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화
이엘리는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공작성 사람들은 아예, 이엘리를 대하며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하는 산책 외로는 침대 밖으로 발걸음조차 하지 못 했고, 그녀의 주변은 온통 푹신하고 보드라운 것들로 가득 채워졌다.
손닿는 곳에는 이엘리가 좋아하는 간식으로 가득 찼고, 평소에도 이엘리의 곁을 자주 비우지 않던 메리는 이제 그녀를 보는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평상시와 크게 다를 법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 일상에 애정 어린 변화 가 하나둘씩 추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이엘리는 그런 변화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엔, 이것 좀 먹어 봐.”
“……”
이엘리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카리가 내민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접시 위에는 몸에 좋은 갖가지 채 소들을 이용해 만든 샐러드가 가득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엘리는 채소보다는 고기를 훨씬 더 선호하는 입맛이 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샐러드에 추가된 드레싱은 고작해야 레몬즙뿐이었다.
가끔 샐러드를 먹는다 하면, 마요네즈를 기반으로 한 드레싱을 듬뿍 뿌려 먹는 이엘리에게는 너무 맛이 심심했다.
“……난 고기가 더 좋은데.”
차마 싫다, 라고는 대답하지 못한 이엘리는 시무룩한 얼굴로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자카리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엘리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채소가 건강에 좋다고 하니까.”
“……으응, 아는데……”
이엘리는 복잡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한 식단과 운동을 통해 100년을 사느냐, 맛있는 음식을 먹고 50 년을 사느냐를 고르자면 이엘리는 단연 후자였다. 그런데.
“한입이라도 좋으니 먹어 봐.”
“그래……”
한숨을 푹 내쉰 이엘리는 샐러드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레몬의 상큼한 맛과 싱싱한 채소의 아삭거리는 식감이 입안에서 어우 러졌다.
주방장이 한껏 솜씨를 부렸는지, 객관적으로는 무척 맛있는 샐러드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글픈지 모르겠어.’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입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에 더하여, 이엘리의 손에 유리컵을 들려 주었다.
“토마토와 셀러리를 갈아 만든 건 강 주스야. 이걸 마시면 속이 편안 해진다고 하더라고.”
“자카리, 나 토끼 아닌데.”
샐러드에 이어 건강 주스라니, 이건 좀 너무하잖아.
이엘리는 한숨을 삼키며 컵을 내려 다보았다.
“이런 거 먹지 않아도, 난 이미 충분히 건강하니까……”
"아니, 산모는 여러 가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한댔어.”
“……아니, 그게 맞는 말이기는 한데. 누가 그런 말을 했어?”
“〈건강한 출산을 위한 스물두 가지 방법〉의 저자, 포핀스 부인이 그러 던데.”
……그런 잡지가 있었어?
이엘리는 약간 당황해 버렸다. 그냥 잘 먹고 잘 쉬면 되는 게 아닐 까,하고 속 편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안이함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자카리, 그런 잡지는 어떻게 챙겨 보게 된 거야?”
“제국의 모든 출판사에게 연락해서 출산 관련 책은 모두 보내 달라고 했는데.”
“…..그런 거였어?”
따끔거리는 양심의 고통이 느껴진 다. 이엘리는 애써 그 고통을 무시했다.
하지만 자카리의 행동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내일은 ‘라 캄타넬’ 음악대가 방문할 거야.”
“그 음악대는 왜?”
‘라 캄타넬’ 음악대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대였다.
귀족들의 초청을 받아 주로 연회장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최근 제도에 서도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들었다.
그 말은 즉, 초청하기에 무척 어려 운 음악대라는 뜻이다.
‘뭔가 중요한 연회라도 있나?’
이엘리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연회가 있다면 마땅히 그녀에게 먼저 말을 했을 텐데, 자카리에게 그런 언질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환한 미소와 함께, 단순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임산부의 심신 안정에는 음악이 좋다고 하더라고.”
“……아하.”
이엘리는 그만 질린 표정을 짓고 말았다. 도대체 내 남편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자카리의 열의는 아직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 오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일찍 자도록 해.”
“저기, 난 괜찮은데.”
“아니, 내가 괜찮지 않아.”
……자카리가 지금까지 내게 이렇게 단호했던 적이 있던가. 이엘리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아직 납작한 배를 쓸어내렸다.
‘아가, 네 아빠가 이렇게 유난이란다.’
그리고 이 유난은, 그녀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엘리는 미간을 잔뜩 구겼다.
* * *
그리고 다음날.
이엘리는 아침부터 메리의 수선스러운 음성에 시달려야했다.
“안주인 마님, 이건 어떠세요?”
안쪽을 모피로 누빈 연두색 망토였다. 이엘리는 기겁하고 말았다.
“……아냐, 그건 좀 과한 것 같아.”
이엘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봤자 응접실에서 음악을 들을 건데, 저런 망토까지 몸에 두르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하지만 메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산모는 체온 유지가 중요 하다고 하던걸요.”
“하지만 응접실에는 난방이 되어있잖아?”
이엘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헤센바이츠 공작령이 날씨가 차갑다고는 하지만, 아직 난방을 할 날씨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난방에 이어 망토까지. 그녀는 이 모든 게 과하다고 생각했으 나, 반강제로 이 걱정들을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놈의 재채기를 어떻게든 참는 거였는데.’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최근 이엘리는 아주 부담스러운 경험을 했었다.
조그맣게 재채기를 한번했다가 공작성 사람들 전체가 그녀 주변으로 몰려든 것이다.
‘마님, 추우신가요?!’
‘얼른 내려가서 온도를 높이라 이 르겠습니다!’
‘뭐하고 있나, 가서 따뜻한 차와 담요를 갖고 오지 않고!’
자카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 무뚝뚝한 집사까지 공작성 사람들의 수선에 한몫 했었다.
그런 경험을 다시 하느니, 차라리 얌전히 공작성 사람들의 걱정을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 긴 했는데.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내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는 건 좀.’
그녀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메리와 함께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이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헤센바이츠의 공작 부인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라 캄타넬’의 지휘자가 대표로 이엘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지휘자의 등 뒤로는 연주자들이 나란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 먼길 오느라 수고했네.”
적당히 인사를 입에 담으며, 이엘리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임산부의 정신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곡들로 엄선하였습니다.”
“……”
아, 그래.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지휘자가 뒤로 돌아섰다. 공작성의 응접실 안쪽으로, 우아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음악을 귀기울여 듣던 이엘리는 문득 생각했다.
‘오, 정말로 정신안정에 도움이 되 긴 하는 것 같은데.’
음악을 듣던 이엘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졸려.’
눈꺼풀이 절로 무거워졌다. 음악을 집중해서 들으려 했지만, 밀려드는 수마는 그녀를 끊임없이 유혹했다. 그리하여 결국…….
“……”
산모의 정신안정에 좋다는 음악 사 이로, 이엘리의 낮은 숨소리가 뒤섞였다.
꾸벅꾸벅 졸던 이엘리는 숫제 소파에 푹 고개를 기댔다.
그날 이후, 이엘리는 그때 잤던 낮 잠을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푹 잠들었던 적은 오랜만이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내를 바라보며, 자카리는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공작성 사람들도 마찬가 지였다.
그리하여 이번 일의 피해자는, 자 신들의 연주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갖게 된 ‘라 캄타넬’ 음악대의 단원 들뿐이었다.
* * *
이런 유난들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카리는 한술 더 떴다.
“이엔, 뭔가 필요한 건 없어?”
“전혀 없어.”
이엘리는 살래살래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눈살을 찡그리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 그 질문 말이야. 농담 안하고 백 번은 한 것 같은데.”
“그랬나?, ’
자카리는 약간 머쓱한 얼굴이 되어 한 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이엘리를
볼 때마다,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입에 무언가라도 하나 넣어 주고 싶었고, 그녀가 잠들 때마다 곁에서 팔이라도 빌려주고 싶었다.
그때 이엘리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그에게 말했다.
“그것보다, 자카리.”
"응?”
“너, 요새 너무 바쁘게 일하는 거 아냐?”
이엘리는 자카리의 뺨을 살짝 쓸어 내렸다. 예전보다 약간 거칠해진 감촉이 마음 아팠다.
안주인 마님이 본의 아니게 일선에서 물러났기에, 공작가의 일들은 이제 가주와 휘하 사용인들에게 몰리 고 있었다.
당연히 자카리도 갈갈 갈리는 중이었기에, 이엘리는 약간 미안해졌다.
“나만 쉬고 있으니까 조금 미안한 데.”
그 말에 자카리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침대 옆에 앉은 자카리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
나지막한 속삭임이 이엘리의 귓전을 간지럽힌다.
"그럼, 이번 일만 끝내고 단둘이 쉬러 갈래?”
“단둘이?"
“그래, 플로랑테 섬 말이야.”
그 단어를 들은 이엘리가 빙그레 웃었다. 플로랑테 섬. 그들의 첫날밤에 관한 추억이 서린 곳이었다.
충동적으로 공작성을 빠져나가 다다랐던 곳. 세상에 오직 단둘만 남아 있었던 것 같은, 그 달큼하고 매혹적인 감각.
내내 공작성에만 있었기에, 기분 전환에도 좋을 것 같다.
“좋아, 나도 오랜만에 바다가 보고 싶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엘리를 바라보던 자카리는, 금세 걱정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본다.
"그건 괜찮은데.”
“괜찮은데?”
뭔가 문제라도? 그런 의미를 담아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거리가 좀 있는데, 괜찮아?”
아하, 그런 뜻이었나. 이엘리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녀는 임산부였고,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플로랑테 섬은 공작성에서 좀 거리가 있으니, 그를 걱정하는 것이다.
“물론이지. 마차를 타는 것 정도는 괜찮아.”
이엘리가 힘을 주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쓸데없는 걱정 말라는 뜻에서, 이엘리는 자카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이번에는 내 옷, 잘 챙겨 둬야 해.”
"물론이지.”
부러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이자, 그제야 자카리가 조금이나마 웃었다.
이엘리는 그를 따라 방긋 눈웃음을 쳤다. 역시 그녀는, 자카리가 웃는 모습이 제일 좋았다.
* * *
밀려온 파도가 가벼운 포말을 일으키며 모래톱 위에 흐트러졌다.
자카리는 겨울의 힘을 세심하게 다루어 배를 움직였다.
잠시 후,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을 잡고 모래톱에 발을 디뎠다.
“오랜만에 온다, 여기도.”
짭짤한 바닷바람을 들이마시며 이엘리는 작게 웃었다. 자카리는 그런 그녀를 응시했다.
어느새 여름이 지나고, 완연한 가을이었다. 맞잡은 손에서 번져 오는 온기가 기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