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
아니, 도대체 왜 저래! 평소의 수줍은 내 남편은 어디로 간 거야!? 하지만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조만간 기쁜 소식을 두 분께도 들려드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도 꼭 들었으면 좋겠네 요.”
잠시 후, 약간 침착함을 되찾은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론도 후작 영애가 안타깝게 말한다.
“공작 부인, 부채라도 좀 빌려드릴 까요?”
이엘리의 얼굴은 이제, 잘 익은 토마토처럼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부채를 건네받은 이엘리는, 팔락팔락 부채를 부치면서 붉어진 얼굴을 식혔다. 그대로 이엘리가 자카리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부끄러워 죽겠는데, 자카리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언제 저렇게 뻔뻔해진거람, 진짜!’
이엘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그때, 테이블 아래로 크고 따스한 손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꼭 움켜쥐는 그 동작이 마치 ‘날 싫어하면 안 돼’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으이구, 내가 못 살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엘리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서렸다. 일부러 두 여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이었다.
부러 새침하게 손을 빼내자, 허겁지겁 손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는다.
픽 웃음을 터뜨린 이엘리가 그 손을 마주 쥐었다. 그제야 자카리의 표정이 좀 풀어졌다. 타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마주 잡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이엘리는 생각했다.
‘이러니까 내가 널 싫어할 수가 없지:
그가 저를 향해 보이는 애정이 너무 커서 심장이 간지럽다. 그녀는 생긋 웃었다.
그 이후 ‘좋은 일 있나 봐요?’라며 능글맞게 웃는 두 여자의 장난에 휩쓸려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 * *
오늘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이엘리는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며 버릇처럼 간식을 입 안에 넣고 있었다.
그녀가 즐겨 먹는, 한입 크기로 구워 낸 초콜릿 타르트였다. 그런데.
‘응?’
이엘리의 눈씹이 꿈틀 움직였다. 초콜릿의 고급스러운 단맛이 혀를 휘감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달콤함이 역하게 느껴지…… 잠깐만, 초콜릿이 역하게 느껴진다니, 이게 무슨 일이 야?
“욱!”
순간 이엘리는 입을 틀어막고 구역 질을 했다. 곁에서 있던 메리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안주인 마님?”
"아, 잠시만……”
이엘리는 손사래를 치며 심호흡을 했다.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아침에 먹었던 식사가 체하기 라도 한 건가? 어쩔 줄 몰라하며, 메리가 이엘리에게 말했다.
"속이 좋지 않으세요? 좀 누워 계 시는 건 어떠세요?”
“……그래, 그럴까.”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요새 일이 밀려서 밤잠을 좀 설쳤었다.
아마 피로감에 겹쳐, 먹은 음식이 살짝 얹힌 거겠지.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메리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웠다.
당시의 그녀는 제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기사단 일로 밖에 나갔던 자카리는, 이엘리가 앓아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이엘리가 놀라서 반쯤 패닉에 빠진 남편을 다독여야 할 정도였다.
“별거 아니야, 그냥 체한 것 같아.”
“요새 너무 과하게 일을 해서 그런 것 아냐?”
"그럴 수도 있고…… 조금 쉬면 나을 테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어떻게 내가 널 걱정을 안 해!”
잔뜩 뿔이 난 자카리는 금방 주치 의를 불러왔다.
사실 이엘리는 이번 일이, 주치의를 불러올 정도로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카리의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는, 차라리 의사의 진료를 받고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주인 마님.”
이엘리를 진찰한 주치의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내 생각보다 좀 심각한 일인가? 바짝 긴장한 이엘리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손을 맞잡은 자카리의 손에는 이미 바짝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잠시 후, 주치의가 진지한 목소리 로 질문을 던졌다.
“실례되는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무엇이기에 그러나?”
“최근, 달거리를 규칙적으로 하셨 습니까?”
달거리?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고 보면 저번 달은 건너뛰었던 것 같은데. 평소 규칙적인
달거리를 하는 이엘리였기에,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업무가 많아서 피로해서 그렇겠거니 생각했고, 나중에는 깜빡 잊어버렸다.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저번 달은 쉬기는 했는데.”
그렇게 말하던 이엘리의 얼굴이 점차 애매해졌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것? 약간의 기대감과 긴장감이 뒤섞인 안주인 마님의 얼굴을 응시하던 주치의가,
잠시 후 단호하게 선언했다.
“회임하셨습니다.”
“……뭐?”
이엘리보다도 자카리가 먼저 얼이 빠진 얼굴이 되어 되물었다. 이엘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나 그럼 지금 입덧하고 있는 거야?
주치의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아마 회임하신 지, 극 초반이신 것 같습니다. 한 5주 정도 되신 것 같은데……”
5주. 이엘리가 건너뛰었던 달거리 기간과 일치한다. 이엘리는 멍하니 배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아직 판판한 배를 어루만졌다.
내 배 속에 지금 아이가 있다고? 그렇다면 나, 조금 있으면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는 그 말이야? 자카리가 성마른 목소리로 주치의에게 다시 물었다.
“임신이라는 건 확실한 건가?”
“확실합니다. 제 의사 자격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자카리와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시 후, 이엘리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사실, 요새 자카리와 뜨거운 밤을 보내긴했다. 그의 품에서 쾌락에 젖어 허덕거린 그때, 아이가 배 속에 잉태되었다 그 소리가 아닌 가.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살짝 시선을 돌렸다.
‘언젠가 후계자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귀 뒤가 뜨거워졌다. 물론 후계자를 생산하는 건 공작 부부의 의무였다. 오히려 아이를 원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고 생각하자 심장 한구석이 간질 거렸다.
“……이엔이, 아이를 가졌다고.”
자카리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은 묘하게 불안정해
보였다.
‘내가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고?’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자카리는 제 혼란스러움을 감추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아이, 아이라고.
‘나는……’
아직 아이를 온전히 사랑할 자신이 없는데. 그는 숨을 삼켰다. 그런데 그때, 이엘리가 그를 불렀다.
“……자카리?”
그의 표정이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막막해 보인다.
이엘리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움 켜 쥐었다.
“너 괜찮아?”
“아, 응.”
안 된다, 그녀 앞에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건. 자카리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임산부이시니 이제 업무는 좀 떼어 두고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주치의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자카리는 단단히 마음을 다져 먹었다.
그래, 이엔이 무사히 출산하는 것 자체가 우선이다.
자카리는 결연한 시선으로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그가 단호한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이엔.”
“응?”
이엘리는 움찔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람?
"앞으로 너, 일하는 거 금지야.”
“……뭐?”
당황한 이엘리가 두 눈을 깜빡였다. 자카리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베개를 고쳐 주고, 이엘리를 자리에 눕혔다. 얼떨결에 이엘리는 자리에 누웠다.
이엘리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준 자카리가, 이엘리의 배를 덮은 이불 위를 손으로 도닥거렸다. 자카리의 눈빛은 아주 진지했다.
"지금 네 배 속에……”
그녀의 배 언저리를 어루만지고 도닥이는 손은 무척 다정했다. 숨을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아이가 들어있다고 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목소리에는 수많은 감정이 어려 있었다.
이엘리는 그 감정에서 기쁨과 두려움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좀 더 큰 것 같았다.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엘리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스며들었다.
“자카리, 정말로 괜찮은 거야?”
"물론이지, 우리의 아이를 가진 거잖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목소리는 묘하게 불안정했다.
“우선 아이를 무사히 낳는 것에 집중해. 알았지?”
"하지만 내가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긴 기간도 아니고 10개월입니다. 그 정도는 집사가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주치의까지 저렇게 나오니, 그녀가 더 이상 반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엘리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었다.
자카리는 주치의를 물렸다. 단둘이 남자, 자카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고마워, 이엔.”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한참을 입술만을 달싹이던 자카리는 조심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내 아이를 가져 줘서 정말 고마워.
하지만 출산이라니.
너에게 자꾸만 힘든 일을 시키게 되는 것 같아서 죄스러워.
수많은 말들이 입 안을 뱅뱅 돌았다. 그런 자카리를 이엘리는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사랑하는 제 남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아마 내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죄책감과 애정이 뒤섞여 깊숙이 가라앉은 짙푸른 눈동자, 잘게 떨리는 입술. 그리고 이엘리는 자카리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이리 와, 자카리.”
팔을 활짝 펴고 자카리를 부르자, 자카리는 그녀에게 주춤주춤 다가섰다. 마치 금방이라도 혼이 날까 봐 두려워하는 어린아이 같다.
잠시 후, 그의 양팔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너의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이엘리가 작게 속삭였다. 자카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우리의 아이야, 너와 내가 사랑했다는 증거이자 결실.”
우리의 아이,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이자 결실. 그 말에 자카리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엘리는 노래하듯이 말을 맺는다.
“정말 기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카리는 대답 대신, 이엘리를 끌어안은 양팔에 힘을 주었다.
이엔. 나의 유일한 사랑, 단 하나 뿐인 기적. 이엘리는 제 품을 파고 드는 자카리를 감싸 안았다.
* * *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이 아이를 잉태하셨다는 소식은 공작성은 물론이고, 북부 전체에 짜하게 퍼져 나 갔다.
이엘리는 약간 입덧이 있는 것 빼고는 건강했다.
오히려 이엘리를 걱정하느라, 자카리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할 정도였다.
평소 즐겨 먹던 달콤한 음식보다는 새콤한 음식을 당겨 하는 이엘리를 위해, 공작성에는 오렌지와 레몬과 귤 등 온갖 과일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과보호할 필요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