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
두 사람의 배웅을 뒤로하고, 이엘리는 정원에 발을 디뎠다. 잘 다듬어진 여름의 정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미지근한 여름 밤바람이 뺨을 스치자, 분홍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등뒤로 날렸다.
싱싱한 풀의 냄새와 옅은 꽃향기가 뒤섞여 풍긴다. 이엘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오늘 너무 심했나.’
세 여자와 대화를 하다 보니,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던 것이다.
자카리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잘 알고 있었는데도 매정하게 굴었다.
조금만 더 상냥하게 굴걸. 자카리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합리적인 이유만 대면 납득해 줬을 텐데.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가서 사과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엘리는 느린 걸음으로 정원을 돌기 시작했다. 밤의 산책은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부드러운 밤바람은 기분 좋았고, 은거울처럼 동그마니 뜬 달 또한 운 치가 있었다.
내일 공작가의 타운하우스에 돌아 가면, 자카리와 밤 산책이나 같이하 자고 해 볼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 던 이엘리는 문득,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어라?”
저 멀리,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 내가 헛것을 보나. 이엘리는 눈을 비비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저 그림자는 분명, 그녀가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주 익숙한 자의 것이다.
“자, 자카리?”
달빛을 등지고 자카리가 이엘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약간 헝클어져 이마에 흐트러진 은 발 아래로 달빛을 머금은 자카리의 푸른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이엘리는 약간 당황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여긴 론도 후작가의 타운하우스인데? 그런 의문에 찬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되물었다. 그때.
“……이엔.”
“응?”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자카리의 새파란 눈동자가 이엘리를 그 안에 담고는, 짧게 흔들렸다. 한숨처럼 흐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순간 자카리가 이엘리를 와락 끌어 안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체온과 짙은 주향.
어찌나 많이 퍼마셨는지, 이엘리의 머리마저 아찔하게 할 정도의 술기운이었다.
자카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엘리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자카리는 간절한 어조로 속삭였다.
“날 버리지 마……”
아니, 도대체 앤 지금 무슨 헛소리를하고 있는 거야? 이엘리는 그만 황당해지고 말았다.
* * *
이른 새벽, 자카리는 반짝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그가 먼저 한 건, 옆자리를 더듬는 일이었다.
“……이엔이.”
없어. 평소 그의 곁에서 깊게 잠들어있던 이엘리가 곁에 없었다. 순 간, 그 사실이 소름 끼치도록 그의 온몸을 물어뜯었다.
술기운 때문에 몽롱한 머릿속으로, 당장 그녀의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튀어 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자카리가 곧 바로 겉옷부터 집어 들었다.
“이엔을 데리러 가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카리는 벽을 붙들고 몸을 바로 세웠다. 밀려드는 술기운 때문에 사물이 제멋대로 흔들거렸다.
자카리를 간신히 방에 밀어 넣은 후, 간신히 잠든 마르텔 경이 본다면 환장할 광경이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이엘리가 곁에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불안해졌다.
‘이엔.’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이엘리가 현재 친구들과 함께 안전한 곳에 있고, 그들이 가벼운 말다툼을 했다는 그러한 사실은 이제 자카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이엘리를 보지 못하면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공작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타운하우스를 빠져나갔다.
* * *
그리하여 현재. 이엘리는 자신에게 기대 오는 자카리를 부축하며 기가 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너 술 마셨니?”
솔직히 묻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휘청거리는 자카리의 몸이라든지, 느른하게 풀려 있는 푸른 시선이라든지.
아니, 하지만. 술 마시고 남의 집에 쳐들어오는 것도 황당한데, 거기에 자신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대뜸 무너져 버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아주 조금……”
“이건 조금 수준이 아니잖아!”
답답해진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움찔한 자카리가 어깨를 굳혔고, 이엘리는 기가 막힌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니, 이 시간에 술 마시고 남의 집에 쳐들어올 정도의 패기를 보이려면, 아예 만취 상태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또렷한 말과는 다르게, 눈앞의 그는 만취한 상태였다.
“여긴 어떻게 온 건데? 지금 시간도 늦었는데, 허락은 받은 거야?!”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거 몰래 들어온 거면 어쩌지? 그렇다면 완전히 민폐인데.
제국 최고의 기사인 자카리는, 당연히 론도 후작가의 호위들을 따돌릴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
다.
그 소리는, 몰래 들어오는 것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는 거다.
“허락받았어.”
그때 자카리가 기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엘리는 순간 괴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뭐?”
"허락받았다고, 들어오는 거.”
어떻게 허락을 받았다는 거지? 론도 후작 영애에게 미리 연통을 넣었나? 하지만 자카리는 지금 아예 만
취 상태인 것 같은데, 론도 후작가에 먼저 연락을 넣을 정신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단 말이야.
이엘리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자카리를 쳐다보았다. 기가 죽은 자카리가 말했다.
"들어올 때, 론도 후작가의 호위들에게 직접 들어간다고 말했어.”
"하지만, 이렇게 술에 취해 있는 너를 들여보내 줬다고?”
이엘리는 현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자카리를 힘겹게 부축하던 그때.
“어머나, 공작 부인. 공작 부인의 기사님께서 오셨네요.”
론도 후작 영애가 등 뒤에서 자박 자박 걸어왔다. 길게 하품을 하면서, 웃음을 베어 문다.
이엘리는 두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후작 영애를 돌아보았다.
헤센바이츠 공작이 지금 론도 후작 가의 타운하우스에 있음에도, 론도 후작 영애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낯이었다.
“들여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론도 후작 영애.”
그때 자카리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론도 후작 영애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동자를 빛냈다.
공작이 공작 부인에게 매달리는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저렇게 만취한 상태에서도 자기 아내부터 찾아가는 모습을 보니 친구로서 흐뭇해지기도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예요, 사실 오늘 새벽쯤에는 찾아오시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딱 봐도 공작 부부는 사소한 사랑 싸움을 한 거였다.
그런데 문제는, 공작과 공작 부인의 관계에서 언제나 절대적인 우위인 쪽은 공작 부인이라는 거였다.
그렇다면 공작이 공작 부인에게 납작 기며 돌아오리라는 건 자명한데, 그때가 언제일지만 추측하면 된다.
론도 후작 영애는 이르면 오늘 새벽, 늦으면 이른 아침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추측은 완벽하
게 들어맞았다.
"그래서 미리 명령을 해 놨었죠, 공작께서 방문하신다면 안으로 모시라고요.”
“그, 그런 거였어요?”
“물론이죠. 공작께서 공작 부인을 곁에 두지 않고 잠드실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렇게 말한 론도 후작 영애가 이엘리에게 살짝 윙크를 해 보였다. 그녀는 약간 민망해졌다.
“아무래도 과음하신 것 같은데, 좀 쉬다 가시겠어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이엘리는 염치불구하고 론도 후작 영애의 호의를 받아 들이려고 했다. 어차피 휘청거리는 자카리를 타운하우스로 데려갈 기력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자카리가 단호하게 끼어들었다.
“아니요.”
아니, 잠깐만. 얘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엘리는 기겁했다. 자카리는 곧장 말을 이었다.
“이엔은… 저희 집으로 가야 합니다.”
“어, 잠깐만. 너 이렇게 술에 취했는데 어떻게……”
“……그렇지, 이엔?”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이엘리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
세상에, 창피해!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는 것 같잖아!
이엘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자카리가 여기서 더 진상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있느니, 그냥 조금 힘들어도 타운하우스에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푹 한숨을 내쉰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가.”
그리고 론도 후작 영애와 황제는 입술을 꼭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저 사납고 냉정한 공작이 자기 아내에게는 저렇게 말랑한 사람이 된다는 건, 사실 제국민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저 알고만 있는 것과 눈으로 바라보는 건 역시 다른 일이었다.
“이 진상은 제가 데려갈게요.”
이엘리가 자카리를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난처한 얼굴로 자카리를 바라보다 말했다.
"죄송하지만 사용인들을 몇 명만 붙여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걱정 말아요.”
론도 후작 영애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의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이엘리는 후작가의 도움을 받아 자카리를 마차 안에 밀어 넣었다. 창 밖을 힐끔 바라보며 이엘리가 말했다.
“황제 폐하, 그리고 론도 후작 영애. 오늘 일은 죄송하고 감사했어요.”
진지한 사과에 두 여자는 웃음을 베어 물었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흘 겨보다 말을 이었다.
“그럼 조만간 또 될게요. 이 진상 도 제대로 사과시킬 테니까……”
“아니예요,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무조건 해야죠, 이 늦은 시간에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요.”
두 여자가 손사래를 쳤지만, 이엘리는 단호한 얼굴이었다. 이런 엄청난 민폐를 저질렀는데 입을 싹 씻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일어나면, 두 여인을 향해 진지한 사과를 시킬 생각이었다.
* * *
마차가 달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자카리는 흐린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반쯤 열어 둔 마차의 창문 너머로 부드러운 달빛이 스며들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이엘리는 문득 자카리의 시선을 눈치첸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연녹색 시선과 푸른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깼어?”
“……잘 모르겠어.”
자카리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 모습이 꿈인지, 환상인 지, 혹은 현실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이엘리의 얼굴이 가진 곡선을 따 라, 달빛이 우아한 은빛으로 흘러내 린다.
이엘리는 슬쩍 미간을 좁히면서 자카리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조막만한 얼굴이 가까워졌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정말.”
투덜거리는 음성과는 다르게, 자카리의 이마를 쓸어내리는 조그마한 손은 무척 부드러웠다.
‘이엔이 눈앞에 있어.’
그 사실만으로도 자카리는 무한한 안도감을 느꼈다. 사랑하는 아내가 제 곁에 있었다.
어디로 떠나지 않고, 그의 앞에 앉아 자신을 똑바로 마주본다. 자카리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지금 우리, 어디 가고 있는 거야?”
“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이지.”
우리 집. 이엘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단어를 입에 담았고, 자카리는 무척 행복해졌다.
이엘리는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를 ‘우리 집’이라고 이야기해 준다.