싸우면 안 돼, 알겠지?”

이엘리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들은 금세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말씀도 잘 듣고.”

“네에.”

“네에에.”

꼬리를 늘여 대답하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하지만 빠질 수도 없는 자리였기에, 이엘리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공작성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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