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196)

5 화

그래, 너와 나의 집. 부드러운 마차의 진동을 느끼면서, 자카리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덮치는 수마에 굴 복했다.

* * * 

그리고 다음날. 자카리는 마치 누군가가 망치로 쾅광 머리를 두드리고 있는 것 같은 두통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침대가 마치 그의 몸을 끌어당기는 늪처럼 느껴졌다.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다.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는 상황에,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 어 나왔다.

“으으……”

그때, 달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쏙 내민 이엘리가 시큰둥하게 입술을 열었다.

“이 진상아, 이제야 깼니?”

“……이엔?”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의……. 자카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고, 이엘리는 종종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자카리는 반사적으로 이엘리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그녀의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한 기분이었다.

“자, 마셔.”

이엘리는 뚱한 얼굴로 차가운 잔을 건넸다. 꿀을 듬뿍 넣어 만든 꿀물이었다.

자카리는 무심결에 잔을 받아 입술에 댔고, 그녀는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

좌아악, 커튼이 밀려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방 안에 햇볕이 환하게 내리쬔다. 커튼을 걷은 이엘리가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어제 일, 생각나?”

"어제 일?”

“그래, 어제 네가 어떤 일을 했는 지 말이야.”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자카리에게 말했다.

자카리는 숙취로 온통 엉망이 된 머릿속을 조심스럽게 뒤져 보았다.

그러니까, 어제 이엘리와 자카리는 가벼운 말다툼을 했다. 화가 난 그녀는 ‘오늘은 론도 후작가의 타운하 우스에서 자겠다’라며 뛰쳐나갔고, 속상했던 그는 마르텔 경을 붙들고 술을 퍼마셨다.

그 이후에는……. 자카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무슨 짓을?

“그 새벽에, 만취해서 론도 후작가의 타운하우스로 쳐들어오다니.”

이엘리는 팔짱을 낀 채 자카리를 흘겨보았다. 칼날 같은 시선에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했어, 미안해.”

크게 혼나는 강아지 같은, 시무룩한 목소리. 하지만 이엘리는 여전히 매섭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만 잘못했어?”

“아니, 황제 폐하와 론도 후작 영애께도……”

“그럼, 잘못을 저질렀으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엘리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자카리는 슬그머니 이엘리의 눈치를 살폈다. 이엘리는 여전히 새침한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다.

자카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그건……”

“당연히 잘못한 사람들에게 가서 사과해야지. 안 그래?”

그래, 맞는 말이다. 자카리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이엘리는 당당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두 분을 앞에 모셔 놓고, 진지하게 사과해.”

“……응, 그럴게.”

자카리는 자갈을 삼킨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자신이 백번 잘못했다. 무어라 변명할 수 있는 여지조차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자카리는 이 문제 말고도 이엘리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사과를 생각하니,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내가 잘못했지.’

자카리는 이엘리의 행동을 멋대로 제약하려 들었다. 아무리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이엘리는 엄연히 자카리와 다른 별개의 독립체다.

그런 그녀를 자기 마음대로 독점하려 하다니, 이엘리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사과해 야 해. 눈치를 살피던 그가 말했다.

"이엔, 미안해.”

"방금 전에도 사과했잖아?”

“아니, 그거 말고도 새로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이엘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할은 자카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하고 싶은 것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나와만 시간을 보내 달라 고 요청해서 미안해.”

“……”

이엘리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약간 더듬거렸다.

“그게, 네, 네가 너무 멀리 가버릴까 봐.”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자카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완전 히 멍청해진 기분이 든다.

“……그게 너무나도 두려웠어.”

이엘리가 날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 할까.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그런데도 가장 큰 문제는, 이엘리만 엮이면 올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독점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시선을 주는 것조차 싫었다. 오로지 그녀가 나만 보고, 나를 향해 웃어 줬으면. 말도 안 되는 욕심.

자카리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안을 아프게 찔렀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욕심을 부리고 있는지, 그건 잘 알아.”

욕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게 굴고 있는지는 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개인이 개인을 온전히 소유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자카리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이엘리가 이런 자신에게 지치고 질려 버리면 어쩌나, 하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부렸어…… 앞으로는 너에게 그런 무리한 요청을 하지 않을 거야.”

자카리는 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 로 말을 이었다.

“너를 독점할 수는 없지. 너는 나 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아니, 자카리.”

그때 이엘리가 자카리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그녀의 손이 기죽은 자카리의 뺨을 쓸어내렸다.

“넌 나를 독점할 수 있는, 그리고 독점할 욕심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흐린 하늘처럼 옅게 빛나는 눈동자가 이엘리를 응시했다. 이엘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해 줘서 기뻐.”

"이, 이엔.”

"난 너를 사랑해, 세상 그 누구보 다도.”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사랑한다’라는 말에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특수한 경우에는 너도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제도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공작 부인으로서 해야 할 최 소한의 사교 활동이 있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자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는 눈웃음을 지었다.

"대신, 평소에는 너와 좀 더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할 테니까.”

그 말을 듣자, 자카리의 눈동자는 이제 구름 갠 하늘처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북부에 돌아가면 우리 둘만 있자. 알겠지?”

“응!”

마치 일찍 생일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자카리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런 자카리를 보고 있자니, 이엘리는 문득 어제 두 여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후계자’에 대한 대화였다.

저렇게 순진하게 웃는 애가 무슨 후계자야, 싶던 이엘리는 문득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자카리, 행동은 순진하게 하지만…… 밤에 순진한 건 아니잖아.’

자카리와 보내는 밤이 얼마나 뜨거운지는 그녀 자신이 잘 안다.

그의 팔 아래에 갇힐 때마다 세상 온갖 쾌락이 몰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골똘히 생각에 빠졌던 그녀가 불쑥 물었다.

“저기, 자카리.”

"응?”

“혹시 너 아이 갖고 싶어?”

노골적인 그 물음에, 꿀물을 잘못 삼킨 자카리가 콜록 기침을 터뜨렸다.

간신히 꿀물을 내뱉는 일까지는 면했지만, 이엘리는 만일의 참사에 대 비하여 자리를 피했다.

잠시 후 애써 꿀물을 삼킨 자카리가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기겁한 푸른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뜨여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헤센바이츠의 후계자 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소리야.”

이엘리는 진지하게 물었고, 자카리는 어쩔 줄 몰라 입술을 잘근거리다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카리는 푹 고개를 숙였다. 그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솔

직히 말하자면, 두 사람에게는 공작가의 후계를 생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엘리는 약간 장난기가 돋았다.

“필요한 거야?”

“……그렇지, 우리는 어쨌든 공작가의 가주 부부니까……”

자카리는 쥐어짜 내듯 입을 열었다. 그때, 이엘리의 손이 자카리의 목뒤를 스쳤다.

흠칫 놀란 자카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이엘리가 자카리의 목을 휘어 감으면서 시선을 맞췄다.

“그렇다면 우리 오늘은……”

짙게 가라앉은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응시하자, 그의 두 눈이 휘 둥그레 커졌다.

이엘리는 그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달콤한 숨과 나긋한 목소리가 매혹적으로 뒤섞인다.

"후계자를 생산할 의무를 한번 짊어져 볼까?”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도발적으로 웃어 보였다. 잠시 멍해졌던 자카리의 눈동자에, 순간 희미한 빛이 스며 들었다.

‘이엔, 사실은 나……”

난 아직 잘 모르겠어. 내가 과연 아이를 가져도 되는 걸까?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자신이 없었다. 그가 좋은 아버지 가 될 수 있을지.

자애롭고, 다정하고, 상냥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는 그에게 있어 환상과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너에게는 내 미숙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에 게만큼은 최대한, 흠 없는 존재로 남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그녀에게 너무 많이 기대고 있었으니까.

그는 속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이엘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당연하다는 듯이 제게 안겨 오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자카리는 행복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 * * 

자카리는 정중한 어투로 황제와 론도 후작 영애에게 편지를 보냈다. 두 여자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평소 사교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 공작이, 직접 친필로 서명까지 곁들 여서 ‘제가 큰 죄를 지었으니, 두 분을 직접 만나 뵙고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상황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공작 부인의 입김이 잔뜩 들어갔음은 알 수 있었다.

‘좋아요, 그럼 공작 부부와 론도 후작 영애를 모시고 티타임을 열도록 하죠.’

황제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평소 그렇게 뻣뻣한 공작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고.

그리하여 공작 부부는 론도 후작 영애와 함께 황궁에 입궁하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두 분.”

자카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제가 손 사래를 치며 웃었다.

“괜찮아요, 이렇게까지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데.”

"맞아요, 얼마나 부부 금슬이 좋으시면 그 시간에 찾아오겠어요?”

론도 후작 영애가 상큼하게 덧붙인 말에, 이엘리와 자카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두 분께서는 아직 후 계자가 없으시죠?”

“제국 최고의 금슬을 가지셨으니, 당연히 일찍 후계자가 생기실 줄 알았는데.”

두 여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리고 자카리는 이런 상황을 타파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뻔뻔함을 겸 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카리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자, 자카리!”

두 여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떴고, 이엘리는 질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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